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님이시여
가을이 성큼 우리 사이에 깊이 스며들었네요. 여름이 지나가도 역시 밤에는 잠원 고수부지에 나가 바람 쐬는 맛이 최고일걸요. 억새가 바람에 날리며 손짓하는 모습, 보셨나요. 떠나는 계절을 향해 '잘~가아..' 하고 손짓하는 이별의 장면, 이 가을밤에 압권이에요. 아마 다음에 이런 말이 이어졌을걸요. '이제 헤어진다니 어떡허니, 여름아! 내년에 다시 본대두 섭섭해서 어쩌지.' '뭘 그래, 세상사 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게 아니겠어.'
달빛이 내려와 잘게 부서지면서 내품는 은가루로 하여 무거운 침묵으로 흐르던 강물은 온통 눈부신 무도회장으로 바뀝니다. 철썩 파도가 밀려올 때 마다 은비늘은 눈 시리게 빛났고 당신의 검은 눈동자에는 나타샤 월츠가 흐르는 무도회장, 화려한 러시아 궁전이 떠오릅니다. 상큼하게 머리를 감아 올린 오드리 헵번이 오른 손으로 하얀 드레스를 감아쥐고서 월츠가 흐르는 무도회장 안으로 춤추며 들어갑니다.
전쟁의 참화가 곧 닥칠 줄 뻔히 알면서도 러시아 귀족사회는 밤이면 아름다운 무도회가 열리지요. 삐에르, 멜 .화라가 분했나요? 전쟁광 나폴레옹의 야욕이 러시아로 밀려올지 모르는 두려움에도 무도회는 열리고 선남선녀는 서로 눈을 맞추고 청춘을 즐기고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 보았던 '전쟁과 평화'에 나오던 나타샤의 눈부신 야회복이 오늘따라 떠오르는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강을 따라 내려가는 유람선이 마치 오드리헵번이 월츠를 추던 러시아 궁전의 밤처럼 화려하네요.
자연은 위대했습니다. 달빛이 뜨자 세상은 제 빛을 잃었습니다. 고압선 철탑 아래에서 잠수교까지 내려가는 벌판에는 억새가 무성하네요. 또렷하게 하얀 제 색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새는 달빛 아래 정체가 불투명한 유령처럼 희뿌연 부유물처럼 둥둥 떠 있고, 그의 손짓이 좀체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소금을 흩뿌려놓은 듯 하다는 이효석의 메밀밭의 화려함은 어림도 없고 그저 바람이 불어가는 길 따라 무심하게 손을 흔들 뿐 이었습니다.
올림픽 도로 건너 아파트도 제 빛을 잃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알맹이는 쏙 빠지고 껍대기만 남은 말없는 장승처럼 껑충한 키를 어쩌지 못하고 흘러가는 강물을 물끄럼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 이었습니다.
강물이 일으키는 포말이 철썩 바다 소리를 흉내 냅니다. 달은 말이 없고 잠수교 쪽으로 펼쳐진 들녘에는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던 무대와 흡사하네요. 그 썰렁하기 짝이 없는 무대장치처럼 버드나무가 옹색하게 바람에 제 머리카락을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렸지만 나는 오늘 누구를 기다리고 있나요? 빈티가 흐르는 버드나무가 불쌍해서 발걸음을 돌립니다. 억새와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한 숲 사이로 외줄기 소로가 뚫려 있더라구요. 들어서자 선뜻 한기가 느껴집니다. 무성한 숲 사이로 교교하게 냉기가 흘러 한적하기 짝이 없는 오솔길을 걸으며 부르르 몸을 떱니다. 어쩐지 올 겨울 강바람은 무척 맵쌀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제 비가 을씨년스럽게 뿌리고 바람도 문풍지를 흔들고 지나가면 길고 긴 겨울이 오겠지요.
환하고 넉넉하게 한강을 비춰주던 보름달이 기울면 시옷자를 그리며 기러기는 겨울 밤을 도와 북녘으로 날아가고 우리의 지난(至難)했던 한해가 기울겠지요.
이 한가로움, 끝간 데 없는 가벼움과 동무하며 누리던 한강에서의 산책도 가을이 가버리면 누릴 수 있을까요?
여름내 공짜로 즐겨 듣던 잠원부라더스는 눈이 내리는 겨울밤에도 최성수의 '동행'을 불러 줄까요. 가을이 가면, 훌훌 불어마시던 뜨거운 커피처럼 쓰디쓴 내 중년의 고단한 나날과 고별식을 치루고 말게요. '강 건너 등불'을 불러보던 내 젊음도, 'Love is a many splendorthing' 을 부르며 느티나무 서 있던 언덕을 향해 달려가던 제니퍼 죤스도 어디 갔나요?
강을 보세요. 그간 수초가 자라고 구비치는 자리마다 밀려온 흙더미가 강안선(江岸線)을 새롭게 그리며 외딴 섬도 하나 생겼답니다. 말없이 흘러가는 강물이 만들어내는 창조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색등이 화려하게 불을 켠 유람선이 지나가고 나면 잔잔하던 강물이 새로이 힘을 받아 파도를 일으키며 와~ 하고 달음질쳐 옵니다. 수초가 무성한 강안 옹벽에 제 몸을 부딪치고는 산산이 부서지는 허무한 일상이...
은가루를 뿌려 놓은 오늘밤은 무도회도 무척 화려한 가 봅니다.
그대는 누구의 손을 잡을 건가요. 곧 나타샤 월츠가 시작될 거고 하얀 야회복으로 치장한 선녀들이 그대에게 손을 내밀텐데 그대가 잡아야할 손은.....
달이 기울면 화려한 무도회도 끝나겠지요. 밤은 모든 것을 혼돈상태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더욱 또렷이 살아오는 그리움, 간절함이 살아나요.
내 한가로운 밤의 산책은 성모동산에서 촛불을 올리면서 끝나는 거랍니다.
내 삶이 애닳다 하더라도 성모님 품에 안긴 예수 아기님 앞에 서면 내 설움도, 못내 신산하게만 느껴지던 내 중년의 삶도 나몰라 하고 그저 무릎을 꿇을뿐입니다.
'주님, 항복합니다'
어쩌겠어요. 색색이 일렁이며 타오르는 컾초마다 누군가 사람의 고단함과 애절한 소망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수능을 앞둔 우리 아이가, 쇄약해 가는 친정 엄마를, 실직한 채로 어딘가로 버릇처럼 출근하는 직장을 잃은 가장의 고단한 어깨가 탄식처럼 타고만 있는데 차마 내 애닳은 사연일랑 차마 말씀드리지 못하고 돌아섭니다.
가끔씩은 술취한 아저씨들이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와서 일렁이는 촛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돌아가는데 이따금은 왈칵하고 울음을 터트리다가 황망하게 돌아가는 분도 있다니 성모동산은 누군가를 가리지 않는 기도처인가 봐요. 아니 탄식처라 할까요. "성모님, 저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저의 마음을 이 초에 담아 바칩니다./ 저와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무더웠던 여름을 보내고 마지한 가을이 살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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