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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독후감_이수현>
읽기 전부터 책의 어마어마한 두께에 압도당했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굳이 딱 떨어지는 답이 아닐지라도, 어떠한 실마리라도 좋으니 나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생각과 가치, 그리고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생각의 범위를 넓히고 싶었다. 사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인류의 기원에 대해 단지 서사적으로 풀어 놓은 것만 같은 이 두꺼운 책에서 내가 찾는 답을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피엔스에 대한 탐색을 마친 후 든 생각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을 하던 모든 것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배웠던, 전공 수업 중 하나인 <인간커뮤니케이션> 내용이 내게 너무나도 인상 깊은 말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받아들여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이지 <사피엔스>는 읽는 내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거리를 던져 주는 책이다. 책에 따르면 인간은 용광로에서 막 꺼낸 녹은 유리덩어리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나는 자라면서 무엇의 영향을 받아 현재 유리작품의 모습이 되었을까? 이때까지 자연스러운 제도와 가치로 내재화하고 있었기에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부분들부터 평소 왜 그러한 문제가 발생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영역들까지. 사실 모든 결과들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에 해당되는 각각의 원인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 원인들의 역사는 너무나도 오래되어서 ‘도대체 이 문제의 시작점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특히 평소에 내가 관심을 가져 왔던 일부 사회 현상에 대해 역사적 설명을 곁들여 꽤 심도 있게 다루고 있어 이번 책은 활자를 읽는 시간보다 끝없는 생각의 바다 속에서 헤엄친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평소 고민해 왔었고 관심을 가졌던 부분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 보았다.
● 모든 인간은 과연 평등할까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생각이 아닐까 하다. 얼마 전 사회학개론 교양과목을 수강하는 친구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생각해?’라고 물었고, 나는 즉시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사피엔스>를 읽고 나니 소득불평등 등 다수가 인식하고 있는 불평등을 제외하고도 사실은 평등이 제대로 실현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발생해 왔던 현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있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히’ 모든 국민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간다고 생각했었는데, 중학교 사회시간에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대해서 처음 접하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과거의 보수적이고 케케묵은, 말도 안 되는 제도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현재까지 사람들의 인식에 남아있어 실제로는 아직도 계급에 따라 은근한 차별을 당하고 있다니! 권력이나 신분제도라는 것이 사실은 상상의 질서에서 형성된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람들에게 카스트제도가 너무 깊이 각인되어서 실패한 것 같다. 인도에서는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카스트로부터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서 정부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도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하지 않아서라고 한다. 즉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정작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구성원들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 헌법에는 분명히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 즉 국적, 피부색, 종교, 지역 등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는 것을 명시하고 있지만 현재 사회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인 노동자(특히 소위 후진국 출신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더욱)들에 대해 차가운 시선과 함께 차별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고,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는 경우 등 여러 유형의 차별들이 만연하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이 평등사회가 아닌 상황에 대해 잣대를 들이밀어 판단해보기 전에, 나는 이러한 차별이 이루어지는 현 상황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 또한 누군가를 은연중에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해 평등사회를 만들지 못하는 데 어느 정도 일조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 원어민 교사라는 동일한 직함을 가지고 발령받은 두 선생님이 있었는데 한 분은 미국 출신 백인, 또 한 분은 동남아시아 국가 출신 황인이었다. 동남아시아 국가 출신 분반에 배정된 반 친구들은 미국 선생님 분반에 배정된 친구들을 부러워했고, 수업 시간에 특유의 악센트가 담긴 동남아시아 국가 선생님의 발음을 따라하며 키득거렸다. 대부분이 그런 수업 분위기라는 것이 분명 그 분께는 상처가 되었을 것이고, 그 상처를 남긴 다수에는 나 또한 속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런 유치하고 철없는 행동을 했을까 생각이 든다.
굳이 외국인에 대한 차별만이 아니더라도, 같은 인종 간에도 차별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 사회 내에서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명제에 반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으로 소득불평등, 학력 불평등, 그리고 성 불평등에 대해 평소 특히 많은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와 같은 불평등 유형들은 비단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나라든 존재할 수 있으며 이미 많은 국가에서 존재한다고도 생각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 좀 더 심하게 대두되는 문제인 것 같다.
먼저 소득불평등과 학력불평등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노오력의 배신>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연결되어 떠오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답을 찾을 수 없는 한국사회의 견고한 틀, 그리고 취업 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많은 차별을 받으며 이러한 틀을 더욱 단단하게 고착화시키는 학벌이라는 굴레. 돈 몇 푼 좀 없으면 어때, 노력해서 벌면 되지. 학벌 좀 낮으면 어때, 성공하고 싶으면 더 공부해서 ‘좋은’학교 편입하던가, 아니면 수준에 맞는 직장에 들어가던가. 아직 많은 기성세대들은 이처럼 생각하며(물론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기성세대들 또한 많이 존재하지만) ‘조건’에 미치지 못한 청년세대들을 차별한다. 청년세대들은 또한 이러한 차별에 순응하며, 더 이상의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심지어 청년세대조차도 모든 사람이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차별을 가해 줄 것을 원하니, 이것이 냉정하지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인가, 싶기도 해 슬프다. 내게 동일한 상황을 적용했을 때, 나보다 더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누군가와 평등한 잣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자신 있게 ‘YES’라고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더욱 슬퍼진다. 내가 이기적인 것일까, 사회가 나에게 이런 잣대를 심은 것일까. 좋은 대학에 가면 무조건 성공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다고 행복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타인을 보는 중요한 잣대로 삼고 끊임없이 평등한 관계에 위협을 가할까?
<노오력의 배신> 시간에도, 심층리포트를 쓰면서도 여러 번 생각했지만 여전히 의문이 드는 점은 ‘대한민국에서 인간 간의 진정한 평등이란 과연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물음에 대한 답이다. 청년세대뿐만 아니라 기성세대 중에서도 소득과 학력에 따라 불평등을 느끼는 경우가 분명 많을 것인데, 이 또한 ‘~위계주의’라는 동일한 인식체계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 내에 존재하는 현상이기에 특정 연령에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포인트처럼,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과 태도는 한 사회의 분위기를 구성할 수 있는 상당한 힘을 가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책에서는 ‘진화는 평등이 아니라 차이에 기반을 둔다’라고 말하며 사람들 간 차이가 발생하는 현실을 설명하지만, 한편으로는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엔 없다’라고 하며 오히려 역으로 뒤집어 평등이 실현 불가능한 상황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이 상당히 신선했는데, 이에 따르면 고소득층 혹은 고학력자들의 자본과 지식(또는 학력위계)을 이와 대비되는 상황의 사람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전체적인 평등을 실현시켜야 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또한 실현되기 어려운 듯하다. 그 예로 ‘부자세’가 많은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며 논외로 사라져버린 것이 생각났다.
성 불평등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근 꽤 충격을 받으며 읽었던 <페미니즘의 도전> 내용이 함께 생각난다(정작 독서리포트에는 순간의 생각들을 충분히 담지 못해 많이 아쉬웠지만). 수업 책이 자꾸만 오버랩되고 내용이 연결되어 생각난다는 것이 정말 신기한데, 교수님께서 일부러 <사피엔스>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함께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생각거리들을 일부러 던져 주기 위해 이전 책을 선정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앞의 소득, 학력불평등과 달리 성별은 개인의 노력이 아무리 개입되어도 평등해질 수 없는, 아니 0.001%의 노력을 한다고 해도 선택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인간이 가장 평등해질 수 없는 역할은 바로 남성과 여성으로서 존재할 때라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책의 내용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현재까지 가장 지배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는 생물학적 사실보다 근거 없는 ‘권력관계’와 같은 상상의 지식에 기반을 둔 것이므로 불안정해야 하고, 끊임없이 흔들려 일찍이 무너졌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우리는 성별에 따라 ‘옳은’ 역할을 부과하고 있으며,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에 부합하는 행동양식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는 사회를 보편적이고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왜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간 자체를 평등하게 보지 못하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혐오하게 된 것일까? 특히 인식의 개선이 과거에 비해 많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최근에도 ‘여성에 대한 엄격함과 차별적 시선’은 왜 그토록 강하게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을까? 이제는, ‘성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뻔한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볼 때, 여성이 상대적 약자인 현재 상황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을 해 보려 한다. 도대체 왜 우리는 성별 앞에서 평등해질 수 없는지 말이다.
책에 따르면, 이와 같은 모든 차별은 허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차별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심해질 수 있으며, 역사에서 한번 희생자가 된 이들은 또다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고 역사의 특권을 누린 계층은 또다시 특권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냉정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한 시대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던 것은 결코 갑작스럽게 발생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구조화되어 왔고 현재 드러나는 모습은 그 재결합의 결과라고 생각하니 앞으로의 미래에는 또 어떤 양상의 새로운 불평등이 발생하게 될지 두려우면서도 궁금하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 또한 신화라니. 나는 이때까지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항상 이를 전제로 상황을 생각했는데 이 또한 허구의 존재였다니, 한편으로는 허무하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평등’과 같은 가치조차도 조작된 신화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렇다면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다른 가치들 또한 충분히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순수한 감정이라고 생각되는 ‘사랑’ 또한 성별 이데올로기를 통해 조작된 것도 같고, ‘공감’ 또한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무제한적으로 상대에게 공감능력을 발휘할 개인이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역시 조작된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까지가 조작된 것이며, 순수한 가치란 이 세상에 존재할까?
또한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일 뿐이다’는 구절이 정말 인상 깊었다. 인류란 결국 합의된 상상의 질서 속에 갇힌 존재들이었다니... 그렇다면 현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불합리에 대한 저항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인가? 만약 자신들이 저항하고 있는 갈등과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어차피 또 다른 거대한 문제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아무도 불합리함에 맞서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많은 집단이 저항하는 이유에 대해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더라도, 더 거대한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현재를 단 1초라도 더 나은 모습으로 살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한편으로는 내가 자연스럽게 옳다고 생각하는 생각이나 가치들이 과연 순수하게 발생한 나의 모습 중 일부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사회가 합의한 상상의 질서에 얌전히 순응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동물에 대한 인간의 가학
동물학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던 차에, 책의 여러 부분에서 드러난 인간에 의한 동물의 잔인한 현실은 이와 관련해 많은 생각을 하게끔 했고, 그 결과 단지 문제의식을 가지던 것으로부터 구체적 실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현재 한 대학 잡지에 온라인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데, <라이온 킹을 삼켜버린 걸리버>라는 주제로 관련 생각을 구체화한 글을 썼다. 꼬리를 물고 늘어진 여러 의문과 생각들을 단지 혼자만의 생각으로 흘려보내기는 너무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로 내 생각을 전달하면 글을 읽는 사람들이 혹여나 동물에 대해 가혹행위를 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질까 싶은, 조금이라도 문제의식을 가질까 싶은 마음이 컸던 것도 있다.
오히려 과거 인간의 조상들은 동물을 두려워하면 두려워했지, 지금처럼 동물과 인간이 노예와 주인 같은 관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동물에게 포악함을 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을까? 이 같은 궁금함은 ‘별로 중요치 않았던 동물 사피엔스는 어떻게 모든 종의 제왕이 되었는가’의 구절과 이어지는 부분을 읽고 더욱 확장되었다. 설명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간은 최근까지도 사바나의 패배자로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때문에 두 배로 잔인하고 위험해졌다’는 것이다. 위기에 처하면 살기 위해 더욱 강해진다고 하는데, 인간이 그 대표적인 예라니. 이를 고려하면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될 수 없다고 한 책의 주장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사피엔스의 기본적 특성에 관용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사회 속에서 여러 유형의 상호작용을 하며 때로는 상대를 이해하고 잘못을 용서하기도 하는 인간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이 또한 사피엔스가 오랜 시간을 거쳐 많은 사회적 경험을 통해 진화하면서 길러진 능력 중 하나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기억에 강하게 남았던 부분은 ‘만일 우리가 이미 얼마나 많은 종을 절멸시켰는지를 안다면, 아직 살아남은 종들을 보호하려는 의욕이 좀 더 생길 것이다’는 구절이다. 손에 다른 종들의 피를 묻혀 가며 살아남은 어찌 보면 잔인한 종족, 인간. 그런데 사실은 나 또한 사피엔스로부터 진화한, 밤에 야식이 먹고 싶을 때 치킨을 시켜 ‘치느님은 진리’라며 친구들과 감탄하고, 야영에 가서 삼겹살을 마구 구워 먹는 ‘동물을 죽여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나면 ‘나 또한 이중적인 사피엔스인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이 언제부터 먹이사슬의 정점으로 올라섰는가에 대해 생각했을 때, 책에서는 ‘닭 튀기기’, ‘숯불에 돼지고기 굽기’ 등의 조리를 가능하게 하는 ‘불’이 인간을 강하게 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만약에 인간이 불을 사용할 줄 몰랐고 조리를 할 수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거대 사회와 제국을 구축할 수 없었을까? 또한 다른 생물 종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과거 초기 사피엔스와 같은 여전히 연약한 존재였을까?
또한 비유적인 표현이 현재 인간과 동물 간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해 인상 깊었던 부분은 ‘세상의 대형동물 중 인간이 초래한 대홍수에서 살아남는 것은 오직 인간 자신과 노아의 방주에서 노예선의 노잡이들로 노동하는 가축들뿐일 것이다’와 ‘호주 해안 모래밭에 찍힌 인간의 첫 발자국은 곧바로 파도에 씻겨버렸다. 하지만 침입자들은 내륙으로 진격하면서 결코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을 남겼다’이다. 굉장히 예리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슬펐다. 본성에 전혀 맞지 않는 인간 편의 위주의 생활방식에 복종하고 행동의 자유를 제약받는 동물들의 삶은 굉장히 가혹해 보인다. 한 집단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서는 자신들과 이질적, 상반되는 특징을 지닌 또 다른 집단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밖에 없게 되는 잔인한 현실이 슬프다.
<라이온 킹을 삼켜버린 걸리버> 칼럼 끝 부분에는 이 같은 생각을 담았다. 물론 동물에 대한 가학이 옳다 주장하는 사람은 많이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 쯤 인간과 동물 간 슬픈 관계에 대해 다수가 생각해 줬으면 했다. 나 또한 <사피엔스>를 읽으며 짚어볼 수 있었던 문제였기에. ‘혹자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동물들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 어느 정도 있다고 주장한다. 문명이 발전하며 어느덧 자연스럽게 인간이 동물의 위에 군림해버린 현 상황에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점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라이온 킹의 등에 올라타 드넓은 초원을 지칠 때까지 누비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 빨리 달리지 못한다고 해서 채찍질을 가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배가 고플 때 라이온 킹에게 먹을 것을 구해 오라고 할지언정 허기를 참지 못해 최소한 라이온 킹을 통째로 삼키는 걸리버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피로사회
이번 학기 <국제매너를 갖춘 대학 지성인> 강의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강의 직후 당시 내가 든 느낌은 ‘현직 기자의 저널리즘의 미래 예측’이 상당히 잿빛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계’ 때문이었다. 로봇저널리즘이 발전하면서 단순 사건 보도 기사는 로봇이 쓰는 경우가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흔한 일이 되었고, 현직 기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 기자가 쓴 기사와 기계가 쓴 기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능력을 발휘하는 기계를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우며 복잡해졌다. ‘내가 기자가 되기 전까지는 로봇 저널리즘의 발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다. 갑작스럽게 심각한 고장이라도 나라 제발...’
이는 단지 언론계의 문제만이 아니다. 과거를 볼 때 산업혁명부터 단순 기계의 활용은 실행되고 있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좀 더 ‘많이 똑똑해진’ 기계에 의해 사람들이 많은 편의를 누림과 동시에 걱정의 목소리 또한 늘어났다. 바로 인간이 기계를 누리는 것이 아닌, 기계에 의해 인간이 지배당하면 어떡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특히나 편하기 위해 기계를 이용한 것이 사실은 인간을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책에 관련 내용이 등장해서 많이 공감되었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현대사회가 과거에 비해 더욱 피로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보다 현재의 체감시간을 더욱 빠르게 만든 탓일 것이다.
어느 정도의 고생만 하면 풍성한 밀이 상당한 기간 동안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기에 자연스럽게 시작된 농업혁명이 사람들에게 사치의 덫으로 작용했던 것처럼, 사치를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사치를 부리는 것처럼, 우리 또한 삶의 많은 부분에서 편안함이라는 사치를 누리려 기계와 같은 많은 수단들을 끊임없이 동원해 결국 ‘피로사회’라는 결과를 낳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 영역이 앞으로 점점 더 줄어들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다.”
우선, 나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이전에 학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종교전쟁, 종교 갈등 등 다양한 내용들을 배우며 ‘종교는 강력한 것’이라는 사실을 감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지, 직접적으로 이해하거나 그 강력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딱히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발생한, 현재 뜨거운 감자로 계속 논의가 진행 중인 ‘최순실 게이트’는 내게 ‘종교가 한 나라를 흔들고 거대한 권력을 잡아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피부로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 사건이었다. 아마 나 뿐만 아니라 사건을 접한 모든 국민들이 느꼈을 것이다. 비록 이 사례는 ‘종교를 통한 인류 통일’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리고 현재 밝혀진 모든 사건들(예를 들어 교주인 최태민 목사를 부활시키기 위해 고의로 세월호를 침몰시켰다는 세월호 인신공양설 등) 또한 모두 사실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지만, 인간의 이성적 영역과는 별개로 종교가 개인 및 사회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친구들과 최순실 사건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있었는데, 여러 국정개입 의혹들 중 가장 소름이 돋고 무서웠던 것 또한 단순히 권력과 부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서가 아닌, 종교적 신념 및 교리에 의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서이다. 추상적 개념이자 사실로 증명되지도 않은 관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지배해 구체적 행동으로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우면서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현재 무교이지만, 기독교와 불교를 둘 다 믿어 본 경험이 있다. 어렸을 때 같은 동에 살던 이웃 전도사 아줌마를 따라 동생과 함께 처음 갔던 교회는 ‘따뜻한 사람들이 많은 집단’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 이후 열심히 교회를 나가 캠프도 가고, 성경 공부와 기도도 열심히 하고, 심지어 초등부 콜링워십팀도 맡아 토요일에 춤 연습을 하러 가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귈 겸 잠시 다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교회에 보냈던 역시 무교인 엄마는 이런 당시의 나를 보고 잠시 걱정했다고 한다. 기독교를 믿는 것에 대한 걱정이 아닌, 앞으로 주말에 가족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들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그래도 교회에 다녔을 당시 여러 친구들과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즐거운 생활을 했지만, 초등학교 5학년 쯤 한 번 몸이 아파서 교회에 나가지 못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담당 선생님이 가족들이 모두 자는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번 이상 집으로 전화를 해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 아파서 못 나온다는 건 핑계다. 기도와 믿음이 부족해서 벌 받은 것이다’는 식으로 심하게 말을 한 이후 충격을 받고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서울여대에 입학한 후, 채플이 필수라는 말에 비슷한 강압적인 분위기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한 점이 솔직히 있었다. 하지만 강요가 아닌 편안한 분위기에서 좋은 말씀을 해 주시는 장경철 목사님의 경건회 시간은 어느덧 내게 ‘힐링 타임’이 되었고, 1학년 내내 경건회 개근을 하여 친구들로부터 기독교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기도 내용 역시 딱딱한 것이 아닌 ‘우리 학우들의 미팅이 성공하여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해 주시고~’과 같은 것이어서 재미도 있었고 기독교라는 사상을 최대한 거부감 없이 전달해 주시려고 노력하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열심히 들었다. 최근에 이불 안에서 못 일어날 정도로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었는데, 한 친구가 힘을 주는 CCM이 있다며 김도현의 ‘사랑이란’ 이라는 노래를 보내 주었다. 카톡에 함께 덧붙인 ‘이거 CCM이기는 한데 교회나 하나님 이런 내용 아니다ㅋㅋㅋ힘내라 이수현’ 이라는 메시지는 당시 정말 감동을 주었고, 무교인에게 부담을 주려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친구의 마음이 느껴져서 더 감동이었다. 그 이후 나는 그 CCM의 멜로디가 좋아 자주 들었고, 친구는 그런 나를 보고 자꾸만 전도하려 했다(^^). 그래도 이전과는 달리, 기독교는 아니지만 기독교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불교와 관련해서는, 중학교 때 ‘어린이 법회’라고, 주말 불교 학교 같은 프로그램에 약 2년 동안 꾸준히 참여했던 적이 있다. 그 과정 중에는 반야심경 다 외우기, 새벽에 108배 하기, 석가탄신일 기념 장기자랑 준비하기 등이 있었는데 이 또한 교회를 다니던 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즐거웠었다. 다만 교회에 비해 차분하고 조용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어린이 법회를 다니는 동안 연계되어 있는 절인 ‘월봉사’에도 꼬박꼬박 나가 절을 했고, 절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꽤 열심히 참여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바빠졌고, 자연스럽게 어린이 법회를 그만두게 되었다.
현재 나는 무교이지만, 두 가지 종교를 모두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각 종교의 분위기와 대략적인 특징들을 알 수 있어서 이전의 경험들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든 생각은, 종교에 접근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상을 전파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이해라는 생각이 든다. 그토록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내가 이질감을 느끼고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던 것처럼, 종교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통일시키기도 하지만 또한 극심한 분열을 낳을 수도 있는 두 얼굴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둘째 동생은 선교원 유치원을, 막내 동생은 불교 유치원을 나왔는데 어렸을 때 ‘어떤 신이 최고인가’를 두고 싸운 적이 있다. 당시에는 진지했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정말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다.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든든한 안식처가 되어 주고 믿음을 가질 만한 초월적 존재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인데도 말이다. 뻔한 결론이기는 하지만, 종교와 관련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이해와 포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장 절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과학과 제국의 결혼, “과학은 자신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할 수 없다.”
<사피엔스>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바로 과학기술, 그리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연관성 부분이다. 인류의 기술개발로 인해 세상의 많은 부분이 변화했다.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고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등 여러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발생하는 부정적 측면들에 좀 더 초점을 맞춰 보고 싶다. 기술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풍요가 될 수도 있고,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무기와 관련해서는 더 생각해 볼 부분이 많다. 왜 전 세계는 무기에 집중할까?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국제 사회에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는 것은 맞지만 사실상 최신식 무기를 개발하고 강력한 무기를 많이 비축하는 것만이 최선일까? 이러한 무기경쟁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이렇게 무기 개발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다가 결국 미래에 인류 전체를 파괴할 만한 거대한 위협으로 돌아올 것 같아 두렵다.
지나친 과학기술의 개발이 야기할 위험성도 무섭지만,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자본의 논리와 투자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이전의 역사를 돌아봤을 때 콜럼버스 등의 탐험가들이 많은 자본을 투자받고 신대륙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현대인의 우주개발에도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또한 자본이 많아 우주 분야에 충분히 투자가 가능한 국가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개발이며, 그 결과에 따라 세계 속에서의 국가 위상과 힘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신대륙, 신 영역에 대해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호기심과는 별개로, 자본의 정도가 이를 실현시켜줄 수 있을 것인지, 없을 것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이 정말 슬펐다. ‘과학은 자신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할 수 없다’는 부분처럼, 과학이 사회의 가치를 반영한다는 것의 의미가 단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여러 자본과 국력, 그리고 사회의 분위기의 영향도 모두 포함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가적으로 ‘한국에서는 왜 노벨과학상, 노벨문학상 등의 수상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제외하고 생각해 볼 때). 반대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옆 나라 일본은 우리와 어떤 차이가 있기에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얼마 전 신문에서 국가 정책 중 하나로 추진해 세계유명 석학들을 대학교로 유치했었는데, 몇 백 명의 외국 교수진 및 연구진들 중 1명을 제외한 모두가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상당히 놀랐는데,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과학 그 자체는 아무런 이데올로기에도 개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한국 교수진들이 특정한 방향으로 연구를 유도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과학 연구 자체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논문의 몇 번째 순서에 들어갈 것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교수 라인’등에 연구를 수행하는 데 많은 괴리감과 어려움이 따랐다는 것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연구가 무엇인지에 몰두하는 분위기가 낯설었다는 한 교수의 인터뷰가 특히 기억에 남았고, 국내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분야 석학인 외국인 교수들과 함께하는 연구도 필요한데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속상했다. 책에서 주장한 것처럼 자본으로 형성되고 구성, 제작된 제국(국가)가 결국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버린 현실을 마주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부분을 읽고 가장 크게 들었던 생각은, ‘인간이 바라야(正) 과학기술의 방향도 바르다’는 것이다. 미래 언론계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예상하는 로봇 저널리즘을 경계해야 할 진짜 이유는 ‘언론계 지망생들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기계적인 저널리즘이 될까봐’이다. 로봇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개발자의 가치와 관념이 주입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로봇을 개발하는 인간이 잘못된 사상이나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로봇 역시 잘못된 성질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보도기사를 정확한 사실 위주로 잘 쓰는 로봇이라 할지라도,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왜 이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쓰기에는 감정 및 의사소통의 영역이기에 힘듦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약 로봇이 인간에 의해 잘못 ‘오염’되어 기사를 쓴다면 가장 사건의 본질과 핵심을 짚어내야 할 언론이 특정 가치를 바탕으로 이를 사실인 것처럼 보도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계 오염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예를 들자면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채팅로봇 ‘테이’를 들 수 있다. 테이는 하루만에 운영을 중단했는데, 그 이유는 여성 혐오 및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드러내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또 흑인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저장했는데 이후 폴더 자동 분류 기능을 사용했더니 그 흑인 친구를 동물 폴더로 집어넣은 사례도 있다. 이러한 이유는 개발자의 인종차별적 가치, 여성혐오에 대한 주관, 사람들의 잘못된 가치 주입 등으로 로봇이 오염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미래에 로봇이 언론과 같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데 분명 비슷한 유형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주 극단적으로는 이것이 큰 국가적 분쟁으로 이어져 세계적 대혼란이 발생할 위험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았다. 인문학은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전해 과학 분야의 학문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즘 시대이더라도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영역이라는 것을. 학문적으로 접하기 어렵더라도, 여러 책을 통해서라도 인문학 서적을 읽으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 이어서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미래에 어떤 언론인이 될 것인가? 나아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우선 어떤 언론인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올바른 보도를 객관적으로 하는 언론인’, ‘글을 잘 쓰는 언론인’과 같은 규범적인 듯 보이는 기준을 말하고 싶지 않다. 굳이 꼽자면 ‘기계가 쓸 수 없는 기사를 쓰는 언론인이 되고 싶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과 소통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생각들의 끝에, 나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는, 함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먼저 앞부분에 대해서는 이처럼 인간과 인간이 절대 평등한 관계가 되지 못하고, 인간이 동물에게 가학을 할 수밖에 없고, 피로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된 공통적인 접점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했다. 그 결과, 사실 근본적으로 가장 밑에 자리한 주요 기제들 중 하나가 바로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것들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변화하고, 지배당하고, 발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사피엔스가 기본적으로 가진 특성은,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무수한 진화를 거쳐 현재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요소는 바로 사랑도, 공감도, 분노도 아닌 이 모든 것들을 포괄할 수 있고 대부분의 행동의 원인이 되는 욕심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전체적으로 정리해볼 때 사실 계속 생각해 봐도 생각의 끝을 맺지 못한 부분이 많았고, 아직까지 혼란스러운 점들이 존재한다. <사피엔스>는 스스로 생각해 볼만한 점들이 많았기도 했지만, 특히 책을 읽고 함께 읽은 주위 사람들과 한 개념이나 주제에 대해 든 생각을 함께 말해 보며 더 풍부한 생각들을 할 수 있었던 책이다. 단순히 책에 실린 내용을 읽기만 할 때보다 논의를 다양하게 확장시킬 수 있었다. 처음에는 A에 대한 생각을 말 하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가도 A+α로 또 다른 부연설명을 하게 되고, 어느 새 B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확장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혼자 책을 읽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생각들이 마구 튀어나오기도 하고, <사피엔스>를 읽고 사람들이 함께 고민해 볼만한 부분이 어떤 것이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오히려 새로운 고민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독서모임’이 책을 꼭꼭 씹어 나의 일부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하는 추가적인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아 어떻게 사피엔스 같이 두껍고 재미없는 내용이 베스트셀러라는 거지?’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사람들은 단순히 이 책을 읽음으로써 흥미를 느낀 것보다는 내용을 읽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푹 빠져 보는, 그럼으로써 나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과정이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나처럼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럿이 함께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내가 주목하지 않았던 사피엔스의 부분에 대한 상대의 생각을 듣는 과정이 재미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사피엔스>와 같은 책이 재미있게 느껴질 수 있다니! 그래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종강 이후에 ‘총, 균, 쇠’도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는 말이 인상 깊게 남아서, 더 이상 역사 분야와 인문학에 대해 겉만 보고 두려움을 가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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