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고향에서 젠틀맨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외모로 고향에서 최고의 미남이셨다는 말이다.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김진규와 나중엔 신성일과 비교를 해도 오히려 우리 아버지를 추켜세웠을 정도로 아버지의 외모는 뛰어났다. 우리 6남매도 꽤 괜찮은 편이었는데 하필 6남매 맏이인 나는 주어온 자식인가 할 정도로 인물이 빠졌다. 어머니는 외탁해서 그렇다고 나한테 무척 미안해 하셨다.
무슨 외모를 가지고 시작한 글이 마음에 차질 않으신다면 다음 대목까지 읽어주신다면 이해가 될 것이라.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예의범절에는 엄격하셨다. 어른한테 인사를 정중하게, 안부를 여쭙는 말은 어떤 것을 사용해야 하는가? 일일이 짚어주셨다.
제가 중학생일 때 안경을 쓰게 되었다. 당시에 안경을 쓰는 사람이 드물었다. 학교에서 안경을 쓴 친구들은 반에 한두 명에 불과했다. 안경을 쓰게 된 제게 주신 말씀은 어른을 뵈올 때 안경을 벗고 인사드리라고 하셨다. 이유가 석연치 않았다.
내 짐작에 이러하지 않았을까? 당시 어른들이 쓰는 안경은 대개 돗보기였다. 사람들의 시력을 해치는 티브이가 나오지도 않던 시절이라 다들 시력은 좋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연 돗보기를 쓰게 되었다. 즉 안경은 어른들의 전유물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어른 앞에서 새파랗게 어린 아이가 안경을 쓰는 건 경우가 아니라고 하셨다. 글쎄 옳은 말씀인가 황당했지만 아버지 앞에선 조심했다. 요즈음에야 흐지부지 됐지만 젊은이들이 안경을 쓸 경우엔 어른 앞에 나아갈 때 자신의 안경을 벗고 인사를 드리는 게 올바른 예의범절이라고 타이르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또 하나. 설날에 세배드릴 때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루에서 안방에 계신 할머니와 부모님께 절하라고 가르치셨다. 물론 다른 어른들이 오시면 방안에서 세배 드리고 꿇어앉아서 어르신의 새해 덕담과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훈시를 내리셨다. 쉽게 말하면 친가 직계 부모님한테는 마루에서 세배를 하는 것이 예의라는 뜻이다. 그나마 세월이 흘러서 덕담을 듣고 난 뒤에 무릎 꿇은 걸 편한 자세로 앉아도 눈치껏 양해하셨다. 요즈음 무릎 꿇은 자세로 어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그런데 이해 못할 것은 설날 친척집을 찾아서 세배를 드려야 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이건 고역이었다. 특히 저의 집 같이 시내에 사는 경우에는 먼저 시내에 사는 친척들이 저의 집에 모여서 차례를 드리고 우리 집안 어른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인 시골로 가게 된다. 고향 집안을 찾아 세배 드리고 떡국에 식혜를 먹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떡국과 식혜를 싫어한 것은 아니지만 종일 세배꾼들한테 내놓는 게 바로 떡국에 식혜였다. 한두 집이지 스무 곳도 넘는 집 식혜를 먹어보라지.
또 시골 친척집에 가는 것을 싫어한 이유는 시골 친척집에 세배 가봐야 세뱃돈이 나올만한 곳이 있을까? 세뱃돈은 뭐니뭐니해도 시내에 사는 친척집에 세배를 가면 세뱃돈이 쏠쏠하게 나왔다. 한 해 딱 한 번인 세뱃돈이 두둑하게 나오는 금광을 두고 시골 폐광에 가봐야 빠닥빠닥 천 원짜리 지폐는커녕 10원 짜리 동전도 귀했다. 이런 이기적인 생각은 나이가 들고 안 들고 똑 같은 심정이 아닐까?
더욱이 속상한 것은 꼭 맏이라고 나만 데리고 가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었다. 기차(장남을 뺀 자식들. 차남 삼남 등)라고 했다. 장남을 빼고 둘째 셋째 아우들은 그냥 집에 두고 맏이만 데리고 가는 탓에 아우보다 내 세뱃돈 수입이 적으니 새해 첫날부터 내 입이 나올밖에. 생각해 보라고. 시내에서 고모님이라든가 재종숙부님 댁에 들려 세뱃돈을 두둑하게 받은 아우들은 싱글벙글 표정이 좋았는데 시골 친척집을 순례한 나는 입이 당나발처럼 부어있었다. 말도 말아. 아버지와 친척 집을 순례하는 길은 초하루에서 다음 날까지 이틀이나 걸리거든. 물론 큰집에서 일박하고. 초사흗날부터 시내 친척집으로 세배 순례를 해봤자. 설날 당일을 지나면 세뱃돈은 흐지부지가 되고말고.
그런데, 그런데 이해 못할 것은 세배드릴 때 할머니와 아주머니한테는 세배를 하지 못하게 하셨다. 철없는 나이에 세배객들한테 떡국이라든가 식혜를 준비하는 할머니와 아주머니한테 번거롭다고 면제해 주는 줄 알았다. 철이 들어 알게 된 것은 남존여비 사상이 깔려 있는 풍습이지 싶다. 요즈음 이런 풍습을 고집한다면 난리가 날 건데. 그때는 그랬다. 물론 친할머니라든가 종숙모 같이 아주 촌수가 아주 가까운 할머니와 아주머니한테는 세배를 드려야 했다. 쉽게 말하면 여자는 그만큼 대접 못 받던 시절이었다.
시골풍습, 아무리 조상 고유로부터 이어져 온 아름다운 풍습이라 해도 아닌 건 아니지 않을까? 친척집을 다니며 살림살이를 눈대중이라도 훑어보며 어른들 안부를 여쭙고 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할 미풍양습이라고 하지만 여자라고 세배를 받지 못하는 풍습은 버려야할 악습이 아닌가? 하긴 우리 고향이 보통 시골과 달라도 아주 많이 달랐다. 지금 고속도로를 나와 고향 입구에 떡하니 세워 놓은 프랑카드는 “우리나라의 정신적 수도” 라고 쓰여 있다. 어른들은 입버릇처럼 “추로지향”이라고 했다. 즉 공자님 사시던 중국의 “노나라”를 지칭하여 한국의 공자님이 사시는 선비, 양반들이 사는 예절의 고향이라는 말이다.
우리 고향 어른들 아니 내 또래 친구들도 어릴 때부터 양반타령을 하고 컸으니 오죽했을까.
우리 아버지도 예의범절에 대해 엄격하셨다. 어쩌면 어려서 할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품에서 자랐으니 더 했지 싶다. 당시 홀어머니 밑에서 크면 예의도 모르고 본 데 없이 자랐다고 흉을 받기 십상이었다. 엄부,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예의범절이 있다고 해서 홀어머니한테서 자란 아버지는 더욱 엄격하셨던 것 같다.
집에 손님이 오시면 꼭 두루마리를 입고서 맞으셨다. 손님이 돌아가실 때면 편하게 벗어두었던 두루마리를 새로이 입으시고 대문 밖까지 나가서 배웅하시곤 하셨다.
그리곤 문중, 종친회라고 하지. 문중 회장을 오래도 하셨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시내에 있는 안동 김, 권, 장 태사묘에 절하러 가셨다. 서울에 출장을 가실 때는 장가도 안 간 미성년인 내가 유건과 학사의를 갖추어 새벽에 태사묘에서 차례를 올렸다.
당시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성인 남자들은 외출할 때는 꼭 정장을 갖추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나들이 갈 때에도 양복정장을 갖춘 사진을 보면 끔찍했다. 요즈음 직장에 출근할 때에도 캐주얼 복장을 하지 않은가. 심지어 국회의원들도 넥타이를 매지 않더구먼. 세월에 따라 예의범절도 바뀌어가는 걸 어쩌랴.
내가 장가를 들 때 이야기다. 재주 없었던 내게 집안 어른들이 중매를 하려고 오면 처음 묻는 말씀은 처녀 집안에 대해 묻는 것이 바로 "본관이 어디냐고?" 김해 0씨인지 교하0씨인가? 집안이 양반인지 궁금해 하셨다. 유명짜한 양반가가 아니면 심드렁하셨다. 오죽하면 내 사위를 볼 때도 며느리 깜을 볼 때에도 본관이 어딘고? 하셨다.
지금 세대에는 학교는 어디 나오고 직장은? 하지만 속내는 은근하게 부자집인가? 를 점잖게 은유적으로 떠보지 않던가? 사실 사돈네 살림살이에 관심이 제일 많았을거다. 선비가 어떻게 재물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가 말이다.
당시에는 물건을 살 때는 따라나선 나한테 돈을 주라고 하셨다. 양반이, 점잖은 체면에 어떻게 돈을 만지느냐? 허세에 불과했지만 돈을 천시여겼던 풍조가 있었다.
내 아들이 나이가 들자 이웃들이 선보라고 이웃들이 넌지시 여자 신상명세를 들여다 밀면 아들은 딱 잘라 "예쁜가?" 를 노골적으로 물어보더라고. 본데 없는 쌍놈자식처럼.
세상에 여자가 이쁜가 안 이쁜가를 대놓고 물어보는 통에 중매는 허사가되고 혼인자리를 가지고 온 이웃들한테 면목이 없더라고. 세상이 어쩔려고 ......남자치고 예쁜 여자 좋아하지 않는 사람 있던가? 그런데 말이다. 어떻게 첫 마디가 예쁘냐고 묻는 녀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렵소, 아들 말이 다들 그렇다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막장까지 되어뿌렸소.
우리 때는 그랬다. 이것 저것 물어보면서도 심중에 꾹 눌러놓은 궁금한 건 여자가 예쁜가였다. 중매장이가 처녀가 여간 이쁜 게 아니라고 너스래를 떨어도 "어디요, 사람됨됨이가 중요하지요" 하고 점잖을 떨었던 기억이 새롭다.
허례허식이라고 우습게 여겼던 아버지 세대가 가지셨던 염치와 비록 허울에 그친 거지만 여자가 예쁜 거보다 우선 사람됨됨이가 우선이지요. 하시던 아버지 말씀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