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뭉술하게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어야
R.C. 스프로울의 『기도하면 정말 달라질까?』를 읽으면서 기도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새로 배웠다. 역시 좋은 선생님의 가르침은 믿음과 확신을 주고 용기를 준다. 그런데 간구에 관한 설명 중에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두루뭉술하게 기도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대하여 읽고 나서 많이 묵상하고, 다른 것들로 그 생각을 이어갔다. 우선 설명 부분을 들어보기로 한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이따금 좌절하는 까닭이 있다. 중요한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1. 두루뭉술하게 기도한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같이 두루뭉술하다면, 분명하고 확실한 기도 응답이 주는 짜릿한 기쁨을 체험하기 어렵다. 우리가 하나님께 “세상 모든 사람들을 축복해 주세요!”라거나 “우리 지역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구체적으로 응답되는 것을 “보기” 어렵다. 폭넓게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두루뭉술하면 그 어느 기도도 구체적으로 똑 부러지게 적용되지 않는다.
2. 하나님과 전쟁 중이다. 3. 조급해 한다. 4. 기억력이 짧다.
R.C. 스프로울, 『기도하면 정말 달라질까?』, 전의우 옮김, 89-90.
특히 대표기도를 할 때에 제대로 기도에 대하여 배우고 하는 사람들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그와 비슷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탁구장에 가서 탁구를 치고, 파크골프장에 가서 파크골프도 치는 나의 경험으로는 항상 처음 시작할 때 상당한 기간 이론과 함께 실습을 계속하면서 기본기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돈을 내면서 레슨을 받는 사람도 많이 있다. 탁구나 테니스의 경우를 보면 상당한 수준에 오른 사람도 계속 레슨을 받으면서 실력을 향상하려고 힘쓴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이 치는 것을 보면서 흉내내어 치라고 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기도나 예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얼마나 될까? 어느 교회든지 주일성수나 예배나 성례를 가볍게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주일성수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합당한 예배인지, 어떻게 성례에 참여해야 마땅한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을까 궁금하다.
교회에는 늘 새로운 사람도 더해지고, 어린 자녀들이 자라나기도 하므로 주기적으로 신앙의 기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지라도 긴장이 풀어지고 습관적인 교회생활을 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새롭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예배에 대하여서 자세히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배에 대하여 총론적인 이론만 아니라 예배식의 각 요소(묵도/찬송/신앙고백/성시교독/기도/설교/헌상/축도 등)에 대하여 자세히 그 의미와 교인의 자세와 주의사항을 가르치고, 예배의 준비, 복장, 출석 시간, 자녀들 단속 등의 외부적인 것까지 가끔 짚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례에 대하여서도 전 교인들에게 반복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례는 드물게 베풀지만 성찬식은 한 해에 몇 번은 가지기 때문에 성찬의 의미와 참여하는 자의 자세를 바르게 알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혁교회에서는 장로의 중요한 역할이 성찬 전에 교인들을 심방하고 성찬에 참여할 만한지 아닌지를 살피는 것이라고 배운 적이 있다.
바울 사도가 말세에 일어날 일을 말씀할 때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는 말씀도 했다. 과연 우리 시대에 구체적으로 바른 것을 배우지 못하고 두루뭉술하게 교회 생활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흉내낼 수 있지만 그들의 삶에서 경건의 능력을 나타낼 수는 없다.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할 때에 모든 사람은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주관적인 접근을 하는 일이 흔하기 때문에 왜곡과 오해가 생길 위험이 많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과 함께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가르치면서 바른 성경 해석을 위한 관점을 갖도록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야 하며, 나아가 『벨직 신앙고백서』와 『도르트 신조』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두루뭉술하게 배우고 교회 생활만 하는 사람은 이단들의 공격에 쉽게 무너진다. 그러나 성경과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구체적으로 배운 사람은 이단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분별할 힘과 물리칠 힘이 있기 때문에 이단에 대하여 오히려 바른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
성령충만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보면 이런 것을 잘 알 수 있다. 에베소서 5장과 6장에서 사도는 성령충만에 대하여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일반적인 생활을 말하고 나서(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피차 복종하는 것에 대하여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의 경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교회에서 늘 성령충만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처럼 구체적인 가르침을 함께 알려주지 않으면 교인들은 두루뭉술한 교회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같이 두루뭉술하다면, 분명하고 확실한 기도 응답이 주는 짜릿한 기쁨을 체험하기 어렵다고 한 것처럼 예배나 성례나 은혜의 수단에 대해서 두루뭉술하다면 분명한 기독교 신앙이 주는 구원의 즐거움을 체험하기 어렵고, 확신을 가지고 증인의 삶을 살기도 어렵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분들은 항상 새로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자라나는 자녀들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기본이 되고 핵심이 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8)는 안심의 고백을 하며,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9)는 말씀에 순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