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나라, 술의 노래 -한국 사회는 지난밤을 기억하지 않으리(성기완)
성기완의 노랫말 얄라셩
학수고대했던 날 작사·곡: 백현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사일 만에 집에 돌아온 여자 끝내 이유를 묻지 못한 남자
옛 사연들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 납니다.
돼지기름이 흰 소매에 튀고 젓가락 한벌이 낙하를 할 때
니가 부끄럽게 고백한 말들 내가 사려깊게 대답한 말들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 납니다.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랄라
막창 2인분에 맥주 13병 고기 냄새가 우릴 감싸고
형광등은 우릴 밝게 비추고 기름에 얼룩진 시간은 네시반
비틀대고 부축을 하고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약속하고 다짐을 하고 끌어안고 섹스를 하고
오해하고 화해를 하고 이해하고 인정을 하고
엇갈리고 명쾌해지고 서로의 눈을 바라다보면
그 시간을
또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골목길을 빠져나올 때에 너무나도 달콤했었던
너의 작은 속삭임과 몸짓 운명처럼 만났던 얼굴이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 납니다.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 납니다.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 납니다.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 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이번 설에도 조상님께 술잔을 올렸다. 나는 마감을 앞두고 취하고 말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렇게 됐다. 어쩔 수 없었다는 유일하게 결정적인 변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취기는 필요했다. 이 자살행위는 최소한 내가 속한 나라에서만은 거리낌이 없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른 저녁에 시작해서 자정이 되기 전에 궁극의 망각상태에 이르기 위해 넥타이들은 폭탄을 제조한다. 북한 과학자들이 플루토늄을 합성하는 사이 남한 관료들은 더 기발한 방식으로 폭탄주를 제조하는 법을 개발하기 위해 창의력을 투자한다. 그것은 출세의 또 다른 명백한 길이다. 마르크스의 하부구조-상부구조론이나 알튀세르의 중층결정론이 아시아 동쪽 변방에 자리잡은 묘한 노오력의 나라인 남한에서 이론적으로 헤매는 이유가 있다. 남한 사회의 하부구조에는 술이 있다. 술이 사회를 지탱한다. 헬조선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술이 필요하다.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신다. 술 없이는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다. 맨날 술이다.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 “한 잔 한 잔 또 한 잔”(이백, ‘산중여유인대작 山中與幽人對酌’)
한 잔 또 한 잔을 마셔도 취하는 건 마찬가지지(가수 사랑의 하모니, ‘별이여 사랑이여’)
막창 이인분에 맥주 13병(가수 백현진, ‘학수고대했던 날’)
난 늘 술이야 맨날 술이야(가수 바이브, ‘술이야’)
남친은 여친의 철옹성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 술을 활용한다. 반대로 여친은 무의식중에 자신을 열기 위해 술의 호수를 향해 몸을 던진다. 풍덩. 한국 사회는 술독에서 돌아간다.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 새해에는 술을 끊겠다고 결심한다. 그 결심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술이 필요하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밤새 술을 마시다가 쓰러진다. 버티려고 술을 마시다가 맛이 간다. 입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고 아내는 키스를 거부한다. 거부당한 당신은 바깥으로 돈다. 길바닥을 헤맨다. 거래를 위해, 사랑을 위해, 용서와 화해를 위해 술은 반드시 필요하다. 계약이 성사되면 혈당 수치가 올라간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병원에 가서 간 수치를 잰다. 가짜 양주가 잔을 채운다. 얼음 서너 알이 땡그랑 경쾌하게 잔에 부딪힌다. 얼음만이 가볍게 역사를 되돌아본다. 녹아 없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얼음은 알코올의 매우 친한 친구다. 군사문화는 일시적인 망가짐 속에서만 오와 열을 맞춘다.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가 열일곱에 썼다는 ‘취한 배’라는 시의 구절이 얼음 실로폰 소리와 함께 메아리친다.
아! 배야 박살이나 나버려라
아! 그러면 나는 바다로 가련다.(랭보, ‘취한 배’)
바다로 가기 위해 취기가 필요하다. 취하지 않으면 바다로 갈 수 없다. 배가 박살나면 비로소 노래가 나오기 시작한다. 마이크를 잡으러 노래방에 가자. 사실 맨정신과 노래는 상극이다. 맨정신에 노래하려면 눈이라도 감아야 한다. 맨정신에 할 수 없는 것들을 취기는 가능하게 한다. 노래 부르고 어깨동무하며 우리는 경계를 넘는다. 세상은 우스워진다. 기획재정부 장관의 이성은 폭소와 함께 별것 아닌 것이 된다. 탈세는 술과 동의어다. 술의 장부는 따로 있다. 술상무가 별도의 지출내역서를 쓴다. 술상무는 동방예의지국에 존재하는 모든 예법에 통달해 있다. 금영노래방 단골 히트곡의 번호들을 외우고 있다. 2차에 가면 반드시 먼저 입구에 나와 있어야 한다. 은밀한 허가는 바로 그 입구에서 성사된다. 갑들은 2차를 좋아한다. 대놓고 원한다. 술은 정부 방침의 이면이다. 대부분의 공사는 술자리에서 담합된다. 담합의 결과 예기치 않게 정부가 생길 수도 있다. 생긴 정부는 은근히 외면당한다. 정부의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 미안함 또는 원치 않은 디엔에이(DNA)의 어떤 치명적인 존재가 복수를 꿈꾼다. 국정원은 국정원에 칼을 뽑은 그이의 술자리를 조사함으로써 그를 베어 없앤다. 정부가 미안할 줄 모르니 정부는 서러워 운다. 우는 정부의 원한을 통제하기 위해 강력계 형사는 잠복한다. 사건은 늘 뒤안길로 들어선다. 어여쁜 언니가 리스트를 남기고 자결을 택한다. 리스트에는 충격적인 고위층의 이름들이 쓰여 있지만, 그들 자신이 리스트의 유포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리스트는 소각된다. 대치동에서 강의하는 남한 최고의 수학 선생님이 토사물 위로 고개를 떨구며 계약을 한다. 그곳은 논현동이다. 한때 아이돌이 되고자 했던 그 아이는 요크셔테리어를 키우고 있다. 원룸의 작은 냉장고 안에 유기농 두부가 있다. 교복 코스프레로 인기를 끌고 있는 그 아이는 기말고사 기간 동안에는 볼 수가 없다.
술은 미안함의 상징이다. 술 때문에 미안하다. 술 때문에 공무원이 미안하고, 술에 엮여 2차를 가는 한국 사회에서 검사들은 더 미안하다. 내가 임금 피크제와 성과급제를 반대하고 호봉제를 옹호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호봉제는 매우 함의가 크다. 호봉제는 미안함의 축적이다. 아이디어 좋고 잘난 놈들의 반짝거림만큼 하찮은 게 또 어디 있을까. 남한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경륜이 쌓인다는 것은 무엇일까. 남한에서 일상인들의 인격에 추적추적 쌓이는 그 어떤 깊이는 한마디로 조직이 건네고 내가 마다하지 않은 술잔의 개수와 정비례한다. 호봉제는 조직 안에서 눈물을 삼킨 수많은 밤의 조작들을 성과로 기록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호봉이 높은 공무원이 누른 노래방 번호들의 총합을 그 누가 뛰어넘으랴. 노래는 취기의 상태를 기록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노래는 망가짐의 기록이다. 다들 잘 해보자고, 정신 차리자고 할 때, 가수는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한다.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 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가수 백현진, ‘학수고대했던 날’)
한국 사회는 지난밤을 기억하지 않는다. 다만 미안할 뿐이다. 그러나 그 미안함을 기록하지도 않는다. 미안하기 위해 태어난 고종 황제는 일본놈들이 아편을 섞어 넣은 커피를 마셨다고 전해진다. 그때부터 한민족은 더 이상 타령을 부르지는 않는다. 타령은 서글픈 역사의 상징이다. 역사는 늘 그래 왔다. 한국 사회의 주류는 주류유통업과 동업한다. 밤새 술을 마시며, 중심에서, 정부와 함께, 한 귀퉁이에서, 여전히 미안해하며, 자기들이 원하는 역사를 써내려간다.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