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곳에서 누가복음 1장 46-55절
최근 비폭력대화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Zoom 독서모임은 매우 권장할 만한 모임 중에 하나인 거 같습니다. 인터넷공간이라도 서로의 대화가 깊어지면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것 이상의 깊이가 있습니다. 이제 2/3지점을 넘어서고 있는데 교회 내에서도 그렇고 앞으로 새신자가 오면 성경공부 한 다음에 꼭 필수과정으로 함께 읽고 싶은 책 중의 하나입니다. 목요일 오전반과 저녁반이 있는데 제가 참여하는 반은 오전반인데 함께 참여하는 분들의 크고 작은 삶의 변화이야기를 들으면서 크고 작은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 배우면서 깨달은 것 한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가 실수하든지 잘못을 하면서 대체적인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자기를 탓하든가 아니면 자신이 잘못하고도 상대를 탓하는 겁니다. “에이 바보같이 그런 것도 못하고, 뭐 항상 그렇치 뭐!” 이런 식으로 자기 비난이거나 “너 때문에 또 이렇게 됐잖아” 하면서 상대를 비난하기 일수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지적을 받거나 불편한 이야기를 들거나 문제가 일어나도 마찬가집니다. 자책을 하면서 자기 징벌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아니면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니가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 따위 행동을 하니까 당연히 내가 그랬지”하면서 상대를 비난하곤 합니다. 어떤 경우든 자책이 되었든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든 결국 누군가에게 윤리적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거고 결국 그런 일들이 반복이 되다보면 한편으로는 자기 비하, 학대로 발전에 우울증에 빠지거나 상대에 대한 비난과 공격이 심화되면서 결국은 관계가 폭력화되기 일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에게도 그렇고 타인에게도 그렇고 이렇게 강압적인 억압을 하는 방식이 생활화이 되다보면 결국은 자기 선택적인 주체적인 삶은 약화되고 어쩔 수 없이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비능동적으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어 결국 삶에 있어서 자발적 자기 즐거움의 에너지가 고갈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마셜은 그 때의 렌즈를 내가 했던 실수, 상대가 나에게 했던 말과 행동에 맞추지 말고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 도덕적/윤리적인 평가를 내리지 말고 그 이면에 내가 그리고 상대가 정말로 원하는 의도, 바램(욕구)이 뭔지에 렌즈를 맞추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지난 모임에서 했던 예기입니다. 저는 행동이 늘 빠릅니다. 저는 약속시간에는 10-20분전에 도착해야하고 그래서 늘 미리 준비하고 일찍 출발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늘 느립니다. 약속시간에는 딱 맞춰가야 하고 서둘러서 제가 일찍 준비해도 아내 때문에 늘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늦게 출발하고 그래서 이것 때문에 자주 싸웁니다. 그리고 그때그때 그 행동 때문에 왜 맨날 느리냐 왜 제때 출발하지 못하냐 비난하면서 싸우지만 지난 20년 동안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늘 일찍 준비해서 조바심을 내고 있고 아내는 늘 시간 다되어서 허둥지둥 출발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서 제가 정말로 바라는 그 바램이 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약속시간을 잘 지키는 것을 신뢰로 생각하더라구요. 저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좋은 관계가 안정이라고 생각하더라구요. 그래서 늘 관계를 잘 맺기 위해 시간도 잘 지키고 사람이야기도 잘 듣고 그러면서 살더라구요. 저는 아내가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는 저의 이런 바램을 귀히 여겨주었으면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의 행동 이면에 있는 바램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내는 대체적으로 나오면서 몸만 나오지를 않습니다. 가스불도 끄고 혹시라도 벌레꼬일까 설것이도 깨끗이 해놓고, 방에 불도 끄고, 코드들도 빼놓을 것들은 빼놓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늘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아내의 욕구안에는 관계의 평화와 안정만큼 존재의 기반을 안정하게 가져가고 싶은 욕구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것 자체가 무너지면 역시 삶의 근본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해보니 저의 이런 바램이나 아내의 이런 바램이 도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차원의 것들이 아니더라구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 행동을 놓고 왜 약속도 안지키냐고 매사에 늦어서 신뢰없는 사람을 만드냐고 싸우면 그건 관계에 표면만을 보면서 바람을 일으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로의 삶을 대하는 의도나 욕구가 그리 나쁜게 아니예요. 아내는 이것저것 허겁지겁 정리하고 나오면서 정말 우리가 없는 사이에도 큰 탈이 없도록 우리 존재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생각하니까 그동안의 맨날 밖에서 먼저 나와서 혼자 씩씩되었던 그 시간이 미안해지고 뭔가라도 함께 도와서 아내의 욕구를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렇게 나오면서 이런 저런 걸 같이 하니 결국 제 욕구가 채워져요 안채워져요. 그 욕구나 이면의 의도를 보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말만 가지고 지지고 볶고 싸워봤자 싸움만 더 커지고 삶과 관계만 더 망가지더라는 겁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황색등에 지나갔어요. 아내가 황색등은 서라는 신호지 지나가라는 신호가 아니잖아 하면서 버럭 화를 내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많아요. 갑자기 버럭 화를 내는 아내의 행동만을 보면 화가 나서 그럼 운전 니가 해! 그러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때의 아내의 저 밑바닥에는 어떤 바램이 있어요? 남편인 내가 안전하기를 바라는 거잖아요. 렌즈를 거기에 맞추면 화가 나지 않고 고마움이 느껴지는 겁니다.
아이가 동생을 막 때립니다. 그러면 단순히 도덕적 판단만을 내리면 “형이 동생을 때리면 못써! 그러는 게 아니야! 하면서 매사에 아이를 혼내게 되거나 가르치게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이야 듣겠지만 그러면 안돼, 나쁜 사람이야! 이런 식으로만 대하게 되면 결국은 아이는 외부에 의해 억압되고 저항감만 쌓이게 되고 결국 그것이 부모의 도덕적 통제아래 있을 때는 문제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으로 억압된 통제들은 터지게 되고 그것이 저항이나 반항이나 다양한 폭력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거죠.
그럴 때 형이 동생을 때렸을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물건을 함부로 하지 않거나 동생도 내 물건을 존중해주었으면 하는 그 어떤 이유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동생도 형의 물건을 함부로 탐했을 때는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형이 해서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자기도 성취해보고 싶은 강한 자기 성취의 욕구를 가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표면적인 모습을 도덕적으로 정죄하기에 앞서서 서로의 안에 있었던 절대 도적적으로 윤리적으로 정죄할 수 없는 차원의 그냥 사람이기 때문에 갖는 평범하고도 때로는 아름다운 근원적 욕구와 바램들을 들춰내주고 확인해 주고 그런 걸 상호간에 교환시키는데 에너지를 쏟는다면 우리는 관계를 위축시키고 억압하고 체벌하고 징벌하는 식이 아닌 서로가 가진 아름다운 삶의 바램들을 풍요롭게 활성화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마리아의 찬가는 예수님 인생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을 흩으시고 제왕을 끌어내리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는 세상입니다. 주린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 부한 사람을 빈손으로 보내시는 반전의 세상이요 뒤집힘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변두리에 있던 인생에 가장 중심부에 들어가십니다. 과부의 고통을 보았고 나그네의 설움을 보았고 여인의 통증을 보았습니다. 눈 먼 자의 외로움을 보았고 38년 동안 제자리걸음만 하고 살던 병자의 트라우마를 보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 인간이 아니라 그 내면 깊숙한 곳에서의 절망과 외로움 그리고 살아가고 싶은 삶의 바램과 그 그리움을 보았습니다. 수십 수천년이 지나도 예수가 저마다의 인생의 친구요 스승이요 동역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역시 삶의 깊은 그곳에서 때로는 위로자로 때로는 선생님으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인도자로 그분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나치 수용소 생존자인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쓴 빅터 프랭클 박사는 수용소 시절 자신이 손에 간직했던 출판되지 않은 원고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 결국은 다 빼앗겼지요. 평생의 작업이라 여기며 허탈해 하고 있는데 어느날 가스실로 먼저 간 어느 순교자의 너덜해진 옷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옷에서 죽은 사람이 자기와 똑같은 심정으로 숨겨두었던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안에는 “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의 하나님이신 주님, 주님은 한분이시다”라는 쉐마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펼쳐읽는 순간 생각을 적거나 옮기려 하지 말고 생각을 듣고 마음으로 새기며 살아내라는 계시로 받았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지극히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에서도 매순간을 의미있게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자신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삶의 근본적인 바램 - 삶의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내 의미있는 삶은, 보람된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그 음성을 들은 겁니다. 그래서 비로소 그는 수용소에서도 자기 삶을 듣고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며 살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 기억되지 않은 원고가 아니라 생생하게 기억되고 살아진 수용소에서의 삶을 후에 출간할 수 있었고 그것이 자신 인생의 최고의 작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힘들고 갇히고 때로는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일찌라도 매순간 의미있게 살아야 합니다. 이 시간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표면적 이유로 싸우지 말고 의도와 깊은 마음들(불안과 사랑)을 보면서 우리의 삶의 에너지를 보다 더 풍요롭게 하고 가치있게 하고 의미있게 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는 대림절의 한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