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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중세의 정치
Ⅰ. 중세의 세계
동양의 중세
가. 5대 10국
⑴ 당(618~907) 멸망
⑵ 5대 10국
구분 | 왕조 | 존속기간 | 건국자-실국자 | 수도 | |
오대십국 (五代十國) | 오대(五代) | 後粱(후량)(3대) | 907년 ~ 923년 | 朱全忠(주전총) | 開封→洛陽 |
後唐(후당)(4대) | 923년 ~ 936년 | 李存勖(이존욱) | 洛陽 | ||
後晋(후진)(2대) | 936년 ~ 946년 | 石敬塘(석경당) | 開封(汴州) | ||
後漢(후한)(2대) | 947년 ~ 950년 | 劉知遠(유지원) | 開封(汴州 | ||
後周(후주)(3대) | 951년 ~ 960년 | 郭威(곽위) | 開封(汴州 | ||
십국(十國) | 吳(오)(4대) | 902년 ~ 937년 | 楊行密(양행밀) | 揚州 | |
前蜀(전촉)(2대) | 907년 ~ 925년 | 王建(왕건) | 城都(성도) | ||
楚(초)(6대) | 907년 ~ 951년 | 馬殷(마은) | 荊州(형주) | ||
吳越(오월)(5대) | 907년 ~ 978년 | 錢鏐(전류) | 杭州(항주) | ||
閩(민)(8대) | 909년 ~ 946년 | 王審知(왕심지) | 福州(복주) | ||
南漢(남한)(4대) | 917년 ~ 971년 | 劉隱(유은) | 廣東(광동) | ||
荊南(형남.南平)(5대) | 924년 ~ 963년 | 高季興(고계흥) | 江陵(강릉) | ||
後蜀(후촉)(2대) | 934년 ~ 965년 | 孟知祥(맹지상) | 城都(성도) | ||
南唐(남당)(3대) | 937년 ~ 975년 | 李昪(이변) | 金陵(금릉) | ||
北漢(북한)(4대) | 951년 ~ 979년 | 劉崇(兪崇) | 晉陽(진양) |
나. 송(宋)
2. 서양의 중세
가. 봉건제도와 장원제
나. 기독교 세계관
Ⅱ. 중세 사회의 성립
1. 고려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
가. 고려 건국
후고구려(後高句麗, 904년 마진(摩震), 911년 태봉(泰封)으로 개칭)를 세운 궁예는 점차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아들은 보살(菩薩)이라 하면서 폭군행세를 하다가 신라 54대 경명왕 2년 918년 신숭겸, 홍유, 복지겸, 배현경 등의 추대를 받아 시중(侍中) 왕건(王建)이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했다. 다음해인 919년 왕건은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松岳)으로 옮겼다.
고려 왕건은 지방 호족 세력에 대한 우대정책을 쓰고 신라에 대해 우호적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926년 거란(契丹, 916~1125)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 유민들을 받아 들이고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에게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주고 종적에 편입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나. 후백제와 신라
후백제는 왕위 계승을 두고 분열했다. 935년 견훤(甄萱)은 4자인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장남 신검(神劍)은 동생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김제 금산사에 가두자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하여 왕건의 상보(尙父)가 되고 양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신라의 마지막왕 56대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는 경순왕 9년 태조 18년 935년 고려에 귀부(歸附)하고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이 되었고 다음해인 936년 신검의 후백제와의 선산(일리천, 一利川) 전투에서 승리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태조 10년 927년 공산(대구팔공산) 전투에서 신숭겸, 김락 전사
태조 13년 930년 고창(안동)전투에서 후백제군 격파(차전놀이 유래)
태조 14년 934년 운주(홍성)전투에서 후배제군 격파
태조 18년 후백제 견훤 귀순, 신라 경순왕 귀부로 신라멸망
태조 19년 선산(일리천, 一利川) 전투에서 승리하여 후백제 멸망으로 후삼국 통일
다. 왕건의 후삼국통일 요인
⑴ 고대적 수취체제의 모순시정
⑵ 새로운 사회상 제시
2. 태조(918~943)의 정책
가. 기본 방향
고려 태조는 신라와는 다른 능력본위의 개방적 정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나. 호족 회유 통제정책 실시
⑴ 회유책 : 정주 류씨(貞州 柳씨), 평산 유씨・박씨(平山 庾氏・朴氏), 광주 왕씨(廣州 王氏) 등 전국 20여 호족들에게 고위관직 부여, 정략결혼 및 사성정책(賜姓政策)을 통해 회유하고자 하였다.
⑵ 견제책 :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기인제도(其人制度)와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를 실시했다. 기인은 지방향리의 자제를 기인으로 임명하여 중앙에 불러 들여 지방일에 자문하는 제도이며 조선 광해군무렵(1609년)에 폐지되었다. 사심관은 개국공신과 중앙의 고위귀족을 출신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하는 제도로 사심관은 부호장 이하 향리임명권을 가지고 지방치안의 연대책임 의무를 졌다. 최초의 사심관은 김부(경순왕)였으며 충숙왕때(1318년) 폐지되었다.
다. 정치제도 정비
태봉의 중앙관제를 중심으로 정치제도를 정비했다.
라. 규범 제시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僚書) 8권을 지어 관리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다.
마. 훈요십조(訓要十條)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을 제시하고 연등회(순수 불교행사)와 팔관회(전통 민간 신앙과 불교의 결합) 등 불교 숭상, 풍수지리, 왕위 계승, 서경 경영(分司制度 실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훈요10조(訓要十條)
1.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 쟁탈을 금지할것
2.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3. 서열에 관계 없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잇게할 것
4. 중국 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의 풍습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5. 서경에 100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것
6. 연등회와 팔관회의 행사를 증감하지 말고 원래 취지대로 유지할 것
7. 상벌을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에 귀를 기울려 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8. 차령산맥 이남이나 공주강 외곽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9. 백관의 녹봉을 증감하지 말고 병졸의 사기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10.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바. 북진정책
고구려 고토회복을 주장하면서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서경을 경영하고 청천강~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했다.
사. 취민유도(取民有道)
피폐해진 농민생활을 안정하기 위하여 조세 세율을 1/10로 낮추었다.
아. 흑창(黑倉)
궁민(窮民)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기에 상환하도록 하는 진대기관으로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과 유사한 제도였다. 태조 1년 918년 8월 흑창 안에 호랑이가 들어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태조 즉위 후 곧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성종 5년 986년 그 기금을 미(米) 1만석으로 증가시키는 한편 명칭도 의창(義倉)으로 바뀌었다.
자. 역분전(役分田) 지급 : 태조 23년 940년에 고려 통일에 기여한 공훈에 따라 지급한 토지
사심관(事審官)과 기인제도(其人制度)
태조 18년(935)에 신라왕 김부(金傅)가 항복하였다. 신라국을 없애고 김부로 하여금 부호장 이하 관직자들의 일을 살피도록 하였다. 여러 공신에게도 이를 본받아 각각 출신 고을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국초에 향리의 자제를 뽑아 서울에서 인질로 삼고 그 고을 일을 자문하게 하였다. 이를 기인(其人)이라 하였다.
혜종(943~945) : 왕규(王規)의 난
정종(945~949)
가. 외척 왕규(王規)의 난을 왕식렴(王式廉)의 군사력으로 진압
나. 광군사 설치 : 거란 침입 대비
다. 서경 천도 계획
3. 광종(949~975)의 개혁정치
가. 주현공부법(州縣貢賦法, 949년) : 국가수입 증대 목적으로 왕 원년 949년 원보 식회, 원윤 신강 등에 명하여 주와 현이 해마다 바칠 공물수량을 정하게 하는 법
나. 호족세력 억압
초기에는 온건한 방법으로 호족 세력을 예우하다가 어느 정도 왕권이 안정되자 서서히 호족세력 억압을 시도했다.
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광종 7년 956년)
라. 과거제도(科擧制度, 광종 9년 958년) : 후주의 쌍기(雙冀)의 건의
마. 공복제정(公服制定, 광종 11년 960년): 자단비록(紫丹緋綠)
바. 칭제건원(稱帝建元, 광종 11년 960년), 연호(光德, 峻豊), 개경 : 皇都, 서경 : 西都
사. 호족세력 숙청( 광종 11년 960년) : 대상 준홍, 좌상 왕동 유배보내고 혜종 아들 홍화군, 정종 아들 경춘원군 죽이고 박수경 일가 숙청
아. 송(宋)과 수교
자. 불교장려 : 국사, 왕사제도
차. 제위보(濟危寶) 설치
경종(975~981)
1. 공신계열의 보복 정치 및 개국공신의 중앙귀족체제내로의 재편.
2. 976년 시정 전시과 실시
4. 유교적 정치 질서의 강화
가. 성종(981~997)
⑴ 유교의 정치이념화 : 성종 6년 987년 연등회 팔관회의 일시 중단
⑵ 성종 1년 982년 최승로의 시무책 채택
① 오조정적평(午朝政跡評) :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에 이르는 5명의 국왕의 치세를 평가한 것
②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 : 불교는 수신(修身)의 도리이고..유교는 치국(治國)의 도리
⑶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 :신분제 확립
⑷ 성종 2년 983년 중앙관제 및 지방제도 정비 : 3성6부제와 12목에 최초 지방관 파견 및 향리제 마련으로 지방호족의 지위 격하
⑸ 성종 11년 992년 국자감(國子監), 수서원(서경), 비서성(개경) 설치
⑹ 성종 12년 993년 거란 차 침입 격퇴
⑺ 성종 14년 995년 문신월과법(文臣月課法)
⑻ 성종 15년 996년 건원증보(乾元重寶, 최초의 철전) 발행
⑼ 의창, 상평창제의 실시
⑽ 서경의 분사제도(分司制度) 실시
나. 현종(1009~1031)
⑴ 지방제도 정비
⑵ 주창수렴법 : 의창제도 확대.
⑶ 면군급고법(免軍給告法) : 70세 이상 노부모를 모신 정남의 군역을 면제
⑷ 주현공거법 : 향리 자제의 과거응시 허용
⑸ 거란군 격퇴 위한 대장경 조판 및 7대실록 편찬
⑺ 김훈・최질의 난
다. 문종(1046~1083)
⑴ 중죄인에 대한 삼심제(三審制) 실시
⑵ 경정전시과 -공음전 지급
⑶ 동서대비원 설치
Ⅲ. 통치 체제의 정비
1. 중앙정치 조직
가. 중국제도의 영향
국초에는 태봉과 신라의 관제를 병용했으나 성종때 당나라의 3성6부제를 모방하여 2성6부제로 운영했다. 송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중추원과 삼사가 설치되었다.
⑴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宰府. 장관 문하시중)
최고의정기관으로 국가정책결정하고 정책 건의 잘못을 간하는 기구로서 2품이상의 재신(宰臣)과 3품이하의 낭사(郎舍)로 구성된다.
⑵ 상서성(尙書省, 장관: 상서령)
중서문하성에서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기관으로 6부(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를 통솔했다.
⑶ 중추원(中樞院, 樞府)
왕명출납과 군사기밀(樞府)으로 1095년 추밀원으로 바뀌었다.
⑷ 삼사(三司) : 화폐와 곡식(錢穀) 출납 회계
나. 고려의 독자적 제도
⑴ 도병마사(都兵馬使)
중서문하성의 고관(재신)과 중추원의 고관(추신)으로 구성되며 대외적인 국방, 군사문제를 관장했고 고려 후기에는 중서문하성을 대신해 모든 정부를 관장했으며 충렬왕 5년 도평의사사가 되었다.
⑵ 식목도감(式目都監)
대내적인 법제, 격식문제를 관장했다.
다. 어사대(御史臺) 운영
관리의 비리를 규찰하는 감찰기관으로 중서문하성의 낭사(郎舍)와 함께 대간(臺諫, 臺省)을 이루었다(통일신라 사정부, 발해 중정대, 조선 사헌부).
재추회의(都堂) | 중서문하성(宰府, 재부) | ||
상서성 | 이부 | ||
호부 | |||
예부 | |||
병부 | |||
형부 | |||
공부 | |||
재추회의 | 중추원(樞府, 추부) | ||
어사대 | |||
삼사 |
중서문하성(宰府, 재부)+중추원(樞府, 추부)=양부(兩府), 재추(宰樞). 그 회의체를 재추회의(宰樞會議. 都堂)
어사대+중서문하성의 낭사=대간(臺諫, 臺省) : 서경(署經)
2.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가. 행정체계
⑴ 5도(五道) 양계(兩界) 경기(京畿)
① 12목(牧) 설치 : 6대 성종 2년 983년 12목(十二牧. 전라도 : 나주목, 승주목, 전주목. 경상도 : 진주목, 상주목. 양광도 : 청주목, 충주목, 공주목, 광주목, 양주목. 황해도 : 황주목, 해주목) 설치하고 중앙관을 파견하였다.
② 5도 양계의 설치 : 8대 현종 9년 1018년 도와 계를 설치하여 후에 5도(전라도, 경상도, 교주도, 양광도, 서해도. 안찰사[按察使])와 양계(동계, 북계[서계], 병마사[兵馬使])로 정착되었다. 경기는 개성부에서 관할하였다.
⑵ 3경제(三京制)
처음 개경(開京), 서경(西京. 평양), 동경(東京. 경주)→뒤에 개경(開京), 서경(西京. 평양), 남경(南京. 서울)
⑶ 5도호부(五都護府. 안남, 안동, 안변, 안서, 안북→후에 안변, 안서, 안북 3도호부)와 8목(八牧. 현종. 전라도 : 나주목, 전주목. 경상도 : 진주목, 상주목. 양광도 : 청주목, 충주목, 광주목 황해도 : 해주목). 군(郡), 현(縣), 진(鎭) 등
⑷ 향(鄕)・소(所)・부곡(部曲)
특수행정구역으로 향(鄕)・부곡(部曲)은 신라시대부터 존재하는 농업지역이고 소(所)는 고려시대에 생겨난 수공업생산지역이었다.
나. 고려 지방행정의 성격
⑴ 2원화 방식
지방지배방식이 일원화되지 못해 민정중심지역(5도와 목)과 군정주요심지역(양계, 도호부딘)으로 되어 있었다.
⑵ 중앙권력의 미흡
중앙권력이 지방에 강력하게 침투하지 못하고 처음 관리가 파견되지 않은 지역(속군(屬郡)과 속현(屬縣))이 관리가 파견되는 지역(주준(主郡)과 주현(主縣)보다 더 많았고 속군, 속현은 주군, 주현의 통제를 받았으며 후기에 갈수록 주현화 되어 소명되고 행정은 주로 향리(鄕吏)가 담당하였다. 향리는 9단계(1. 후단사 2. 법사・창사 3. 주・부・군・현의 사 4. 부병정・부창정 5. 부호정 6. 호정 7. 법정・창정 8. 부호장 9. 호장)로 호장(戶長)이하의 장리(長吏)가 있었다.
고려시대의 향리는 과거에 응시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향리는 지방 지배자적 지위를 상실하고 관아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중간계층으로 전락했다.
3. 군역제도와 군사제도
가. 중앙군
2군・6위가 있었고 2군은 6위보다 약간 늦게 생겼으나 국왕의 친위군으로서 6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2군・6위에는 정・부 지휘관으로서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이 있었고 회의기관인 중방(重房)이 있었다.
2군・6위는 모구 10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영(領)으로 구성되었고 영은 병종에 의하여 보승(保勝)・정용(精勇)・역령(役領)・상령(尙領)・해령(海領)・감문위령(監門衛領) 등으로 구분되어 총 45령이 있었다. 영의 지휘관은 장군으로 회의기관인 장군방(將軍房)을 갖고 있었다.
2군・6위는 신분과 군역의무를 세습하는 군반씨족(軍班氏族) 출신의 전문군인으로서 군호(軍戶)를 형성하고 군적에 따로 올라갔다. 이들에게는 군인전(軍人田)이 지급되고 2인의 양호(養戶)가 경작하여 군인의 장비와 생활비를 제공케 하였다.
2군(二軍) | 응양군(鷹揚軍) | 국왕의 친위군 |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 -장군(1000명으로 조직된 령(領)의 지휘관) 領 : 보승(保勝).정용(精勇). 역령(役領). 상령(常領). 해령(海領). 감문위령(監門衛領) 등 45령 |
용호군(龍虎軍) | |||
6위(六衛) | 좌우위(左右衛) | 수도 개경 수비와 변방 방수(防戍) | |
신호위(神虎衛) | |||
흥위위(興威衛) | |||
금오위(金吾衛) | 경찰(警察) | ||
천우위(天牛衛) | 의장(儀仗) | ||
감문위(監門衛) | 궁문숙위(宮門宿衛) |
나. 지방군
자방에는 처음에는 정종 2년 947년 광군(光軍)이 조직되었으나 뒤에 주현군(州縣軍)으로 개편되었고 주현군은 도와 계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계의 행정단위인 진(鎭)마다 초군(抄軍)・좌군(左軍)・우군(右軍)을 중심으로 하는 정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주진군은 평상시에는 동사를 짓다가 유사시에는 언제나 싸울 수 있는 둔전병적(屯田兵的) 상비군(常備軍)이었다. 도의 주현군은 보승(保勝. 치안과 방수)・정용(精勇. 치안과 방수)・일품(一品, 노동부대로서 공역에 동원)으로 구성되었다.
광군(光軍, 정종 2년 947)→주현군(州縣軍) | 도(道) | 초군(抄軍) |
좌군(左軍) | ||
우군(右軍) | ||
계(界)(주진군州鎭軍) | 보승(保勝. 치안과 방수) | |
정용(精勇. 치안과 방수) | ||
일품(一品, 노동부대로서 공역에 동원) |
4. 관리 등용제도 : 과거(科擧)와 음서(蔭敍)
가. 과거제도(科擧制度)
⑴ 과거제도의 도입
과거제도(科擧制度)는 광종 9년 958년 후주의 쌍기(雙冀)의 건의로 시행되었으며 무과(武科)는 공양왕 2년 1390년에 생겼다.
⑵ 과거제도
문과(文科) -문관 | 제술업(製述業) | 시(詩), 부(賦), 송(頌), 책(策), 논(論) 등으로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으로 시험. 갑・을2과. 명경과보다 중시. 6000명. 1등 장원(壯元), 2등 방안(榜眼)/아원(亞元), 3등 탐화(探花) |
명경업(明經業) | 서(書), 역(易), 시(詩), 춘추(春秋) 등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을 시험. 갑・을・병・정 4과, 450명 | |
무과(武科)-무신 | 공양양 2년 1390년 설치. 예종 11년 1116년~인종 11년 11333년까지 시행 | |
잡업(雜業) -기술관 | 명법업(明法業) | 율학. 1127년(인종 5) |
명산업(名算業) | 산학. 1127년(인종 5) | |
명서업(明書業) | 서학. 1127년(인종 5) | |
의업(醫業) | 의학. 958년 | |
복업(卜業) | 복정(卜正)・일관(日官)등의 천문을 담당하는 관직.958년 | |
주금업(呪噤業,) | 향학, 의학보조업 | |
지리업(地理業) | 1127년(인종 5) | |
기타 | 삼례업(三禮業)・삼전업(三傳業)・하론업(何論業, 논어관련)・정요업(政要業) | |
승과(僧科) -승려 | 교종선(敎宗選) | 전등록(傳燈錄), 점송(拈頌) 大德(대덕)→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수좌(首座)→승통(僧統) |
선종선(禪宗選) | 화엄경(華嚴經), 십지론(十地論), 大德(대덕)→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 |
⑶ 응시자격
양인(良人)은 누구라도 과거에 수험자격이 있었으나 천민(賤民)과 승려(僧侶)의 자식은 응시할 수 없었다. 과거 시험관을 지공거(知貢擧)라고 했고 지공거와 급제자(及第者)는 좌주(座主. 宗伯)와 문생(門生)의 관계를 맺어 일생동안 계속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한 개의 사회집단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나. 음서제도(蔭敍制度)
고려시대에는 문벌귀족은 음서제도(蔭敍制度)라는 것이 있었다. 음서는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관직을 허락하여 주는 문음(門蔭)과 특별한 공훈이 있는 관리의 자손에게 관직을 허락하여 주는 공음(功蔭)이 있었는데 이것은 고려의 관료제도가 귀족제도에 뒷받침되는 것을 의미한다.
Ⅳ.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1.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가. 문벌귀족의 형성
⑴ 문벌귀족의 출신 성향
신라 6두품 계통의 귀족들은 고려의 사회와 정치 질서를 개편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여 지위를 굳게 하였고 개경에 가까운 지방호족 출신자들도 점차 문신으로서 중앙의 정치무대에 진출하는 수가 늘어 고려는 이성귀족(異姓貴族)에 의한 정치를 하였다
⑵ 본관(本貫) 사용과 별도 호적 작성
이성귀족들은 개성이나 출신지를 본관(本貫, 貫鄕)으로 삼고 문벌을 중시하며 평민과는 별도의 호적(戶籍)을 작성하였다.
⑶ 혼인정책
가문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왕실 또는 격이 높은 가문과 혼인정책을 사용하였다.
⑷ 대표적인 문벌 귀족
안산 김씨(安山 金氏. 金殷傅), 인주 이씨(仁州 李氏. 李子淵과 李資謙), 파평 윤씨(坡平 윤씨. 尹瓘), 해주 최씨(海州 崔氏. 崔沖), 경주 김씨(慶州 金氏. 金富軾) 등이 대표적인 문벌 귀족이었으며 11대 문종때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안산 김씨 김은부(金殷傅)는 세딸을 8대 현종의 비로 들인 이루 11대 문종때까지 4대 50년간 외척으로서 정권을 독점하였고 인주 이씨 이자연(李子淵)은 세딸이 문종의 비로 들어간 후부터 안산 김씨를 대신하여 인종때까지 7대 80년간 인주이씨 세상이었고 나중에 이자겸(李資謙)은 왕이 되려고 하였다
나. 문벌귀족의 특권
문벌귀족은 음서를 통해 관직을 세습・독점하는 겅치적 특권과 공음전의 혜택을 받아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통해 불법적으로 토지를 착취(토지겸병)하는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2.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가. 이자겸(李資謙)의 난(1126)
인주(경원) 이씨는 이자연(李子淵)에서 이자겸(李資謙)에 이르기까지 약 80년간(문종~인종)때가지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자겸은 둘째 딸을 16대 예종(睿宗)의 비로 들여서 그 소생인 해(초명은 구(構)이고 해(楷)로 개명) 인종(仁宗)으로 왕위를 잇게 하고 다시 두딸 3녀와 4녀를 인종에게 주어 이중 인척관계를 맺어 권력을 독차지 하였다.
이자겸 일당은 한안인 등 반대파를 몰아내고 남의 토지와 재물을 강탈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재화를 획득하고 18자(十八子)가 왕이 되리라는 도참설(圖讖說)을 믿고 왕이 되려 하자 인종은 왕 4년 1126년 이자겸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여 인종은 행동의 자유를 잃고 최탁, 안보린 여러 신하도 해를 입었다. 이자겸은 인종을 시해하려다가 왕 5년 1127년 인종에 포섭당한 일파인 척준경(拓俊京), 김향(金珦), 이공수(李公壽), 정지상(鄭知常)등에 타도되어 쫓겨 귀양을 가게되어 인주 이씨가 몰락하였다.
이 난으로 문벌귀족사회의 해체가 촉진되고 궁궐이 불타고 민심이 불안하여 도참이 유행하고 서경천도론이 대두되었다.
나. 묘청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1135)
문벌귀족은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으로 분열 대립하였다. 그리고 금나라는 고려에 종종 압박을 가하여 고려는 외교적 시련에 직면하였다. 묘청(妙淸), 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 서경파・풍수지리설파・배욀파로 불리던 서경인들은 이자겸의 난 때 불타버린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묘청 등은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개경은 땅기운이 쇠하고 서경은 땅기운이 왕성하므로 서경으로 천도하면 국가를 중흥시킬 수 있고 칭제건원(稱帝建元)하여 송이나 금과 대등한 입장을 칭하고 금국을 정벌할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종도 처음에는 마음이 움직여 서경에 대화궁(大花宮)과 팔성당(八聖堂)을 짓고 호의적이었으나 개경파・유학파・사대파 귀족들이 반대를 하여 서경천도가 어렵자 묘청은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하여 인종 13년 1135년 서경에서 서경 분사시랑 조광(分司侍郞 趙匡), 분사병부상서 류참(分司兵部尙書 柳旵), 사재소경 조창언(司宰少卿 趙昌言), 안중영(安仲榮)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리고 하였으나 백수한, 정지상, 김안을 출병전에 참수하고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조광이 묘청, 류참과 그 아들 류호를 목베어 항복했다가 정부가 항복을 받아 들이자 않자 다시 싸우는 등 내분과 전략 실패로 1년만에 서경이 함락되고 난이 진압되었다.
이 난으로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이 극화되고 분사제도와 삼경제가 폐지되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의 분열과 지역 세력간의 대립이었고 자주적 전통 사상(풍수지리설 등)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과의 충돌 및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갈등(신라 계승 이념과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 1천년 내 제대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3. 무신 정권의 성립
가. 무신정변의 배경
⑴ 문치주의에 입각한 문신의 사회적 열세(문・무관 차별 대우)
고려는 문치주의를 취하여 무신은 정치적으로 문신보다 하위에 있고 승진에도 한계가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열세였다. 군사령관직도 무신 대신 문신(강감찬, 윤관, 김부식 등)이 맡았고 무신은 천대받고 문신에게 사역당하는존재였다.
⑵ 의종(毅宗)의 실정
태평호문(太平好文)의 왕 의종은 태평대・환희대・미성대 등을 짓고 환락을 즐겼고 호종하는 무신들은 호위병에 불과할 정도로 비참했다. 또 일찍이 정중부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에게 촛불로 수염을 태워졌고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은 문신 한뢰(韓賴)에게 뺨을 맞았다.
⑶ 군인들의 불평
전시과에 규정된 군인전도 지급받지 못하거나 관리들의 녹봉을 위하여 빼앗기기도 하였고 전쟁뿐만 아니라 평시에는 천역에도 동원되었다.
나. 의종 24년 1170년 국왕이 보현원에 갔을 때 호위하던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은 반란(무신정변, 경인의 난)을 일으켜 김돈중・한뢰 등 수많은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고 그 아우 익양공 명종(明)을 즉위시켰다.
⑷ 반무신의 난
명종 3년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간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 및 장순석(張純錫)과 의종을 복위하기 위해서 거사했으나 실패했고 명종 1년 1174년에는 서경 유수 병부상서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에 반항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나. 무인간 정권쟁탈
⑴ 무장
정권을 잡은 무인들은 고위직에서 하위직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독차지 하고 사유지를 확대하며 경제적 재부를 차지하고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재부를 바탕으로 무장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교체를 하였다.
⑵ 이고(李高)와 이의방(李義方) 제거
처음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가 공동 통치하다가 이의방이 이고를 죽이고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아 득세를 부리다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에 살해되었다.
⑶ 정중부와 경대승
이의방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정중부는 청년장군 경대승(慶大升)에 의해 살해되고 경대승은 신변안전을 위해서 100명으로 도방을 지키게 했으나 압박을 받아 발병하여 죽었다.
⑷ 이의민(李義旼)
경대승이 죽은 후 이의민이 경주에서 상격하여 정권을 독차지 하고 횡포를 부리다가 명종 26년 1196년 최충헌(崔忠獻)・최충수(崔忠粹) 형제에게 살해되었다.
다. 최충헌의 집권
최충헌은 조위총의 반란때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의민을 제거한 후 박진재(朴晋材), 아우 최충수를 제거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국왕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일생동안 두 왕 19대 명종과 21대 희종을 폐하고 20대 신종, 21대 희종, 22대 강종 및 23대 고종 4왕을 옹립하였다.
라. 최씨정권의 지배기구
⑴ 최충헌
최충헌이 정권을 잡은 후 무인정권은 정치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최충헌은 1206년 국왕으로부터 진주를 식읍과 더불어 진강후(晋康侯)라는 봉함을 받고 흥녕부(興寧府. 晋康府, 晋陽府)를 세웠다. 최충헌은 정권장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개혁책인 봉사10조를 제시했다. 최충헌 다음에 최우(崔瑀, 崔怡), 최항(崔沆), 최의(崔竩) 순으로 집권였다.
봉사10조
1. 새 궁궐로 옮길 것.
2. 관리의 수를 줄이고 녹봉을 적당히 할 것.
3.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빼앗은 토지는 돌려줄 것
4. 선량한 관리를 임명하고 세금을 적당히 할 것.
5. 공물 진상을 금하고 안찰사의 임무를 명확히 할 것.
6. 승려의 왕궁 출입과 고리대업을 금할 것
7. 탐관오리를 징벌하되 잘한 자는 상을 줄 것.
8. 관리의 사치를 금할 것.
9. 비보 사찰 이외에는 모두 없애고 함부로 절을 세우는 것을 금할 것.
10. 신하의 간언을 용납하고 바른말 하는 관리를 등용할 것
⑵ 통치기구
흥녕부(興寧府. 晋康府, 晋陽府) | 무신정권 중심기구, 진강후(晋康侯) |
교정도감(敎定都監) | 교정별감(敎定別監). 반대세력 수색 및 비위사실 감찰 |
정방(政房) | 정색승선(政色承宣). 최우때 설치한 동지작인 인사행동기구 |
서방(書房) | 문인들의 숙위기간 |
도방(都房) | 경대승이 만든 사병집단으로 최씨정권에서 확대 |
삼별초(三別抄) |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
무신정권(1170~1270)
시기 | 연대 | 인물 | 내용 | 중심기구 |
제1기(성립기, 1170~1196) | 1170~1179 | 이고(李高), 이의방(李義方), 정중부(鄭仲夫) | 이의방(李義方)이 1171년 이고(李高)를 죽이고, 이의방(李義方)은 1174년 정중부(鄭仲夫)의 아들 정균(鄭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에 살해됨 | 중방(重房) |
1179~1183 | 경대승(慶大升) | 김자격, 견룡(牽龍), 허승(許升), 김경린과 함께 정중부(鄭仲夫) 부자와 송유인(宋有仁) 참수. 병사 | 도방(都房) | |
1183~1196 | 이의민(李義旼) | 조위총(趙位寵)의 난(1174년) 때 공훈. 의종(毅宗) 살해. | 중방(重房) | |
제2기(확립기, 1196~1258) | 1196~1219 | 최충헌(崔忠獻) | 이의민(李義旼) 살해 봉사십조(奉事十條) | 교정도감(敎定都監. 1209~ |
1219~1249 | 최우(崔瑀)→최이(崔怡) | 1219년 추밀원부사로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 1225년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했고 도방을 확장. 몽골의 침공 소식에 1232년 강화천도(江華遷都). 1243년 국자감을 수축했으며 사재를 동원해 대장경판 재조를 완성. | ||
1249~1257 | 崔沆 | 전전긍지(殿前承旨) 이공주(李公柱), 최양백(崔良伯), 김준(金俊) 등의 가노(家奴)에게 관직을 별장(別將) 제수. 집권하자 김경손(金慶孫)장군, 지이부사 상장군(知吏部事上將軍) 주숙(周肅, 본면 周永賚), 최우(崔瑀)의 계실이었던 대씨부인 참살 | ||
(1257~1258 | 최의(崔竩) | 이공주 낭장(郎將) 임명 | ||
제3기(쇠퇴기, 1258~1270) | 1258~1268 | 류경(柳璥)과 김인준(金仁俊)→김준(金俊) | 김준(金俊, 가노출신 김윤성의 아들).고종45년 3월(1258년)에 동생 김승준, 아들 김대재(金大才, 최영백 사위)・김용재・김식재과 大司成 柳璥. 神義軍都領別將 朴希實. 樞密院使 崔昷, 이연소. 將軍 朴松庇.都領別將 林衍과 함께 崔竩 참수하고 崔良伯 제거.무오정변(戊午政變) | |
1268~1270 | 임연(林衍) | 원종이 임연(林衍), 강윤소(康允紹), 환관 최은(崔壄)・김경(金鏡)을 시켜 金俊 살해. 무진정변(戊辰政變). 원나라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하면서 대몽항쟁을 준비하다가 근심과 울분으로 사망 | ||
1270~1270 | 임유무(林惟茂) | 원종이 이분성(李汾成)을 보내 해 회유당한 근위대 삼별초와 어사중승(御史中承) 홍문계(洪文系((임연의 사위 임유무의 매형)), 문하성직사(門下省直事) 송송례(宋松禮) 등에게 살해당하고 어머니 이씨와 형제들은 모두 원나라로 압송 |
Ⅴ. 대외관계의 정립
1. 10~12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
가. 송나라의 통일과 북방 유민목민족의 대두
⑴ 5대 10국의 혼란 수습
후주(後周)의 절도사 조광윤(趙匡胤)은 당나라 멸망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960년 송(宋)을 건국했다. 송은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문치주의를 확립했다. 문치주의의 결과 송은 국방력이 쇠락했다.
⑵ 북방 유목민족의 대두
거란(契丹, 遼[요]. 916~1125년), 서하(西夏. 1038~1227), 여진(女眞, 금[金], 1115~1234년), 서요(西遼, 1124~1218), 몽골(蒙古, 1206건국 원 1271~1368년) 등이 차례로 등장하여 북방의 유목민들은 중원의 한족을 압박했다.
나. 고려의 대응
지배층의 성향에 따라 북방민족에 대한 대응이 달랐다.
대 거란(契丹)정책 | 건국 초기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굳건히 대처했다. |
대 여진(女眞)정책 | 문벌 귀족정치가 무르익으면서 유약한 사대주의를 취했다. |
대 몽골(蒙古)정책 | 무신 집권으로 항쟁을 고수했다. |
2. 거란의 침입과 격퇴
가. 고려의 거란정책
⑴ 거란의 성장
오랫동안 당나라 지배하에 있던 거란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엘뤼아 빠오지)가 제 부족을 통일하고 916년 대거란국(大契丹國)을 세우고 926년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 937년에 국호를 요(遼)라고 하였다.
⑵ 고려의 대응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하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태조 25년 942년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바쳤으나 태조는 거란인은 무도한 나라라고 하여 사신은 귀양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어 굶어죽게 하였다. 정종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光軍)을 조직하는 등 송과 친교를 맺고 북진정책을 추진하고 거란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나. 거란의 침입
가. 목적
거란은 장차 있을 송나라와의 대결을 대비해 고려를 견제함으로써 배후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고려는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거란과 충돌하였고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定安國0이 있어서 여진인을 사신으로 삼아 송과 통하고 거란과는 적대시하였는데 이것 또한 거란을 자극하였다. 거란은 정안국을 멸하고 성종 10년 991년에 압록강에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여진인과 송과의 교통을 끊었다.
나. 과정
침입 | 내용 |
1차 침입(성종 12년 993년) | 동경 유수 소손녕(蕭遜寧)이 80만 대군으로 쳐들어 왔으나 중군사 서희(徐熙)의 담판[상군사 시중 박양유, 중군사 내의시랑 서희, 하군사 문하시랑 최량]으로 거란은 퇴각하고 강동 6주(흥화진[興化鎭, 義州]. 용주[龍州, 龍川], 통주[通州, 宣川], 철주[鐵州, 鐵山], 귀주[龜州, 龜城], 곽주[郭州, 郭山])를 차지할 수 있었다. |
2차 침입(현종 원년 1010년) | 강동 6주 요구와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하고 김치양(金致陽) 일당을 멸한 뒤 현종(顯宗)을 옹립한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요의 성종(聖宗)이 직접 40만 대군으로 쳐들어 왔다. 행영도통사 강조[부장 이현운, 장연우]는 적을 가볍게 보고 패배하여 신하되기를 거부하고 피살되었고 흥화진 순검사(巡檢使) 형부낭중(刑部郎中) 양규(楊規), 호부 낭중(戶部郎中) 정성(鄭城), 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主簿) 이수화(李秀和), 판관(判官) 늠희령(廩羲令) 장경(張顥)과 서경을 지켰고 개경이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을 갔다. 양규는 거란과 전투중 전사했으며 거란은 보급로 차단을 두려워하고 별 성과가 없자 현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물러났다. |
3차 침입(현종 9년 1018년) | 고려왕의 입조 회피와 강동 6주 반환을 구실로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와 도처에서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시달리다가 퇴각하는 거란군을 강감찬(姜邯贊)이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여 생존자는 수천에 불과했다. |
다. 결과
현종 10년 1019년 고려와 거란은 강화하고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거란 침공 이후 고려는 나성(羅城)을 축조하고 덕종 2년 1033년부터 정종 10년 1044년간에 걸쳐 압록강 입구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 廣浦)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았다.
3.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가. 건국 초기의 고려의 여진정책
⑴ 여진의 존재 형태
여진은 고조선과 고구려시대 숙신(肅愼), 삼국시대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고려시대 여진(女眞), 조선 초기 야인(野人), 조선 후기 만주족(滿洲族) 등으로 불렸다. 여진은 발해의 피지배층으로 있다가 발해 멸망 이후 부족 단위로 생활하였다.
⑵ 여진에 대한 회유책과 동화정책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토산물을 바쳤고 고려에 귀화 투항에 오는 여진인(向化人, 投化人)들을 자치주를 통해 다스렸다.
나. 윤관(尹瓘)의 여진 정벌
⑴ 여진의 성장
여진은 추장 우코내(烏古迺)의 아들 영가(盈歌), 손자 우야소(烏雅束, 영가의 조카) 등의 추장이 나타나 완안부(완옌부,完顔部)가 여진족을 통합했다. 숙종 9년 1104년부터 고려는 여진과 정면으로 부딪쳐 임간(林幹), 윤관(尹瓘) 등은 정주성에서 완안부에게 대패했다.
⑵ 동북 9성 개척
숙종은 윤관의 신기군(神騎軍, 귀족으로 구성된 기병), 신보군(神步軍, 양인(白丁)으로 구성된 보병), 항마군(降魔軍, 승병으로 조직된 군)으로 편성된 별무반(別武班) 편성의 건의를 받아 들여 여진에 대한 대비를 하였다. 예종(睿宗) 2년 1107년 도원수 윤관(尹瓘, ?~1111)과 부원수 오연총(吳延寵, 1055~1116)은 17만명을 이끌고 여진을 정복하여 동북 9성을 쌓았다. 그러나 여진인의 끊임없는 침략과 애원 및 일부 윤관에 대한 시기 등이 작용하여 개척한지 1년만에 9성은 여진에게 반환되었다.
다,
다. 금의 건국
⑴ 금의 건국
9성을 돌려 받은 여진은 아구타(阿骨打, 우야소의 동생)에 의해 더욱 강성해져 예종 10년 1115년 금(金, 1115~1234)을 건국하였다.
⑶ 금의 성장
금은 1125년 거란(契丹)을 멸망시키고 송(北宋)나라 수도 변경(汴京)을 함락시켰으며 고려에 대해서도 군신관계를 요구하여 고려는 인조 4년 1126년 이자겸이 주장으로 수용했다.
4. 송과의 관계
가. 양국의 접근 목적
⑴ 고려의 목적
고려는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⑵ 송나라의 목적
군사적, 정치적 목적에서 고려에 접근했다. 송나라는 고려가 3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공을 막아내자 그 국력을 높게 평가했고 고려의 군사력을 통해 거란(요)과 여진(금)을 견제하려 했다.
나. 양국의 교역
⑴ 공식적 교역(공무역)
조공품과 회사품의 형식으로 교역했고 거란과 여진의 방해로 공식적인 사신교류는 어려웠다.
⑵ 비공식적 교역(사무역)
비공식적인 상인의 교류는 북방 민족의 방해 속에서도 활발했다.
5. 몽골과의 관계
가. 몽골과의 접촉
⑵ 몽골의 성장
거란과 금나라에 예속되었던 몽골은 징기스칸(Genghis Khan, 成吉思汗, 鐵木眞, 테무친, 위 1206∼1227)의 등장으로 1206년 건국하여 제국을 건설했다. 몽골은 1227년 서하, 1234년 금, 1279년 남송을 멸망시켰다.
⑵ 여몽의 거란 격퇴(강동의 역)
1219년 몽골군에 쫓겨 내려온 거란을 고려, 몽골 및 동진국이 연합하여 강동성에서 격퇴시켰고 몽골은 이후 고려에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나. 몽골의 침입
⑴ 원인
몽골은 고려의 은인을 자처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여 고려와 사이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고종 12년 1225년 몽고 사신 제구유(저고여, 著古與)는 수달피 10만장, 비단 3천필, 모시 2천필, 종이 10만장을 강요하고 귀국 도중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고종 18년 1231년부터 고려에 9차에 걸쳐 침입하였다.
⑵ 경과
몽고의 침입(대몽항쟁)
구분 | 연대 | 장수 | 구실 | 경과 |
1차 | 고종 18년 1231.8~1232.3 | 살리타이(撒禮塔) | 고종 12년 1255년 著古與(저고여, 제구유) 피살사건 | 서북면 마산 동산역 및 관악산 초적 활동 72명 다루가치(達魯花赤, 단사관) |
서북면병마사 朴犀 삭주분도장군 金仲溫 정주분도장군 金慶孫 자주성 성주 崔椿命 | ||||
2차 | 1232.8~12 | 살리타이(撒禮塔), 반장 홍복원(洪福源) | 1232년 6월 16일 강화천도(참지정사 유승단, 야별초 지휘관 김세충(처형) 반대) | 처인부곡 白峴院(자현원) 승려 金允侯살리타이(撒禮塔) 살해. 용인현으로 승격돠고 김윤후 (상장군→攝郞將) 임명. 부인사 초조대장경 소실. 다루가치 축출 |
승병 金允侯 | ||||
3차 | 1235.7~1239.3 | 탕쿠(唐古, tanggu, 당올(唐兀), 당올태(唐兀台), 당올대(唐兀臺)), 반장 홍복원(洪福源) | 출륙환도 | 전주, 경주까지 칩입. 황용사9층목탑 소실 |
죽주성 방호별감 송문주(宋文胄) | ||||
4차 | 1247.7 | 阿母侃(아무간), 반장 홍복원(洪福源) | 출륙과 국왕친조 | 价州・竹州에서 몽고군 대파 |
충주산성 方壺別監 김윤후 | ||||
5차 | 1253 | 지라타이(車羅大) | 충주노예 활약. 김윤후 攝上將軍 승진. 충주 國原京 승격 | |
김윤후 | ||||
6차 | 1254.7~1255.2 | 지라타이(車羅大) | 충부부근의 다인철소 | |
7차 | 1255.8~1256.10 | 지라타이(車羅大) | ||
8차 | 1257.5・10 | 지라타이(車羅大) | ||
9차 | 1258.6~1259.3 | 지라타이(車羅大) | ||
홍대순(洪大純)-홍복원(洪福源)-홍다구(洪茶丘)
원간섭기(1270∼1351)
4한국(汗國)과 원
몽골(1206~1271)
한국 | 설립자 | 위치 | 별망 | |||
킵차크한국(金帳汗國, 1243∼1502) | 바투((拔都) 주치[求赤:拙赤]아들) | 남러시아 | 크림한국(1441년 ~ 1783년) | 1783년 4월 8일에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별망 | ||
카잔한국(1448~1552) | 1552년 10월 2일에 이반 4세에게 멸망 | |||||
아스트라한 한국(1466년 ~ 1556년) | 1556년 이반 4세에게 멸망 | |||||
시비르한국(1490년 ~ 1598년) | 1598년 러시아에 멸망 | |||||
오고타이한국(1218~1310) | 오고타이 | 외몽골・내몽골,북중국 | 1310년 차가타이에 병합됨 | 동차가타이한국(( 모굴리스탄 한국 )에선 부카1360~1706) | ~1706 준가르에 멸망 | |
차가타이한국(1227∼1360) | 차가타이 | 중앙아시아 | 서차가타이한국(1360~1369) | Timur제국(1369) | ||
일한국(1256∼1411) | 훌라구 | 페르시아 | 1411년 티무르(帖木兒)에게 멸망 | |||
원(1271~1368) | 쿠빌리아 | 남중국 | 1368년(북원 1696년 청나라 강희제 중국 복속) |
다. 개경 환도와 강화
⑴ 최씨 정권의 몰락
온건파인 김준(金俊)과 류경(柳璥)이 최의(崔竩)를 타도하고(무오정변, 戊政變) 몽골과의 강화를 추진했다.
⑵ 무신정권의 최후
김준(金俊) 임연(林衍) 임유무(林惟茂)로 이어지는 무신정권은 원종이 이분성(李汾成)을 보내 회유당한 근위대 삼별초와 어사중승(御史中承) 홍문계(洪文系((임연의 사위 임유무의 매형)), 문하성직사(門下省直事) 송송례(宋松禮) 등이 임유무를 살해하여 무신정권의 막이 내렸다.
⑶ 개경 환도
원종 11년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39년간의 강화도 시대가 막을 내렸다.
라. 삼별초(三別抄)의 저항(1270~1273년)
⑴ 배경
삼별초(三別抄)는 도방(都房)과 더불어 최씨정권의 군사적 배경을 이루었다. 삼별초의 시초는 최우가 무인들의 일당인 악소(惡少)의 무리들의 행패를 막기 위하여 설치한 야별초(夜別抄)가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어지고 다시 몽고와의 항쟁에서 포로로 되었다가 도망쳐 온 신의군(神義軍)을 합하여 삼별초라고 한다. 삼별초(三別抄)는 무신정권의 전위부대이며 대몽항쟁의 중심부대였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붕괴와 몽골과의 강화에 불만을 품었다.
⑵ 과정
삼별초는 무인정권이 타도되고 몽고와 강화가 성립된데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개경환도가 발표되자 즉시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지유(指諭) 노영희(盧永喜)가 반란을 일으켜 강화도와 육지와의 교통을 끊고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개경정부와 대립하는 항몽정부를 수립하였다.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로 강화(1270.6~8월)에서 진도(1270.8.19~1271.5월. 용장산성과 남도석성)로 배중손이 죽은 후에는 김통정(金通精)이 다시 진도에서 제주도(1271.5~1273.4.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로 가서 항쟁하였으나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제주가 함락하여 항쟁은 끝났다.
⑶ 의의
고려 무인의 대몽고 항쟁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Ⅵ. 고려 후기의 국제정세 변화
1. 홍건적과 왜구의 창궐
가. 홍건적(紅巾賊)
원명교체기에 한인 반란군의 하나인 홍건적이 공민왕 8년 1359년과 10년 1361년 2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였다. 2차 침입때는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복주(안동)로 몽진(蒙塵)하였으며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이 무찔렀다.
회차 | 연도 | 내용 |
1차 침입 | 공민왕 8년 1359년 12월 | 모거경 등 4만명 침입. 이승경, 이방실 등이 무찌름 |
2차 침입 | 공민왕 10년 1361년 11월 | 주원수, 반성, 사유, 관선생 등 10만명 침입. 개경 함락되고 공민왕 복주(안동) 피난. 정세운, 안우, 이방실, 이성계, 최영 등이 무찌름 |
나. 왜구(倭寇)
⑴ 왜구의 출몰
고종때부터 연해 주변에 출몰했고 조운(漕運) 등이 끊겨 중앙재정이 곤란해졌다.
⑵ 왜구의 격퇴
최선(崔禪), 양관(梁琯) | 충정왕 2년 1350년 2월 왜구가 고성(固成), 죽림(竹林), 거제(巨濟), 합포(合浦. 마산)에 합포천호(合浦千戶) 최선(崔禪), 도령(都領) 양관(梁琯) 등이 싸워 이를 쳐부수고 삼백여명을 죽였다. |
최영(崔瑩) | 우왕 2년 1376년 홍산대첩 |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 우왕 6년 1380년 8월 진포대첩 |
이성계(李成桂), 변안렬(邊安烈) | 우왕 6년 1380년 9월 황산대첩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 격파 |
정지(鄭地) | 우왕 9년 1383년 관음포대첩 |
박위(朴葳) | 창왕 1년 1389년 쓰시마(對馬島)정벌 |
태조 5년 1396년 김사형(金士衡) 쓰시마(對馬島)정벌
세종 1년 1419년 이종무(李從茂) 쓰시마(對馬島)정벌
2. 명나라의 등장과 철령위 문제
가. 명 나라의 등장
곽자흥(郭子興)의 부장 주원장(朱元璋)이 1368년 남경(金陵)에 명(明)을 건국하자 공민왕은 반원정책의 일부로서 친명정책을 표방했다. 그러나 공민왕이 시해된 이후 명나라는 고려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시행했다.
나. 철령위(鐵嶺衛) 문제와 위화도회군
명은 원의 쌍성총관부하에 있던 철령 이북 땅을 명이 직속하겠다고 고려에 통고해 왔다. 고려는 친원세력과 친명세력간의 큰 변화가 있었고 우왕은 요동정벌을 명령했다. 우왕 14년 1388년 최영(崔瑩)을 8도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좌군도통사로 삼아 요동 정벌을 시도하려하자 이성계가 4불가론을 들어 반대하다가 마지 못해 출병했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3. 몽고와의 전쟁
Ⅵ.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1. 원의 내정 간섭
가. 부마체제의 성립
원 나라는 필요에 의하여 고려국왕을 교체하고 고려 국왕은 원나라의 부마국(鮒馬國)으로서 국왕은 세자로 있는 동안 독로화(독로화, tuluge)로서 북경에 머물러 있다가 즉위하여 왕이 되었고 왕이 된 뒤에도 북경에 자주 드나들며 개경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으며 원제국 안에서 예우와 통제를 받았다.
충렬왕 | 충선왕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1274~1298 | 1298~1298 | 1298~1308 | 1308~1313 | 1313~1330 | 1330~1332 | 1332~1339 | 1339~1344 | 1344~1348 | 1349~1351 | 1351~1374 |
나. 왕실과 관제의 격하
고려의 왕실용어와 관제를 격하시켰다.
⑴ 관제의 격하
고려 전기(2성6부) | 충렬왕 원년(1부 4사)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 첨의부(僉議부) |
상서성(尙書省) | |
도병마사(都兵馬使)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
중추원(中樞院)→추밀원(樞密院) | 밀직사(密直司) |
어사대(御史臺) | 감찰사(監察司) |
한림원(翰林院 | 문한서(文翰署) |
이부(吏部) | 전리사(典理司) |
호부(戶部) | 판도사(版圖司) |
예부(禮部) | 폐지(전리사에 통폐합) |
병부(兵部) | 군부사(軍簿司) |
형부(刑部) | 전법사(典法司) |
공부(工部) | 폐지 |
국자감(國子監) | 국학(國學) |
⑵ 왕실 용어 격하
원 간섭기 이전 | 원간섭기 |
조(祖), 종(宗) | 충~왕(忠~王) |
짐(朕) | 고(孤) |
폐하(陛下) | 전하(殿下) |
태자(太子) | 세자(世子) |
다. 정동행성의 설치(충렬왕 6년 1280년~1356년)
원은 일본 원정에 고려를 동원하기 위해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폐지와 설치를 거듭하다가 충렬왕 11년 이후 계속 유지했다. 정동행성의 장관인 좌승상(左丞相)에는 고려 국왕이 임명되었고 정동행성은 형식적인 기구였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통해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라. 영토상실
⑴ 쌍썽총관부(雙城摠管府, 1258~1358년)
고종 45년 1258년 조휘(趙暉), 탁청(卓靑)이 도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을 살해하고 몽골에 투항하면서 설치되었다가 공민왕 5년 1358년 무력으로 회복하였다.
⑵ 동녕부(東寧府, 1270~1290년)
원종 11년 1270년 최탄(崔坦), 한신(韓愼), 이정령(李廷齡), 계문비(桂文庇), 현효철(玄孝哲)등이 임연(林衍)이 왕을 쫓아내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웠을 때에 이를 토벌하다는 구실로 원나라에 투행했다가 충렬왕 16년 1290년에 회복하였다.
⑶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1273~1301)
원종 15년 1273년 삼별초난을 진압한후 설치하였다가 충렬왕27년 1301년에 회복하였다.
마. 인적 물적 수탈
⑴ 인적 수탈
공녀(처녀, 寡婦處女推考別監[과부처녀추고별감]), 내시(환관) 등을 요구했다.
⑵ 물적 수탈
금, 은, 포백, 자기, 호피, 인삼, 해동청(海東靑, 매, 鷹坊[응방]) 등의 물품을 수탈했다.
바. 원 문화의 영향
⑴ 몽고풍과 고려양의 유행
변발, 호복, 조혼, 족두리, 연지 등의 몽고풍속이 고려에서 유행하였고 원에서는 고려쌈 등이 유행하였다.
⑵ 자주성 손상
⑶ 문물의 전래
원을 통하여 성리학, 화약, 서양문물이 전래되었다.
역대 국왕들의 왕권강화를 위한 신진세력 및 정권소외세력 등용
1. 고려 光宗의 과거합격자들의 활동
2. 고려 忠宣王 즉위년(충령왕원년, 1298) 사림원(詞林院) 신진학자들의 개혁운동
3. 고려 忠穆王 3년(1347년) 整治都監의 개혁운동
4. 고려 恭愍王 신진사대부의 정계진출
5. 조선 成宗 士林勢力의 등용
6. 조선 中宗 趙光祖의 등용
7. 조선 正祖 남인계열의 등용
8. 조선 高宗 大院君의 四色登用
2. 공민왕(恭愍王, 1351~1374)의 개혁 정치(자주성 회복운동)
가. 시기
14세기 중엽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적극적인 반원활동이 가능했다.
나. 반원정책
⑴ 몽골식의 폐지
몽골식 변발을 풀고 호복을 벗었다.
⑵ 부원세력의 숙청
기철, 기륜, 기삼만, 기주 등 부원세력을 처형하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폐지했다.
⑶ 관제복구
원 간섭으로 격하된 관제를 복구했다.
⑷ 영토회복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회복하였으며 요동지방을 세 차례 공격하였다.
⑸ 친명정책 추진
종래의 친원정책을 버리고 친명정책을 추진하였다.
다. 내정개혁
⑴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 약화와 재정수입 기반 확보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재정수입의 기반을 확대하려 했다.
⑵ 신돈 등용과 개혁
승려인 신돈(辛旽, 遍照, ~1371)을 국사로 삼고 진평후, 판서문관사(음양관)에 봉하고 삼중대광령도첨의(三重大匡領都僉議)란 직을 제수하여 국가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으며 공민왕 15년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권문세족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 주인에게 반환하거나 해방하여 주었다.
⑶ 권문세족의 숙청과 한미한 자의 등용
영도첨의(領都僉議) 이공수(李公遂),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수산 (李壽山), 찬성사(贊成事) 송경(宋卿), 밀직(密直) 한공의(韓公義), 정당(政堂) 원송수(元松壽)등 권문세족을 축출하고 한미(寒微)한 자를 등용하였다.
⑷ 정방(政房) 폐지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했다.
⑸ 성균관 재정비와 사대부 육성
왕 16년 1367년 성균관을 재정비하고 신진사대부를 육성하였다.
라. 개혁의 실패
권문세력의 반발로 신돈이 1371년 제거되고 공민왕이 최만생등에게 살해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3.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성장
가 권문세족(權門勢族)
⑴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대두한 가문
원의 환관으로 파견되어 고려에 돌아와 권력을 잡은 이숙, 방신우, 원에 세자를 수행한 측근들이다.
⑵ 권문세족의 범위
기존의 문벌귀족, 원왕실과 결혼한 가문(기철(奇轍), 권겸(權謙), 노책(盧頙)), 역인(조인규(趙仁規), 류청신(柳淸臣)), 응방(鷹坊) 출신(윤수(尹秀), 원경(元卿), 이정(李貞), 박의(朴義)) 원나라에 입조하는 국왕을 수행하는 공신, 원공주의 신변을 보호하는 겁령구(怯令口, 인후(仁侯). 장순룡(張舜龍)), 원으로부터 군사직 만호(萬戶)를 얻어 출세한 경우 등이 포함되었었다.
⑶ 토지 침탈을 토한 농장경영과 부 축적
녹봉보다는 불법적인 토지 침탈을 통해 농장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나.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⑴ 신진사대부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는 학자적 관료로서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지방의 향리 출신과 중앙의 이직자(吏職者)가 많았다.
⑵ 지방의 중소지주로서 성장했다.
⑶ 학문적 소양을 쌓아 과거(科擧)를 통해 관직으로 진출했다.
⑷ 고려 후기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조선왕조의 건국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4. 고려의 멸망
가. 국제정세의 변화
⑴ 왜구와 홍건적의 창궐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간의 대립 상황속에서 왜구와 홍건적이 창궐했다. 이것은 원명교체기에 따른 영향이다.
홍건적의 격퇴
1359년 제1차 홍건적 격퇴 서경(이방경, 이승훈)
1361년 제2차 홍건적 격퇴 화주(정세운, 이성계)
왜구의 격퇴
우왕 2년 1376년 崔瑩 홍산대첩
우왕 6년 1380년 8월 崔茂宣 진포대첩
우왕 6년 1380년 9월 李成桂 황산대첩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 격파
우왕 9년 1383년 鄭地 관음포대첩
창왕 1년 1389년 朴葳 쓰시마(對馬島)정벌
세종 1년 1419년 李從茂 쓰시마(對馬島)정벌
⑵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문제
명나라가 요동지방에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통고해 오자 최영(崔瑩) 등은 분개하여 요동지방을 수복하려 했다.
⑶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우왕 14년 1388년 최영을 8도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좌군도통사로 하여 출병했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 4불가론
이성계는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자, 다음과 같은 4가지 근거(四不可)를 들며 반대하였다.
첫째, 이소역대 (以少逆大)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소역대(以小逆大)
둘째, 하월발병(夏月發兵)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夏月發兵)
셋째, 거국원정 왜승기허(擧國遠征 倭乘其虛)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擧國遠征, 倭乘其虛)
넷째, 시방서우 노궁해교 대군질역(時方暑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나. 이성계의 집권
⑴ 실권 장악
1388년 위화도 회군이후 신진사대부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⑵ 과전법 시행
전제개혁을 추진하여 공양왕 3년 1391년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되어 권문세역은 타격을 받고 신진관료들은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⑶ 신진사대부의 분화
산진사대부는 온건파(정몽주, 길재 등)와 역성혁명파(이성계, 정도전 등)로 분화하였다. 역성혁명파는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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