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의 시선이 한 소녀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문구점에서 세심하게 물건을 고르고 있다. 모양과 색상, 손에 잡히는 질감과 사용감까지 고려해 이것저것 살펴보고 만져본다. 고심 끝에 물건을 고르고 포장을 한 후에도 어떤 리본으로 장식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금색 리본을 선택하지만 집에 도착하는 순간 얼른 달려가 분홍색으로 바꿔줄 것을 청한다. 명은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아이의 시선은 담임인 선생님에게 가있다. 지각을 밥 먹듯이 하고 푼수처럼 보이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반 아이들과 소통하려 하고 한다. 12살 소녀의 눈에는 세련되고 근사해 보이는 선생님이 너무 멋지다. 명은에게 그런 마음을 품게 한 이들은 가족이다. 동경하는 대상과는 너무도 멀게 만 느껴지는 존재들, 속물적이고 억척스러운 식구들이 너무 부끄러웠고 부정하고 싶기에 감추려고 한다. <비밀의 언덕>은 초라하고 창피한 가족과 닮고싶은 이상 사이에서 성장하는 5학년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와 다르지 않은 어른과 어른과 다르지 않았을 아이들, 글쓰기처럼 거짓과 진실이 공존하는, 그때와 다르지 않을 지금을 상기하게 하는 마법 같은 순간으로 잠시 데려다 놓는다.
영화 초반에 선물을 고르고 포장을 하는 과정을 다룬 시퀀스는 동경하는 선생님을 향한 명은의 마음인 동시에 자신을 어떻게 포장해야만 쓸모 있고 돋보이는 사람으로 비칠까 하는 소녀의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90년대 학교는 학생을 알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가정환경조사서라는 폭력적인 종이를 드밀었다. 탁월한 글쟁이였던 명은은 선생님 탁상에 놓인 종이를 보고 제지 회사에 다니는 아빠와 가정주부인 엄마를 만들어낸다.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진짜 가족은 비밀 속에 묻어두고 거짓말을 재료로 새로운 가족을 꾸리더니 돌아가신 할머니마저 살아계신 걸로 하게 된다. 명은은 반자이 되어 교실의 리더로,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로 인정도 받고 싶다. 거짓말이라는 얇은 배리어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알이 된다. 소설 데미안 속 문장처럼 스스로 깨고 나와야만 한다. 알 안에서 진짜 자신을 반추하며 성장하던 명은은 전학생의 등장과 함께 진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배우게 된다.
명은이 만든 알에 충격을 가하는 건 서울에서 전학을 온 이란성쌍둥이(라고 알려진) 하얀과 혜진이었다. 어차피 어울리지 못한다는 듯 자신들끼리 붙어 다니고 수업 시간에도 자신들은 아빠가 없고 엄마는 아가씨집을 한다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덤덤하게 전한다. 이런 화법은 글을 쓰는 작법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목도하고 느낀 바를 쓰는 것이 쌍둥이의 글쓰기가 된다. 교내에 평화 글쓰기대회가 열리고 명은은 통일 전망대에 답사까지 다녀와 한반도 평화라는 거대 담론으로 글을 쓰지만 우수상에 그치고 최우수상은 전학 온 쌍둥이의 몫이었다. 그들은 전학을 다니며 느꼈던 불안으로 시작해 무엇이 평화인지 묻는 진솔하고 담백한 글을 썼다. 외부를 관찰하고 현상을 분석한 글과 자기 안에서 길러온 글은 그 무게가 다르다. 쌍둥이와 친해진 명은은 글을 준비하는 과정과 방식이 궁금하다. 그들은 느낀 바를 최대한 꾸미지 않고 진솔하게 쓰는 거라 말해준다. 세상은 아이들의 솔직하고 담백하게 쓴 글이 좋은 것이라 말하지만 영화는 어떤 가치 판단 없이 그저 명은이 겪는 성장 과정을 그저 따라간다.
명은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오빠와 무관심한 부모님을 떠나 삼촌과 할아버지에게 의탁한다. 떨어져 있는 동안 “손녀로부터 온 편지”라는 글을 통해 물리적으로 연결된 가족과 자신을 개관화 해서 보기 시작한다. 이 글을 통해 자신이 만든 세계의 비밀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꺼내면서 감춰뒀던 가족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영화는 글에 담긴 내용을 따라가는 대신 명은의 시야에서 비치던 가족이라는 세계의 이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고단함을 토로할 상대가 없는 엄마와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 자격지심을 가지게 된 아빠, 그런 그들에게 효자인 척 하지만 뒤에서 욕을 하는 오빠까지 누군가를 도울 마음도, 환경에 대한 관심도 없는 나와는 너무도 다른 가족 때문에 혼란스러운 심경을 그대로 글은 성원 시에서 주최하는 가정의 달 기념 글쓰기 대회에 출품이 되고 대상 수상자로 선정이 된다.
명은은 세상이 환호는 글은 자신을 솔직하고 과감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걸 알았지만 과연 그게 옳은 것일까라는 고민을 시작한다. 가족이 너무도 이해가 안 되지만 외할아버지와 삼촌 덕분에 유지되던 자신의 세계가 자신이 쓴 글 때문에 무너지고 가족들은 상처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지금 것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글을 쓰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던 명은은 이제 내면에 숨겨둔 가족이 아닌 자신의 품이었던 그들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 대상을 포기하겠다고 하는 명은과 연유를 묻는 선생님의 면담으로 이어지고 그제야 속내를 털어놓게 된다. “제 솔직한 마음 때문에 가족이 상처를 입을 까봐 겁나요.”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명은이는 가족을 정말 사랑하는구나.”라고 묻는다. 이에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는 명은에게 선생님은 억지로 솔직해지는 것보다 거짓말이라도 상대를 배려하고 헤아리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건넨다.
사춘기 무렵의 대부분 아이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거부하면서 스스로를 찾으려 한다. 명은이라는 아이 역시 처음 본 누군가를 동경하고 익숙한 이들을 외면하면서 성장하려 했다. 거짓말로 껍질 속에서 방황하다 진짜 현실로 알을 깨고 나오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 비밀의 언덕 >은 소녀의 성장담에서 가지를 뻗어 글이라는 예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함께 보여준다. 아이가 자라고 글이 완성이 되는 모든 과정에는 혼자서 견뎌야 하는 고뇌와 함께 만들어가는 소통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비단 12살 아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사실 담임 선생님의 말에 모두 녹아있다. 거짓말일지라도 누군가를 헤아리는 마음이 담겼다면 반드시 솔직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누구도 혼자서 뭐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른도 아이도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서로에게 필요한 이들이다.
대상을 포기한 명은은 원고를 들고 마을 뒷산 언덕을 찾는다. 가장 진솔하고 가감이 없었던 글을 거기에 묻어둔다. 생각해 보면 그 글을 쓰면서 드러냈던 건 가족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면이 맨얼굴로 웃을 수 있게 되고 6학년이 된 명은은 다시 가정환경조사서를 받는다. 이제는 부모님의 직업도 인생도 부끄럽지 않기에 또박또박 써내려 간다. 한 단계 성장한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며 막을 내려도 좋겠지만 영화는 도식적인 엔딩 대신 다른 선택을 한다. 6학년 담임 선생님은 조사서를 뒤집어 백지를 향하도록 아이들에게 주문을 한다. 그러면서 흰 종이에 자신에 관해 자유롭게 쓰도록 한다. 어떤 환경에 놓인 존재가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질 자신에 대해 꿈을 펼치도록 하얀 캔버스를 마련해 준 셈이다. 영화는 신나 하는 명은의 모습을 보여줄 뿐 거기에 무엇을 쓰는지 비추지 않는다. 그저 해맑은 얼굴에서 희망을 볼 뿐이다.
첫댓글 누가 이렇게 한 줄 평 하던데..
백지 속에 피어나는 진실함이 작가를 만든다
딱 맞는 평인듯 합니다.
상영관이 없어 보기는 힘들겠지만
꼭 기억하고 있다가 기회되면 보겠습니다.
문득 나와 내 주변을 객관적으로
보고, 그에 대한 솔직함이든 배려의 포장이든 자신만의 비밀의 언덕 하나쯤은 있어야 겠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영화를 보고싶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소대가리님은 어떤 언덕 하나 갖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영화 아직 못봤는데, 댓글 먼저 달아요. ^^
영화 보고 다시 올께용 ~ ^^
명은이도 이해가고ㅠ 혜진이도 이해가고ㅠ
엄마도 이해가고ㅠ 담임선생님도 이해가고ㅠ
삼촌마저 이해가는ㅠ
소선생님 리뷰보니 봤던 영화가 다시 생각이 나네요 주말에 보이즈 어프레이드 볼까 했는데
비밀의 언덕 다시바야 하나 고민이네요
영화를 보고싶어지게 하는 리뷰네요
남들은 단순하게 악하고 자신은 복잡하게 선하다고 생각한다는 신형철평론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명은이 조차도 영악함이 있지요. 모든 것이 단순하지 않고 그 누구도 옳지만도 않아서 좋았습니다. 참고 볼 수만 있다면 다들 감동받을텐데 ㅠ.ㅠ
오늘 저녁 극장에서 내리기전에 관람하고 왔습니다.
명은이의 성장 과정, 어린여자 아이의 마음을 어찌 이렇게 잘 표현 할수 있을까? 감독의 경험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전개도, 작화도 독립영화라고 하기엔 너무 매끄럽게 잘 짜여진 영화 였습니다.
여담이지만, 제 아들도 초등 저학년일때 엄마가 부끄럽다 했습니다. 옆에 같이 길을 가고 싶지 않다고 ㅋㅋㅋㅋ 좁은 왕복 1차선 도로, 카페골목에서 횡단 보도가 아닌곳으로 무단횡단 한번 했다가 아들에게서 버림 받았습니다. 옆에 오지도 말라고 하더군요.
1994년 벌새의 중학생 은희
1996년 초등학생 명은
2020년 남매의 여름밤 옥주와 동주
멋진 데뷔작을 낸 세 감독님들은 빨리 다음 작품 내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