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놀이의 혁신이었다. 아이들이 인형으로 할 수 있는 건 미래에 엄마를 양성하기 위한 조기 교육으로 부터였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달래는 일들을 연습하던 인형의 역할은 ‘바비’의 등장과 함께 달라지게 된다. 영화에선 이 역사적인 순간을 스탠리 큐브릭의 역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을 빌려와 표현한다. 앞치마를 입고 가지고 놀던 아이기 인형을 박살내고 비현실적인 꿈을 가지게 해 준 바비를 만나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시간이 흘러 현실세계에선 많은 변화를 겪는다. 남성의 미적 감각에 기대는 왜곡된 시선의 산물, 획일적이고 몰개성에 백인우월주의라는 비판까지 나오게 된다. 제작사인 마텔은 이런 여론을 반영해 다양한 바비를 탄생시킨다. 인종과 직업을 가지고 “바비는 뭐든 할 수 있다. “(Barbie can be anything) 슬로건까지 만들어지며 바비의 세계는 안온하고 완전해진다.
<바비>에서 바비랜드는 여성들의 이상향을 그려내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와 문화, 언론과 경제까지 여성들이 주요 보직을 차지하는 우먼파워가 통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정말 여성들이 그런 세상을 원하 느는 걸까? 영화 속에서 현실과 바비랜드는 전혀 다른 세계로 묘사된다. 인형을 가지고 노는 당사자와 바비랜드의 바비들은 느슨하게 연결이 되어있을 뿐 적극적으로 통하는 부분은 없다. 우먼파워로 돌아가는 세상 역시 마텔사 사장의 마케팅에 산물일 뿐이다. 현실의 부조리를 해소해주는 이상을 보여주고 돈을 버는 수단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비랜드는 늘 즐겁다. 똑같은 일상을 반복적으로 행하고 모든 것은 자연스럽다. 바비들이 주도해 모든 것이 정해지고 유지된다. 켄은 그 속에서 바비의 관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려 한다. 밤이면 파티가 열리고 매일이 신나는 일상이지만 균열은 미묘한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갑자기 바비는 머릿속에서 죽음에 관한 걱정이 떠오른다.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하려 하지만 이상한 일을 계속된다. 생전에 없던 구취가 나고 허벅지엔 셀룰라이트가 생긴다. 언제나 하이힐에 최적화되어있던 발은 평발이 되어있다. 문제를 자각한 바비는 외딴 성에 홀로 사는 이상한 바비를 만나 해결할 방법을 듣게 된다. 현실 세계로 가서 너를 갖고 있는 인형의 주인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바비랜드를 떠나 현실세계로 향하는 바비는 갑자기 나타나 동행을 자처하는 켄과 함께 LA로 가게 된다. 인간들이 사는 세계에 당도한 그들은 지금 것 경험하지 못한 낯선 일들을 겪는다. 휘파람과 무시하는듯한 웃음들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언사들까지, 바비는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바비>는 이렇게 여성친화적 세계에 있던 인물을 현실로 데려와 목격자이자 악질적인 플러팅의 당사자가 되면 어떻게 주체성을 잃어가는지 보여준다. 반면 켄은 또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받는다. 세상이 온통 남자들로 가득하다. 지폐에도 건물 외벽에도 온통 남자로 가득하고 주도적 역할을 남성이 한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지금것 아무것도 아닌 체로 살았던 켄은 가부장제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알았고 서둘러 바비랜드로 돌아가 켄들에게 설파하고 싶다.
바비가 우여곡절을 거쳐 자신을 갖고 있던 글로리아를 만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이 바비랜드는 켄이 새로 전파한 가부장제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켄들은 어설픈 터프가이 흉내를 내고 바비들은 멋있다고 환호한다. 심지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바비는 모든 영광을 켄에게 돌리며 자신의 성과를 축소하기까지 한다. 바비랜드는 이제 켄랜드로 변모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간 세계와 바비랜드의 무너진 경계를 바로잡기 위해 돌아온 바비와 따라온 글로리아와 사샤는 충격을 받는다. 바비랜드에서 더 이상 바비는 무엇이 되는 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된다. 영화는 여기서 글로리아를 내세워 무엇이 든 될 수 있다는 말이 가진 의미를 전복시킨다. 성과를 통해 지위와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타인의 입장이 되어 봄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체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글로리아는 능동성과 독립성을 잃은 바비들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자각하게 끔 도와준다. 그 순간 그들 사이에선 인형과 인간이라는 경계는 옅어지고 연대하는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를 만들어 낸다. 그 과정에서 함께 하게 된 글로리아의 딸 사샤 역시 바비가 여성의 사회적 지휘를 퇴보시켰다는 생각으로 분노의 대상을 찾는 대신 스스로 사고하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것은 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깥세상에서 가져온 가부장제 달콤했다. 바비들이 만든 질서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닌 내가 만든 새로운 질서에 바비를 들여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결국 바비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의 또 다른 발현이었다. 켄은 말한다. ”바비, 나는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우리는 너희들의 관심으로 살아가. “ 그러자 바비는 켄에게 “이제 켄은 켄으로써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고 답한다.
저 대화 속에는 그레타 거윅이 <바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녹아있다고 본다. 영화 속에서 무너진 건 완전무결하다고 믿었던 페미니즘과 새로운 대안처럼 제시한 가부장제였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을 때 다시 떠올리는 것은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다. 기존에 가지고 놀던 인형을 깨부수던 아이들은 어쩌면 무조건 맞다고 주장하는 기존의 질서 인지도 모르겠다. 바비랜드의 바비들은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지위와 명성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들은 경험을 거치며 성장했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마땅한 이가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여전히 그들은 바비는 바비고 켄은 켄이고 앨런은 앨런이다. 하지만 어떤 바비도, 어떤 켄도, 어떤 앨런도 될 수 있다. 변화의 가능성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첫댓글 우왕!! 나 첫댓글 먹었어요!!!
영화를 아직 못봐서요
보고나서 후기 남길께요
그레타 거윅감독 오랜 팬입니다
어떤 작품이 먼저였나 생각해보니 2008년작 밤과주말이었네요 감독과 공동각본과 주연을 겸했던 독립영화죠 특별전에서 봤어요
프란시스 하로 빵 뜨고
노암 바움백과의 좋은 조합 흐뭇하게 보고 있었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영화 무척 실망했어요..
주제에 비해 장치가 너무 걸리적거리더라구요.
마고로비는 그렇다치고 라이언 고슬링 오마이갓ㅠ
이야기를 돌아돌아 주제로 가져오는것도 지나치고
설정들도 지나치고 연기들도 지나치고ㅋㅋㅋ
저는 그랬습니다..
담 작품기다려 봐야죠..
이제야 영화보고 소대가리님 글 읽어보네요 ^^ 저는 기대없이 봐서 그런지 무척 재밌게봤어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