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E. H. 카, 권오석 옮김, 홍신문화사, 1988.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으면서, ‘역사는 결국 승자의 기록일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겨볼 수 있었다. 이 책의 초판은 1961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펼친 6번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원고를 엮었으며, 저자의 사후인 1987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의 의미를 진지하게 제기하면서, 역사가의 관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결국 역사기록이란 역사가에 의해 선택된 사실로 구성되기에, 그 과정에서 승리한 이들의 입장이 반영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기에 역사가의 역할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것을 역설한 주장으로 이해된다.
저자는 먼저 ‘역사가와 사실’이라는 제목의 1장에서, ‘완전한 역사의 서술’이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에 회의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다. ‘역사란 확인된 사실의 집성으로 이루어진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역사가는 사실을 얻어 집에 가지고 가서 조리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식탁에 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강조한다.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역사가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하게 되며, ‘역사적 사실의 지위는 해석의 문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역사가의 주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하는 일’이기에, 동일한 사건일지라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이 항목의 말미에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대화’라는 최초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2장의 제목은 ‘사회와 개인’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내용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과정은 추상적이고 고립된 개인과 개인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 사이의 대화’라는 관점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역사 기술이 위인 중심으로 기록되는 것은 불가피할지라도, ‘위인이란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면서 대행자이고, 동시에 세계의 양상과 인간의 사상을 바꾸는 사회의 여러 힘의 대표자이며 창조자인 뛰어난 개인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이러한 견해는 특정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이른바 ‘위인’이리고 칭해지는 인물들도 결국 그 사회의 전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돌출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물론 그러한 인물들이 당대의 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면서 역사에 명암(明暗)을 드리울 수도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역사와 과학과 도덕’이라는 제목의 3장에서는 다른 학문 분야인 과학과 도덕이 역사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설파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4장에서는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의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아울러 ‘진보로서의 역사’라는 제목의 5장에서, 저자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는 역사 그 자체에서 방향감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 사회관을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관점은 자연스럽게 마지막 6장의 ‘넓어지는 지평선’이라는 주제로 자신의 낙관주의적 관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저자가 자신의 논거를 펼치기 위해 인용한 내용들이 기존의 서구 역사를 다루는 문헌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어, 세세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역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조언을 던지고, 또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나름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역사란 단순한 사건의 연대기의 종합이 아니라, 역사가의 임무가 특정 사건의 의미를 인지하고 그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따라서 절대적이고 완전한 역사라는 것에 의문을 던지면서,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역사는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하겠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