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 [☆우리 노래 100년에 깃든 이야기☆]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우리 노래 100년에 깃든 이야기]
남희철 석화 김성희 편 / 연변인민출판사(2012년4月第1次印刷) / 값 30.00元
================= =================
6. 민족의 통한이 흐르는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
“두만강”이란 단어를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하고 확인하면 곧바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두만강(한어:图们江, 병음:Tumenjiang, 로씨야어:TYMAHHAA, 만주어:Tumen ula):장백산 동쪽 기슭에서 시작하여 동해로 흘러들어가며 중국과 조선, 로씨야의 국경을 이루는 국경하천이다. 길이 547㎞, 류역면적 3만 3.269.5㎞(중국 2만 2.526㎞, 조선 만 743.5㎞)이다. ‘두만’이라는 이름은 만주어로 ‘10000(만)’을 뜻하는 투먼(tumen)에서 유래되었다.”
이것은 두만강의 자연지리학적인 정보이다. 이 몇줄로 우리는 두만강의 상식적인 내용을 대체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천, 수만년의 세월을 싣고 유유히 흘러온 천리 두만강은 그를 생명의 젖줄기로 삼고 랑안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 살아온 사람들, 특히 중국주선족에게는 너무나도 많고 깊은 의미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표현은 두만강 강물을 모두 기울여 먹물로 쓴다 하여도 모자랄 것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내몰린 목숨줄을 이어나가기 위하여 장백산호랑이보다도 무섭다는 “월강죄”를 무릅쓰고 거친 물결에 몸을 내맡겨 건너온 두만강, 그 푸른 물결에 흘려보낸 쓰디쓴 애환이 또한 얼마던가. 하여 두만강은 우리 시인, 작가들에게 수많은 령감을 안겨주며 무궁무진한 창작소재를 제공하여왔다. 두만강에 바쳐진 시와 노래, 소설, 드라마, 영화들이 수없이 많은바 우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절절하게 가슴에 와닿는 작품으로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을 꼽게 된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배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여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쉬니
추억에 목 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님 가신 강언덕에 단풍이 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그 님이 보고싶구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지금은 타계한 한국의 원로가수 김정구씨의 구수한 목소리로 만인의 가슴에 남아있는 이 노래는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설움과 한이 배여있어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조선민족이라면 남녀로소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천고의 절창으로 불리는 이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경과 즉 창작의 비하인드스토리(behind story)를 알게 되면 우리의 감동은 배가될 것이다.
조선 평양에서 발간되는 종합예술잡지 ≪조선예술≫2002년 9월호와 월간대중잡지 ≪천리마≫2005년 5월호에는 이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의 창작 동기와 과정 등에 대하여 상세하게 소개되어있는데 이를 요약하여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 노래는 30년대 중엽 중국 동북지방을 순회공연중이던 류랑극단 예원좌(艺苑座)의 작곡가 리시우(李時雨)씨가 길림 도문의 한 려관에 머물 때 만든 작품이다. 1935년 어느날, 작곡가가 려관 뒤마당에 서있는 단풍나무 두그루를 보며 고향생각에 잠겨있는데 려관집 주인이 그 나무는 자신이 두만강 건너올 때 고향에서 떠가지고 와 1919년에 심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추억’이라는 주제로 곡을 구상하며 잠을 못 이루던 그날 밤, 어디선가 비통하고 처절한 녀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사연을 알아보니 독립군인 남편이 일제경찰에 잡혀 총살되었는데 그날이 바로 희생된 남편의 생일날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두만강 강기슭에 나간 작곡가의 눈에는 두만강의 물결이 나라 잃고 헤매는 우리 민족의 피눈물처럼 보였다. 현지에서 만난 문학청년 한명천에게 이 사연을 이야기해주자 그가 즉흥적으로 가사를 썼고 작곡가도 즉시 곡을 붙였다.
이렇게 창작된 노래를 극단의 장월성이라는 소녀배우를 시켜 공연 막간에 부르도록 했는데 관중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후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작곡가는 시인 김용호에게 부탁해 가사를 다듬고 선율을 완성해 가수 김정구의 노래로 1937년 OK레코드사를 통해 취입하게 됐다. 결국 레코드에는 작사자가 김용호로 올라있지만 이 노래 작사는 한명천 원작, 김용호 개작 그리고 작곡은 리시우가 정확한 것이다.“
이어서 잡지는 또한 “눈물 젖은 두만강” 이 노래를 일제강점기에 나온 “계몽기가요”중 대표곡으로 꼽고 있으며 “광복전 우리 인민들의 피눈물 나는 력사를 반영한 노래”로서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울분과 침략자들에 대한 항거의 감정,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담고있기 때문에 사람들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불리고있다”고 소개했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독립투사 문창학의 부인 김증손(당시 30세)이다. 독립투사 문창학은 조선 함경북도 은성군 미포면 출신으로 상해림시정부 교통총장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12월에 체포되어 1923년 12월 20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된 후 한창나이인 41세에 사형당하였다. 그녀는 당시 독립운동에 참가한 남편을 찾아 중국땅 어디나 독립군이 있다는 곳이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찾아다녔다. 도문에 와서야 남편이 이미 희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하늘이 무너녀내리는 것 같아 머무르던 려관방에서 원망과 슬픔에 밤새도록 목놓아 통곡을 하였다. 이 녀인의 사연이 시인과 작곡가에 의해 오선지에 담겨졌는데 바로 불멸의 명곡 “눈물 젖은 두만강”이 노래이다.
“눈물 젖은 두만강”의 작사자 한명천은 1940년대 후반에 활동한 조선의 유명한 시인으로서 대표작인 서사시 “북간도”(1947)는 “피어린 투쟁의 20성상/슬기로운 민족의 기발인/항일의 영웅들이 나온다//덕보는 두만강을 건너/남양, 회령을 지나/남쪽길 향하여 나온다!/오! 조국이여, 덕보는 흙을 움켜쥐고/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걸음을 재촉했거니/막 청진에 당도하자/거리는 거리마다/나붓기는 기발의 파도여!”와 같은 시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일제치하에서 항일유격대의 빨찌산투쟁을 다룬 작품으로 조기천의 “백두산”과 함게 조선문학사에서 2대서사시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한명천의 전후시기(1953-1958)의 대표작으로 “보통 로동일”,“그 여자의 봄”을 들 수 있다.
작곡가 리싱는 한국 경남 거제사람으로서 호적등본이름은 리만두(李万斗)이다. 그는 1913년 11월 4일 거제면 남동리 45번지에서 태어나 1928년 거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할빈상업학교(1932-1936)와 만주국립대학(1936-1941)을 다녔으며 일본 와세다대학(1941.4.1-1941.12.31)을 졸업했다. ≪매일신보≫할빈지국(1941년), ≪조선상공신문≫할빈지국(1941-1945)에 근무하다가 1945년 고향에 돌아갔다. 노래 “섬아가씨”, “눈물의 국경”, “타향술집”, “인생역마차”, “안해의 사진”, “진도아가씨” 등이 있다. 1975년 1월,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최근 그의 고향인 한국 경남 거제시에 “눈물 젖은 두만강”작곡비와 기념동산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34.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감미로운 노래가락
-“내 고향 오솔길”
“한잠 자고 깨여 일어나보니 어느사이 스타가 되어있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여있더라.”는 말이 있다. 가수나 탤런트 또는 화가나 작가와 같이 문학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가운데서 가끔씩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어떤 특별한 작품으로 삽시간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대중들에 의하여 곧바로 스타덤에 오르는 경우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우리 중국조선족가요발전사를 둘러보면 이와 같은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그중에서 특히 가요 “내 고향 오솔길”을 부른 가수 한국화의 경우라 하겠다. 지난 세기 70년대 후반 사범학교를 방금 졸업하고 애숭이로 가무단 가수들의 말석에 턱걸이로도 겨우 끼여들가말가하던 무명가수가 가요 “내 고향 오솔길”, 단 한곡을 부름으로써 하루아침에 인기절정의 가수로 떠오르고 어린아이들루보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은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명성을 자자하게 날린 그 이름, 한국화가 바로 그 주인공인 것이다.
1980년도의 어느날, 연변가무단이 화룡에 와서 한국화가 부르는 “내 고향 오솔길”이 처음 무대에 올라 공연되던 때이다. 가수 한국화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서 달려온 수많은 관중들로 발디딜 틈없이 꽉 찬 공연장에서 막이 올라 노래반주곡이 울리고 가수가 마이크를 잡으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곱게 핀 함박꽃-”하고 첫구절을 떼자마자 관중석은 삽시에 흥분의 도가니로 들끓어올랐고 일부 젊은이들은 심지어 가수 한국화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더욱 똑똑히 보려고 무대앞에까지 우르르 몰려드는 진풍경까지 연출하였다. 그때 화룡 관중들은 연변가무단 공연티켓의 3분의 2티켓 값은 한국화를 보려고 기껍게 지불한 것이라고도 말하였다.
곱게 핀 함박꽃 반겨웃는 산기슭에
안개 타고 내렸나 숲속에 숨었나
산나물 돋아나는 오솔길은 걷기 좋아
포동진 애고사리 손잡고 놓질 않네
음 아, 내 고향 오솔길은 걷기도 좋네
단풍 든 황철나무 설레이는 산허리에
구름 타고 비꼈나 벼랑에 걸렸나
산열매 무르익은 오솔길은 걷기 좋아
달디단 머루다래 입맛을 돋군다네
음 아, 내 고향 오솔길은 걷기도 좋네
함박꽃이 피여나고 산열매 무르익어 정다운 고향의 오솔길을 담은 노래, C대조 4/4의 소박한 박자로 흐르는 이 노래가 어찌하여 사람들 모두에게 그처럼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킨것일까. 당시 이 노래는 사람들의 가슴에 벅찬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바로 “문화대혁명”으로 10년 넘게 시달려오며 황폐해지고 고갈된 마음의 갈증이 불러온것이며 한줄기 세찬 소나기를 기다리는 메마른 심령에 밀여드는 정서의 물결이 굽이쳐온것이였다.
이 작품을 쓰고나서 작곡가 최삼명은 “‘내 고향 오솔길’문세록”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중앙 11기 3중 전회는 문화대혁명의 결속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때만 하여도 연변가요계에서 서정가요의 “금지구역”은 의연하였다. 그에 따라 작품이 몸살을 겪어야 했고 작가마저도 고뇌속에서 몸부림쳐야 했다. 분위기가 이러하다보니 창작자들은 조심을 해야지 또다시 번안풍이 몰아치면 큰일인데 하는 우려속에서 기를 펴지 못하였다. 특히 문화대혁명의 고압정책으로 말미암아 민요와 전통음악은 “금지구역”이 되었고 창작은 큰 제한을 받았다. 그런데 “4인무리”의 검은 그림자는 아직 철저히 사라지지 않았었다. 이때 연변의 일부 사람은 “문화대혁명이 끝났다고 공공연히 우쭐하고 마구 쓰더니 어디 보자고, 또 소자산계급의 정서를 써서 독소를 풍기고 있지 않는가? 한바탕 맞을 준비를 해야 하겠소.” 하면서 나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났는데 왜서 또 자산계급이요, 소자산계급이요, 외국정서요 하는지 나는 리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문화대혁명기간에 “자산계급기술권위”요, “주덕해의 검은 수재”요 하는 모자를 썼던 나는 그야말로 또 매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건지 불안한 마음에 시달리면서도 대처할 준비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바람은 일지 않았다.
시대를 가름하는 한편의 작품을 쓴다는것이 창작자에게 어떤 용기가 필요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이 작품을 쓰고 당시 작곡가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는가 하는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 한편이 잡지 ≪문학과 예술≫1987년 11-12합간 43패지에 “하고 싶은 말은 실로 많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이 글의 작자는 “근래에 최삼명선생이 ‘색다른 가요’ 몇수를 세상에 내놓은탓으로 음악계 일부 사람들의 뒤공론을 듣고있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선생의 말을 들어보려고 그를 찾았다.”라는 말로 시작을 떼고 작곡가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고 그에 답하는 형식으로 썼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질문1: 시대와 가요의 주인인 대중들의 미학관념의 변화의 관계에 대해.
답: 사람들의 미학관념은 시기에 따라 변할 수 있는데 사람들의 미학관념이 변할수 있는 충분한 계기가 주어진 그때마다 대중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따로 있었다. 이를테면 해방초기엔 “농민의 노래”거나 “좋은 종자 가려내세”와 같은 신민요풍격의 노래를 즐겼는가 하면 건국초기엔 “아름다운 내 고향”이거나 “고향산기슭에서”와 같은 서정성이 짙은 노래를 즐겼고 그후 오래동안은 민족절주가 짙은 노래거나 약동이 심한 가요를 즐겼다. 그 원인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람들에겐 새로운 미학적요구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음악에서는 선율, 절주, 조식에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질문2: 음악창작에서의 전통에 대한 계승과 혁신에 대해.
답:우리는 민족음악유산에 대한 효자현손으로 되어야 할뿐만아니라 무정한 반역자로 될줄도 알아야 한다. 이 반역자가 되는 목적은 효자현손질을 더욱 잘하기 위함이다. 일부 중청년작곡가들이 자기의 민족음악바탕에 대하여서는 “백지”나 다름없으면서도 아프리카거나 인도 등 외국음악을 모방하면서 거기서 “2분휴지부의 사용창시자”인듯 자기를 내세워보기도 하고 또는 민족바탕을 조금 떠나 약간만 색다른것이 들어오기만 하면 “이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라고 대성질호하면서 “아무리 창작해봤댔자 민요나 판소리를 초과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작법들은 모두 우리 조선족음악을 외곬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질문3: 그럼 우리 작곡가들이 해야 할바는?
답: 시대를 정시한 토대우에서 우리의 전통과 외래의 사조를 많이 학습해야 하고 대중들의 미학요구의 변화에 대하여 사색해야 하며 새로운 것을 탐구해야 한다. 이 새로운 것이란 전통에 대한 반복이 되지말아야 할것은 물론 남의것에 대한 모방도 되지 말아야 한다. 실로 우리의것이면서도 그전에 들어보지 못하던 참신한것이여야 하고 남의 것 같으면서도 우리의 맥박이 뛰게 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시대적사명을 띤 우리 작곡가들의 노력이 경주되여야 할 것이다.
작곡가 최삼명은 가요 “내 고향 오솔길”을 창작하면서 얻은 소감을 아래와 같은 세가지로 귀납하였다. 이는 음악창작자들은 물론 모든 장르의 예술창작자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저 하는 모든이들에게 소중한 가르침이 될것이다.
첫째, 창작에서 코기러기가 된다는것은 모험을 동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시비와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히 새로운것에 도전해야 한다.
둘째, 반드시 민족의 심미리상을 반영한 가곡을 창작해야 한다. 그러자면 민족 정서와 정감에 바탕을 두어 창작해야 한다.
셋째, 시대정신과 결합된 가곡을 창작해야 민족의 계선을 넘어 모두가 좋아하는 가곡을 창작해낼수 있다. 시대를 외면한 가곡은 관중이 먼저 알아보고 거부한다.■
42. 청춘의 가슴을 흔드는 사랑의 북소리
-“사랑은 영원히”
음악은 시대의 절주를 가장 민감하게 담아낸다. 또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새로운 력사를 엮어가는 인민대중들의 사상, 감정과 정서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것이 대중가요이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된후 당의 개혁개방정책이 심입됨에 따라 진일보 사상을 해방하고 각 분야에서 전 방위적으로 변화를 촉진하고 발전을 요구하는것이 시대의 주선률이 되었다. 특히 1978년 12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11기 3차 전원회의 지침은 온 나라를 변화와 발전의 거창한 시대적물결에 휩싸이게 하였다.
또한 정보화시대에로의 진입과 함께 사회적으로 점차 컴퓨터가 보급되고 디지털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함에 따라 음악분야세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신선하고 뚜렷한 표현이 전자디지털음악 즉 미디(MIDI:Music Instrument Digital Intergace)의 출현이다. 이는 기존의 아나로그적인 악기편성을 구성하지 않고서도 원하는 악기음의 효과를 가능하게 하였고 또한 수많은 새로운 음향을 창출하게도 하였다. 이 수많은 가능성과 무궁한 표현능력을 가진 미디가 가요의 반주음악에도 적용되자 노래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미디의 다양한 절주와 음향효과가 음악의 폭을 넓히고 다양하고 참신한 시도로 노래의 표현력을 크게 높여주게 되었던것이다.
1985년에 창작된 석화 작사, 고창모 작곡의 남녀2인창 “사랑은 영원히”도 바로 이런 시대적변화를 배경으로 탄생된것이다.
우리 둘이 정답게 손에 손잡고
높은 산 험한 봉을 맞받아가면
칼벼랑은 비켜서고 넓은 길 펼쳐지리
아, 사랑은 용감히
아름다운 처녀야 사랑은 용감히
우리 둘이 정답게 손에 손잡고
깊은 바다 세찬 파도 헤쳐나가면
아름다운 무지개는 금다리로 비껴가리
아, 사랑은 열렬히
미더운 총각아 사랑은 열렬히
우리 둘이 정답게 손에 손잡고
저 하늘 별나라에 오르려 하면
흰구름은 층계되고 둥근달 마중오리
아, 사랑은 영원히
정다운(처녀야, 총각아)사랑은 영원히
당시 이 노래를 불러 수많은 사람들, 특히 수많은 청춘남녀들의 가슴을 크게 울려주었던 연변가무단의 김응가수와 리정숙가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노래는 지난 세기 80년대 작품으로서 통속가요로 말하면 상당히 일찍 창작된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통속가요라 하지만 석화선생과 고창모선생은 아주 독창적인 창조의식으로 지금의 이 시대와도 맞고 신비감도 있으면서 황홀한 리상의 경지에고 이끌면서 청년남녀들의 고상한 사랑, 진실한 사랑을 표현한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저희들이 일찍 ≪가요록음선집≫에 이 노래를 수록했는데 우리는 지금도 이 노래를 사랑할뿐아니라 음미하기 좋아합니다. 우리 노래가 생명력을 가지자면 모방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가 하는것을 파고들면서 자기 개성을 살리고 남들과 다른 매력이 있는 것으로 만들자면 굉장한 심혈과 노력을 들여야 하며 또 진실한 인간의 심령을 파고들어야만이 이런 노래가 나올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문학과 예술≫1985년 제3호에 실린 전호의 “사랑의 멜로디”란 제목의 음악평론은 이 노래의 예술적특징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분석하였다.
이 노래는 정서가 명랑하면서도 조용하고 열정적이면서도 속삭이는듯한 느낌을 주는것이 특징이다. 가사는 매우 소박한 언어로 구성되였는데 이 소박한 언어속에 “칼벼랑”을 헤치고 “금다리”를 건너가 “둥근달”을 마중할 청춘남녀의 사랑의 열정, 사랑의 신심, 사랑의 희열 등으로 이뤄진 사랑의 랑만이 아주 잘 표현되였다.
이 가요는 동기부분인 첫 악구의 첫 소절과 그에 호응하는 두 번째 악구의 첫 소절에 모두 재치 있게 반박자쉼표를 사용했고 전반 악곡에 걸쳐 매 악구의 두 번째 소절의 마지막에 반박자쉼표를 주어 앞음의 박자연장을 통제해놓음으로써 진지한 사랑으로 가슴을 달구는 청춘남녀들의 뜨거운 심장의 잦은 박동과 이속에서 진행되는 그들의 아기자기한 속삭임을 음악형상으로 생동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이 가요엔 “화”,“씨”등 불안정음이 많이 들어갔는데 때론 이런 음들이 경과적으로거나 전조적색채로 들어가지 않고 뚜렷한 위치에서 그 부위의 상대적인 “골간음”으로 사용됐다. 이는 이 가요의 간절한 사랑의 주제를 표달함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이다. 이 가요의 네 번째 악구의 세 번째 소절과 저음 “라”로부터 “쏠”에로의 전형적인 음계적상행진행이다. 전반 가요의 고조부분으로 되는 이 음계적상행진행은 목적음 “쏠”에 가서 네 박자의 연장으로 가슴을 탁 튀워줌으로써 사랑으로 달구었던 청춘의 가슴들에서 잦은 맥박으로 토닥토닥 끓어오르던 희열의 폭발을 성공적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재래의 대중가요들의 상례로 미루어본다면 응당 여기엔 완전종지가 안배돼야 했다. 그런데 이 가요는 그렇게 처리된 것이 아니라 대조선률의 왕성한 진행성격을 가진 “쏠”음이 네 박자로 연장됐기에 결속감이 없다가 후렴의 첫 소절에 와서 오히려 “도”음을 네 박자로 뽑았기에 여기서 악곡이 종지를 가져온듯한 착각을 주었다. 이는 이 가요의 선명한 특점의 하나이자 또 남다른 매력인 것이다.
그리고 대중가요의 특점에 맞게 8도 음역을 순간적으로 조금 초과한 이 가요의 기본음들은 대부분 중간음구거니 저음구에 놓여있다. 이는 이 가요의 가사에서 울려주는 정다운 련인들의 달콤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속삭임의 내적감정세계를 표현함에 있어서 아주 적절한 수단으로 이바지된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요의 선율흐름은 거개가 상행 혹은 하행의 음계적진행형식이거나 반복수단, 부동한 위치에서의 동음중복형식을 취한데다 앞소절의 마지막 음이 뒤소절의 첫음으로 되는 등 방법으로 맞물려줬고 그 절주형식의 변화도 많지 않기에 청중들에게 농후한 대화의 기분과 함께 평온하고 다정다감한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이 가요는 후렴에 와서 가사의 발성이 강박을 피하여 안배됐는데 이 역시 사랑하는 청춘남녀들의 부드러운 마음세계의 다정한 속삭임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성공 비결의 하나이다.
연변가무단 가수 김응, 리정숙이 부른 이 노래 “사랑은 영원히”는 발표 당시 참신한 노래말과 독특한 선율진행 및 절주형태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가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우리의 대중음악이 새로운 시대를 맞아 변화되고 발전해나가는데서 기폭제적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면서 수많은 가요창작자들에게도 좋은 계시를 보여준 작품으로 기록되였다.■
44. 꽃피는 새살림의 환희로운 가락
-“동동타령”
예술작품의 창작은 예술가의 머릿속에서 섬광처럼 순간 반짝 빛나며 스쳐지나가는 령감을 바로 잡아내여 창조적인 정열을 드높게 작동시켜 이뤄내는 작업이다. 이 예술적령감의 작동은 마치 작은 성냥개비 하나 그어 다이너마이트(dynamite)의 도화선에 불을 대면 순식간에 지동치는 폭음과 함께 집채같은 커다란 바위돌도 산산이 조각나버리게 하듯, 또는 담뱃불만큼 조그만 불씨라도 심지에 닿게 하여 폭죽을 터뜨리면 귀청을 찢는 굉장한 폭발음과 함께 수많은 오색불줄기가 캄캄한 밤하늘에 치솟아올라 빨갛고 노랗고 파란 온갖 꽃보라가 활짝 피여나게 하는것과 같은 신비한 힘으로 작품을 완성시킨다.
한수의 가요가 창작되는 경우도 이와 다를바 없다. 어떤 노래는 수개월, 수년간 심지어 수십년의 시간을 경과하며 보충되고 수정되고 다듬어져서야 비로소 최후로 완성되지만 그와 달리 상상밖으로 매우 짧은 시간내에 한편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경우도 있다.
가요 “동동타령”의 탄생도 이와 같아 작사와 작곡이 모두 합하여 불과 한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이루어진 경우이다. 이 전설같은 창작담을 이 노래의 작곡가인 안계린 본인의 입으로 들어보자.
“1987년도 6월달이라고 생각됩니다. 그해에 ‘연변의 여름’이라는 예술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2차 예술제인데 이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그때 작사하는 동무들과 작곡하는 동무들이 함께 모여 연길시 민주촌에 가서 자리를 잡고 거기서 창작활동을 하였습니다. 프로그램을 짜던 중에 남녀2인칭곡이 좀 요구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석화선생하고 남녀2인칭곡에 붙일 가사를 하나 좀 못 쓰겠는가하고 물으니 ‘갑자기 물어보니 머리가 텅 비여서 모르겠습니다.’하고 이야기하기에 저는 이전의 우리 민요를 보면 ‘무엇이 동동 무엇이 동동’이런 것이 있지 않은가? 이런걸 쓰면 어떨가? 이 말 한마디에 석화선생이 무릎을 탁 치며 ‘됐습니다.’하고 밖으로 나가던것이 반시간도 안되여 가사를 써가지고 왔습니다. 보니깐 내 마음에 딱 들어서 나도 또 제꺽 곡을 지어왔습니다. 창작과정에서 이렇게 곡이 빨리 된것도 내 창작생애에서는 드문 일입니다.”
석화시인이 “반시간도 안되여 가사를 써가지고” 온것이 바로 “동동타령”노래말인데 이 가사를 한참 들여다보던 안계린작곡가가 “이번은 내 차례요.”하며 석화시인이 나갔다 들어온 문을 다시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도 역시 30분이 채 안되여 시물시물 웃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창작일군들이 모여앉아 시창해보니 그처럼 신통할 수가 없었다. 작사와 작곡 창작이 도합 한시간 이내에 모두 완료된 이 가요는 그번 예술제에서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의 주요종목으로 무대에 올랐다. 석광선, 남정희 두 가수가 남녀2인창으로 부른 이 노래는 무대에서 우렁찬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예술제의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노래는 수년후 또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의 최고예술상인 “진달래” 문예상을 받기고 하였는데 작품은 현재까지 연길시 민주촌에서의 창작당시 원 가사 그대로 한 글자 수정없이 불려지고 있다.
앞강물 뒤강물에 물오리 동동 뜨고
네 가슴 내 가슴에 기쁨이 동동 뜨네
흐르는 물결위에 버들잎 동동 뜨고
가는 정 오는 정에 사랑이 동동 뜨네
(후렴)
에루화 동동 데루화 동동
동동타령을 부르며 잘 살아보세
해맑은 하늘가에 아침해 동동 뜨고
뜨락의 낟가리에 밝은 달 동동 뜨네
새파란 련못우에 꽃잎이 동동 뜨고
우리네 새살림에 기름이 동동 뜨네
(후렴)
이 작품의 성공요인은 바로 안계린작곡가가 던진 한마디 “동동”이라는 불씨이다. 당시 연길시조선족예술단 단장직무를 맡고있던 그는 1962년 길림예술학권 작곡학부를 졸업하고 다년간 여러 예술단체에서 활약하며 우리의 민족음악예술창작에 깊은 조예를 갖고있는 작곡가였다. 그는 우리의 민족적색채가 짙은 수많은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는데 특히 “고향길”(김태갑 작사), “어서 와요 춤을 춰요”(김태갑 작사), “장백의 새 아리랑”(최현 작사),“풍년의 흥타령”(최현 작사)등 노래들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명곡들이였다.
때문에 작곡가는 우리의 조선민요전통에서 손쉽게 “동동”이란 어휘를 발견하여 작사자에게 전달할수 있었으며 석화시인도 이어 곧 “머리속에 순간 반짝 빛나며 스쳐지나가는 령감”이 발화되여 거세찬 창작적충동을 폭발시킬수 있었다.
“동동”이란 이 어휘는 작은 물건이 떠서 움직이는 현상(시각), 북소리와 같은 울림소리(청각), 어떤 기쁜 일로 하여 공연히 마음이 들뜬감각(심리반응) 등 통감각적이미지를 안겨주고있는데 작사자는 작품에서 이 “동동”을 재치있게 써서 때로는 형용어로, 때로는 술어로, 때로는 합성명사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동동”은 여러번 다양하게 되풀이되면서 번번이 새로운 이미지, 흥겨운 정서를 더해주었으며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흥겹고 경쾌한 정서가 가배되였다. 또한 후렴구에서 “에루화 동동 데루화 동동”이라고 한 다음 이어 “동동타령을 부르며 잘살아보세”라고 하며 마치 “동동”이 우리를 잘살게 해주는 정다운 친구의 이름이기나 한것처럼 흥겹게 부르며 거듭 강조했다.
작사자는 전렴 4행, 후렴2행의 2절 가사 전문에 모두 우리 조선어고유어를 살려 쓰며 통속적인 입말체 가사를 쓰기에 힘썼는데 전체문장에서 한자어휘가 한 글자도 들어가지 않게 하였다. 또한 조선말가사의 운률적토대에 따라 완벽한 “3.4조”의 운률을 지키고 유향 자음과 모음을 골라 쓰며 음색, 음가를 따지면서 어휘의 기능이 충분히 발위되게 하였다. 이 “동동”은 유향자음으로 맑지고 순탄한감을 주면서 음조미를 돋우는데 전체 작품에서 16자나 되풀이되여 그 음가가 충분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발휘되였다.
또한 작자가 특징적으로 쓰는 기법의 하나로 대조, 대구도 많이 사용했는데 “동동타령”에서 첫시작부터 “앞강물”과 “뒤강물”, “내 마음”과 “네 마음”, “에루화”와 “데루화”등 상반되는 뜻을 가진 단어거나 단어결합을 대조시켜 선명하게 표현했고 “앞강물 뒤강물에 물오리 동동 뜨고/내 가슴 네 가슴에 기쁨이 동동 뜨네”처럼 구절과 구절을 대조시키면서 대구를 이루었다. 이렇게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을 대조시켜 인간사회현상을 명료하게 강조하고 내용, 정서를 심화시켰으며 음악적절주를 강화하였다. 작사자는 이렇게 우리 문학의 고전인 “고려가요”의 “동동”에서 운을 따다가 오늘의 시대적맥박, 민족적정취가 넘치는 새로운 형태의 노래에 훌륭히 담아냈던 것이다.■
=== = = 차례
.♣.
============================================
■ 머리말
작곡가나 작품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들을 일화(逸話), 에피소드(episde)라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가 확실한 사실을 전해주는 경우 음악을 리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제자 리스(Ferdinand Ries)의 이야기는 아주 좋은 실례로 된다. 그는 자신의 편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베토벤은 1802년 뷘에서 한시간 반 정도 걸리는 마을 하일리겐슈탄에서 그의 세 번째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는 이 교향곡을 창작하면서 아직은 집정관이었던 나뽈레옹을 생각했었다. 베토벤은 당시에 그를 매우 높이 평가했었다. 나와 다른 여러 가까운 친구들은 이 심포니가 이미 악보로 그려져 그의 책상에 놓여있는 것을 보았는데 제목 페지에 “Bonaparte”(나폴레옹- 필자 주)라고 쓰이어있고 그 맨아래에 Luigi(즉“Ludwig”-필자 주)Van Beethoven”이라고 쓰이여있었다. “보나프르트가 자신을 황제로 선언했다는 소식을 그에게 맨먼저 알려준 사람은 나였는데 그때 그는 화를 내며 ‘그도 보통인간에 지나지 않았어. 이제 그가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모든 인권을 짓밟아버릴거야. 그는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올려두고 폭군노릇을 할거야’하고 소리질렀다. 베토벤은 책상으로 다가가 제목 페지를 잡아 찢어내여 땅에 던졌다. 첫페지는 다시 쓰이여졌는데 이제 ‘Sinfonia Eroica'(영웅교향곡)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시인이며 음악평론가인 렐슈탑( Carl Friedrich Rellstab, 1757-1813)은 베토벤이 환상곡 “풍의 소나타”라고만 적어 놓은 피아노쏘나타 제14번에 “월광”이라는 제목을 달았다고 한다. 이는 제1악장의 환상적인 아디지오에 관해서 “스위스 루체른호의 달빛에 흔들리는 물결사이로 떠오른 작은 배”라고 평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이 “월광쏘나타”와 관련하여 베토멘이 눈 먼 처녀를 위해 달빛에 감겨 만들었다든가, 교외에 있는 어떤 귀족의 빈 저택에서 달빛에 감동되어 만들었다든가 또는 련인과의 리별의 편지로 작곡한 것이라든가 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창작되여 전해오고 있다. 지금의 우리는 베토벤의 피아노쏘나타 제14번과 렐슈탑의 “월광”을 함께 듣는 것이 더 편하게 되어있다. 이처럼 관련 에피소드가 없기 때문에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게 되고 그런 만들어진 이야기가 음악작품과 함께 전해오며 상부상조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중국조선족은 17세기초부터 20세기 중반에 조선반도로부터 중국에로 이주해온 과경(跨境)민족이다.
중국조선족은 2만5천리 장정 이전의 로농흥군시기와 2만5천리장정 이후의 항일전쟁시기 그리고 광복직후의 해방전쟁시기를 지나오면서 중국혁명과 항일전쟁의 승리, 새 중국 탄생에 마멸할수 없는 혁혁한 공적을 세웠고 동북변강을 개척하였으며 새 중국 탄생 이후에는 나라의 당당한 주인으로 국가건설과 민족발전에 앞장서왔다.
중국조선족의 음악 역시 전통적향기와 시대적정신이 뚜렷하고 예술성이 뛰어난 것으로 국내외에 소문이 높으며 중국 현대음악사를 빛나게 장식해주고 있다. 일찍 1930년대초에 서금혁명근거지에서는 최음파가 맹활약을 했었고 항일전쟁시기에는 정률성과 한유한이 전국을 무대로 활약했으며 해방전쟁시기에는 허세록과 정진옥이 전후방에서 쌍벽을 이루었고 건국초기에는 김성민, 박우, 동희철, 최삼명, 안국민, 허원식, 최창규, 김봉호 등 수많은 음악가들이 맹활약을 시작하였으며 개혁개방시기에는 안계란, 방룡철, 장천일, 최건, 박서성, 권길호, 윤명호, 안승필 등 수많은 시인인들이 두각을 내밀었다.
중국조선족의 가요사만 하더라도 이민시기917세기초-1945년), 해방전쟁시기(1945-1949년), 새 중국 성립초기(1949-1966년), 문화대혁명시기(1966-1976년), 개혁개방시기(1978-현재)를 겪어오면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남겨놓았다.
본서는 바로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선별해서 수집, 정리한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민시기의 “월강곡”, “신흥무관학교 교가”, “대성중학교 교가”, “전국공농대표대회 옹호의 노래”, “연길감옥가”, “눈물 젖은 두만강”, “연안송 ”,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 ”, “최후의 결전 ”, “향수의 노래 ”, “호메가 ”, “선구자(룡정의 노래) ”로부터 해방전쟁시기의 “동북인민행진곡 ”, “농민의 노래 ”, “베짜기 노래 ”, “좋은 종자 가려내세 ”, 1950년대의 “자치주 성립 경축의 노래 ”, “처녀의 노래 ”, “고향산기슭에서 ”, “장백의 노래 ”, “고향생각 ”, “내 고향 금파도 ”, “안해의 노래 ”, “공산당과 모주석의 은덕일세 ”, “연변목가 ”, 1960년대의 “친선의 꽃 ” ,“ 첫 수확”, “이 벌에 풍년이 들면 ”,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 1970년대의 “고향길 ”, “선생님 들창가 지날 때마다 ”, “꽃같은 마음 ”, “황금나락 설레일 때 날 찾아오세요 ”, 1980년대의 “내 고향 오솔길 ”, “오래오래 앉으세요 ”, “수양버들 ”, “아, 산간의 봄은 좋아 ”, “추억의 노래 ”, “노래하며 살며는 젊어만 진다오 ”, “밀림은 푸른 바다 나는 갈매기 ”, “눈이 내린다 ”, “사랑은 영원히 ”, “빈털터리 ”, “동동타령 ”, 1990년대의 “교정의 종소리 ”, “청장고원 ”, “타향의 봄 ”, “타향의 달밤 ”, “장백의 폭포수야 ”, 그리고 2000년대의 “장백송 ”에 이르기까지 가요사 전반에 걸쳐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선택하기에 노력하였다.
≪우리 노래 100년에 깃든 이야기≫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말해주고있지만 일부의 경우 만들어진것일수도 있다. 어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이고 어느 정도 창작품인지는 독자 여러분들이 판명하시기를 바란다. 단 그것이 사실이든 창작이든간에 모두 잊어서는 아니될 이야기이고 이러한 이야기들이 노래와 함께 영원히 전해지기를 기원할따름이다.
2012년 2월 5일
저자로부터
.♣.
=================
◆ 표4의 글 ◆
《우리 노래 100년에 깃든 이야기》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이민시기(17세기초-1945년), 해방전쟁시기(1945-1949년),
새 중국 성립시기(1949-1966년), 문화혁명시기(1966-1976년),
개혁개방시기(1978년 -현재)를
겪어오면서의 수많은 이야기들이다.
본서는 바로 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선별해서 수집,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민시기의 “월광곡” “신흥무관학교 교가” “대성중학교 교가”
“전국공농대표대회 옹호의 노래” “연길감옥가” “눈물 젖은 두만강” “연안송”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 “자치주 성립 경축의 노래” “처녀의 노래”
“고향산기슭에서” “장백의 노래”…
그리고 2000년대의 “장백송”에 이르기까지
가요사 전반에 걸쳐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선택하기에 노력하였다.
.♣.
================= =================
첫댓글 석화시인이 추천도서를 올려주셨군요. 시인의 노래집이라 가사가 더 멋이 나지요.
봄이 온 한국인데 연변에도 곧 봄이 오겠지요.
좋은 계절에 약주야 꽃피듯 마시고 싶겠지만 오래 얼굴 볼려면 반쯤 줄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래요. 이곳 북국에도 봄이 아장아장 찾아오네요. 그댄 언제 오실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