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에 대한 대가가 바로 이것인가.
자신의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정장공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신도 오래 전부터 경사직(卿士職)에서 물러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이제 그 뜻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찬 바람이 도는 음성이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 정청을 나왔다.
궁성문 앞에서 정장공(鄭莊公)의 입조 소식을 듣고 인사차 조정으로 들어오던 몇몇 중신을 만났다.
"벌써 나가십니까?"
"어린 왕이 나를 버리니, 내가 여기에 더 이상 머물 까닭이 없소이다."
정장공(鄭莊公)은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왕성 밖에 대기하고 있는 수레에 올라 바람처럼 정나라로돌아가버렸다.
정장공(鄭莊公)의 경사직 박탈에 정나라 신하들은 이를 갈며 분개했다.
- 배신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몇날 며칠을 궁정에 모여 왕실에 대해 비판했다.
"여러 말 할 것 없습니다. 당장 군사를 일으켜 왕성을 쳐부숩시다."
"배은 망덕도 유분수지.
어찌 감히 우리 주공을 쫓아내고 괵공을 경사(卿士)에 앉힐 수 있단 말인가.
이 참에 아예 왕을 갈아치웁시다.
그렇게 되면 천하의 제후들도 모두 우리 정나라를 두려워할 거이요,
나아가서는 패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외다."
강성론자 중 대표적인 사람은 대부 고거미였다.
무예가 뛰어나고 전쟁에 능한 전형적인 장수형이었다.
지난날에는 기묘한 우회 전술로 늠연을 침공한 위나라의 주우와 공손활을 대파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었다.
- 왕성을 공격하자.
고거미의 주장은 어느덧 정나라 내부의 여론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고거미의 뜻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온건파도 있었다.
대부 영고숙이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올빼미와 염소고기로 정장공(鄭莊公)의 효심을 불러 일으켜
황천을 파 어머니 무강을 만나게 해준 바 있는 의인(義人)이기도 했다.
"왕성을 공격하다니, 안 될 말이오.
왕과 신하는 어미와 자식과의 관계나 다름없소.
우리 주공은 지난날 어머니도 용서하신 분이외다.
어찌 왕을 원수로 대할 수 있겠소."
"그럼 이대로 치욕을 안고 지내잔 말이오?"
"그렇소.
일 년만 참고 지내면 주환왕도 반드시 후회할 것이오.
그런할 때 입조하여 마음을 달래면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 터인데,
어찌 한때의 분노로 선군(정환공)의 충성된 죽음에 손상을 끼치려 하는 것이오?"
두 개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그러할 때 중재역으로 나선 사람이 제족(祭足)이었다.
제족은 정장공의 모신(謨臣)으로서, 정나라 제일의 지략가이기도 했다.
"내 소견으로는 두 분의 생각을 한 데 모으는 것이 어떨까 싶소."
"한데 모으다니요?"
"이를테면 왕실에 대한 우리의 불만을 알리는 방법으로
주왕실 직할지인 온(溫)과 낙(洛)지역의 곡식을 탈취하는 것이오.
만일 주환왕(周桓王)이 사자를 보내어 항의하면 그때 가서 우리 정나라의 불편한 마음을 밝히고,
아무 말 없으면 적당히 지내다가 다시 입조하여 예전 관계를 회복하자는 것이오."
한마디로 주왕실과 정나라 공실의 체면을 모두 살리자는 절충안이었다.
"묘안이다!"
이렇게 외치고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정장공(鄭莊公)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신하들의 분분한 의견을 듣고만 있다가
제족(祭足)의 말을 듣고 비로소 자신의 심증을 밝힌 것이었다.
정장공(鄭莊公)에 대한 정나라 신하들의 신뢰는 대단했다.
몇날 며칠 동안 토론의 장이 되었던 정청 안은 '묘안이다'라고 한 정장공의 한마디에 조용히 가라 앉았다.
고거미도 영고숙도 입을 다물었다.
제족(祭足)의 책략을 어떻게 실행에 옮길 것인가가 논의되었다.
- 초여름에는 보리, 가을에는 벼. 총지휘관은 제족(祭足)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정나라 수도 신정은 다시 분주해졌다.
제족은 1천 군사를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온(溫) 땅으로 들어갔다.
병차 50승을 보란 듯이 주변에 배치하고 온(溫) 땅의 관장을 찾아갔다.
"우리 나라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구하러 왔소이다. 양곡 1천 석만 빌려주시오."
온(溫) 땅 관장은 당황했다.
곡식을 빌리려면 왕성에 가서 청할 일이다.
그런데 군사까지 거느리고 와서 이 무슨 요구인가.
온(溫) 땅 관장은 고개를 저었다.
"왕명 없이는 곡식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을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러나 제족(祭足)은 한술 더 떴다.
"우리는 지금 몹시 굶주려 있소.
왕명을 받아올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구려.
오는 길에 보니 마침 보리가 잘익었더이다.
일단은 사람 살리는 것이 급하니, 우리 손으로 보리를 베어가지고 가겠소이다.
관장께서는 왕실에 잘 말씀드려주시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손을 들어 신호했다.
군사들은 각기 준비해 온 낫을 들고 온(溫) 땅의 보리밭으로 들어가 잘 익은 보리를 몽땅 베어 수레에 실었다.
온(溫) 땅 관장은 정나라 병사들의 강성함을 아는지라
감히 만류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대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3개월 후,
제족(祭足)은 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성주(成周)지역으로 들어갔다.
성주는 낙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는 낙읍(洛邑)이라고 했다.
낙읍은 왕성이 있는 곳이다.
물론 왕성 가까이까지 접근한 것은 아니다.
제족(祭足)의 병사들은 왕성과는 멀리 떨어진 낙읍의 교외에 펼쳐진 들판으로 들어갔다.
때는 7월 중순. 논마다 벼들이 잘 익어 황금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왕실의 직할 경작지였다.
온(溫) 땅에서처럼 공공연히 논을 침범할 수가 없었다.
"장사꾼으로 변장하라!"
제족(祭足)의 명령에 군사들은 갑옷과 투구 대신 상인 복장을 하였다.
마을 입구에 숨어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
삼경이 되자 제족(祭足)은 횃불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매복해 있던 정나라 병사들은 신호가 떨어지자 일제히 낫을 들고 논으로 들어가 나락을 베었다.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땐 낙읍(洛邑) 교외의 들판엔 벼 한 포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 허허벌판이었다.
경작지를 관리하는 대부는 이러한 광경에 넋을 빼앗겼다.
재빨리 낙읍(洛邑)의 군사들은 동원하여 벼 도적을 뒤쫓았으나,
정나라 군사는 이미 철수한 뒤였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