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로 짐작되는 암막에서 산도를 통해 세상에 나오는 아이의 시점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변에 들리는 소리는 산모의 절규에 가까운 집착과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는 의료진의 설명만이 들린다. “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 아이는 그렇게 태어난다. 제목인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말 그대로 주인공이 느끼는 두려움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인간은 피투 된 존재라고 스스로 원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타의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금 서있는 곳에 도달했다. 그렇기에 결정된 인생에 저항하는 것만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법이다. 안타깝게도 보는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라는 방향성은 부재했고, 어머니는 그의 삶을 조정을 넘어 조각하는 사람이었다. 불필요하다 싶은 것은 도려내고 필요하다 싶으면 붙여가는, 그 결과 중년의 보는 불안과 편집증을 안고 살아가고 어머니는 물과 같은 형태로 되었다. 어떤 모양도 될 수 있고, 없으면 죽을지도 모르고, 의식이자 종교가 되어 자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의 심리 치료사는 말하길 엄마가 죽길 바라는 마음과 걱정되는 마음이 공존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그 말은 즉, ‘엄마 문제(mommy issue)‘는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자, 넘어서야 할 과업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도입부가 지나고 보에게 벌어지는 모든 상황들은 비현실적으로 펼쳐진다. 현실의 불안을 이식한 것인지 밑바닥으로 치달은 정신을 밖으로 꺼내 놓은 건지 분간이 어렵다. 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아머니를 만나러 가야 하는 중년 남자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충격은 가혹하다. 우선 그의 아버지는 복상사로 돌아가셨다. 그러니 보의 탄생은 죽음과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섹스는 그에게 죽음을 동반하는 유죄에 해당하는 행위가 되었다. 보가 존재하는, 우리(관객)가 보는 세계는 어쩌면 그의 불안을 투영한 정신 속 일지도 모른다. 열쇠를 도둑맞은 단순한 사건에서 비롯된 일들은 도시의 공황상태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괴이한 형태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저택, 숲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유랑 극단, 어머니의 얼이 깃든 집으로 이어지고 그때마다 마주한 사건은 칼에 찔리고 차에 치이다 십 대의 자살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고 결국엔 참전 트라우마를 가진 거구에게 추격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6개의 장과 비명으로 통과하는 동안 이야기는 마치 의식을 따라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아리 애스터의 전작인 유전과 미드소마를 봐온 관객이라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감독이 가진 내면에 공포가 어디서 영화적으로 발현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이번 작품에서 머리가 없는 시신이 등장하는데 이는 이전 작품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왔다. 머리는 존재의 정체성을 증명한다. 몸에서 머리가 떨어져 간 자리에 무엇을 채우는 가를 고민했을 때 아리 애스터가 채우려 했던 것은 가족과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되고 반복되는 모든 행위들이었다. 그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이어지는 것들이 외부의 시선으로 보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묻고 있었던 것이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 아리 애스터가 마주한 불안과 공포는 프레임 안에서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과거와 미래라는 테제다. 죽음을 방관하는 남자, 분수에서 장난감 배를 가지고 놀다가 엄마에게 끌려가는 아이, 나체로 활보하는 사람, 보의 집에 숨었다가 욕조로 떨어지는 노숙자까지 모든 상황이 그의 인생을 함축하고 예언처럼 암시하고 있다. 이는 보가 보게 되는 2개의 직소퍼즐은 어떻게 해도 정해진 모양으로 나올 게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한다.
유랑 극단의 연극을 보며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경험하는 보의 상상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을 만나고 역경에 부딪히고 다시 돌아온다. 연극 속 여정을 통해 선험적으로 주입된 원죄를 받아들이면 스스로 구원을 얻을 것이란 믿음 역시 아리 애스터는 한순간에 박살을 낸다. 이는 프레임 안에서 전해지는 사실은 결코 현실이 아니고 당신이 보지 못했던 현실의 이면을 비출 뿐이라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물 역시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뤄진다. 모나와 보의 성인 와서만, 그들의 고향인 와서튼에서 와서(Wasser)는 독일어로 물을 뜻하기도 하고 영화의 시작이 양수로부터 밖으로 나와 마지막은 물 속으로 가라 앉으며 끝을 맺는다. 물속에서 만들어진 인생은 결국 물처럼 흐르다. 정해진 곳으로 흐르고 다시 잠잠해진다. 아리 애스터는 그게 운명이니 받아들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목도한 바를 영화라는 미학적 장치로 발현한다. 예술은 세계라는 재료로 만들어진다. 정해진 형태는 없다. 물질이냐 비물질이냐, 정신이나 사상 같은 추상적인 것들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흔히 우리는 예술을 창조라고 오해들을 하지만 사실 발견에 가까운 행위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낡은 곳에 먼지를 털어내고 인지하지 못했던 혹은 그러려고 하지 않았던 부분을 주목 함으로써 진실이나 사실이라고 알고 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아리애스터는 영화 예술이라는 실험을 통해 순환의 역설에 갇힌 인간을 통해 우리는 왜 이 빌어먹을 세상에 던져진 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고 있는지 묻고 있다. 이제 그의 영화는 프로이트의 물음을 가져와 카프카와 단테를 경유해 오비디우스가 그리던 풍경을 거울에 담아 비추려 한다. 반복과 절망으로 점철된 이 세계에서 당신만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해주길, 어쩌면 아리애스터의 코미디는 그런 허망함의 방어 기재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첫댓글 아리 애스터 감독의 유전이나 미드소마를 보지 않은 저로서는
소대가리님의 리뷰덕에 조금이나마 맛이라도 볼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이 감독의 영화를 보게 된다면
무서울거라는 두려움을 이겨내게 하는 리뷰덕이 아닐까 싶네요. ㅎㅎ
호아킨 피닉스가 보여줄 보의 모습도 궁금해지긴 하네요.
글 잘 읽고 갑니다~~~
영화 가이드같은 맛깔나는 리뷰 잘봤습니다 극장내려가기전에 봐야겠네요
소대님 따라 잡기.
이번 주말에 영화 보고 와서 글 읽을게요.
매주 한편씩 소대님이 올려주는 글이 제겐 가이드 입니다. 마치 나인틴에서 다음주 영화 선별해서 알려 주던 그때처럼.
ㅎㅎㅎㅎ 영화를 볼마음이 있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영화를 미처 못봤을땐 개소리까지 듣고 끊었죠.
영화 본편 이야기는 듣지 않고 남겨 뒀다 영화를 보고서야 선물 개봉하는 기쁜 마음으로 들었었죠.
지난주 이번주 그 때 그 마음으로 설레이면서 주말 기다립니다.
와 같은 영화를 보고 이렇게 다른 감상이라니... 리뷰를 읽고 나니 영화를 또보고 싶어지네요
보고 왔습니다. 제가 많이 피곤했다는 걸 알았네요. 숲 속 연극 끄트머리 쯤에 에어컨으로 체온이 내려갈대로 내려가서 잠을 깼죠.
이동진씨는 카프카의 태어남에 대한 망설임이란 말이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저는 최근에 읽은 카프카의 단편 심판이 떠올랐어요. 마지막을 보며. 저 아들도 엄마가 싫었겠지만. 저 검사?가 말한 게 다 사실이면 엄마도 저 아들이 싫었겠다 싶었어요. 엄마는 꽤나 능력자 같은 데 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아들내미가 싫었을지도. 핸디캡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쾌녀' 엄마가 복장터지기 딱 좋은아들의 모습 그대로.
케빈의 모든 것에서 엄마가 그랬듯. 나름의 최선을 다한 인풋이 나름 만족스런 아웃풋으로 나오진 않을 수 있으니. 이래저래 다시한번 저출생이 답인가라는 이상한 결론을 끄적이고 갑니다.
일단 저는 1부 3부 매우 좋았고요 엄니의 설명충모드부터 싫었어요ㅋㅋ
유전으로 제작사 배부려주고
미드소마로 대충 제작비 회수해드렸으니
내가 찍고 싶은거 한편 찍고 갈께 이런 심뽀?
담 작품 기다려야죠 또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