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전 반핵의 기수, 잭슨 브라운
이제 공연은 끝나고 좌석은 텅 비었으니 / 인부들한테 무대를 치우라고 해요 / 인부들은 제일 먼저 왔다가 / 마지막에 떠나는 사람들 /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 그들이 / 다음 공연 도시에 무대를 설치하겠죠 / 오늘 밤 관중들은 공연을 열광적으로 만들어 주었어요 / 밴드는 버스에 오르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네요 / 버스 안에는 컨트리 웨스턴, 그리고 R&B가 울려 퍼지고 / 장거리를 달려가는 동안 사랑하는 이를 생각할 시간도 많이 있지만 / 공연하는 시간은 왜 그렇게 짧게만 느껴지는 걸까요? (The Load-out/Stay 중에서)
지난 70년대 미국의 대표적 반전가수중의 하나로 꼽히던 잭슨 브라운(Jackson Browne/73)은 미국의 정치적 부조리에 관한 저항적 신념을 지닌 포크 아티스트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48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미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세 살 무렵 미국으로 귀국하는 양친을 따라 캘리포니아에 정착, 성장기 대부분을 서부지역에서 보낸 탓에 웨스트코스트(미국 서해안지역)풍의 포크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후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니티그리티 더트밴드(Nitty Gritty Dirt Band) 등을 거치면서 음악활동을 해왔다. (이후 더트밴드는 80년대 초반 An American Dream의 히트로 유명해졌다.)
60년대 당시 베트남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거대 미국의 불의(不義)에 염증을 느낀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포크음악의 대부 피트 시거나 밥 딜런, 조안 바에즈 등 대부분의 대형 포크가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이나 핵문제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들을 작곡하면서 자신만의 음악적 정체성을 유지해 나갔다.
70년대 초반에 이르러 활동무대를 L.A로 옮긴 그는 베트남전 종전에 따른 시대의 정서가 변화함에 따라 저항성이 가미된 자신의 작품이 팬들로부터 점차 외면당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자 이러한 프로테스트 스타일을 접고 그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조니 미첼이나 제임스 테일러, 주디 콜린즈 등과 같은 개인적이고도 낭만적 주제를 담은 서정적 스타일의 포크를 다루기 시작했다.
작곡가로 먼저 이름이 알려지던 이 시기에 자니 리버스나 톰 러시, 린다 론스테트 등의 유명가수들이 잭슨 브라운의 작품을 받아 취입했는데, 특히 웨스트코스트 컨트리 록 사운드를 구사하며 인기가도를 달리던 이글스의 리더이자 친구인 글렌 프레이(Glenn Frey)와 함께 작업한 Take it Easy가 톱10에 오르면서 중견 밴드 이글스로 하여금 정상의 자리로 도약하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서던록 그룹 EAGLES의 리더 글렌 프레이(Glenn Frey). 돈 헨리와 함께 EAGLES의 영원한 리더로 고난과 영광의 시간을
보냈던 그는 지난 2016년 지병 악화로 인해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밤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었다.
72년에 이르러 데뷔앨범 Jackson Browne을 발표하면서 미국 팝 무대에 등장했지만, 앨범에 실린 Doctor my eyes가 싱글차트 8위에 올랐을 뿐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잭슨 브라운의 음악적 취향은 스튜디오 안에서 온갖 기교를 섞어 녹음한 음반이 잘 팔리기만을 기대하고 앉아있는 가수들과 거리가 멀었다.
자신이 직접 무대에 올라 청중들과 소통하고 연주하는 라이브 무대의 생동감에 매력을 느꼈던 잭슨 브라운은 두 번째 앨범 For Everyman의 발표를 계기로 전미 순회공연을 계속하면서 이 도시 저 도시로 이동하며 스탭들과 함께 나누는 인간적 애환과 인생의 깊고 어두운 심연에서나 건져 올릴 수 있는 감성적 노랫말로 특히 미국의 지성 층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는 동시에 연주 실력을 제대로 갖춘 대형 라이브 가수로써의 면모를 지속적으로 부각시켜 나갔다.
75년 잭슨 브라운의 음악생활을 뒤흔드는 불운이 닥쳐왔다. 아내 필리스 메이저가 어린 아들 하나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주변에서는 음악활동에 빠져 가정을 등한시 했다는 비난론과 함께 필리스의 죽음은 잭슨의 음악활동과 관계가 없는 개인적 문제였다는 등의 옹호론이 첨예하게 맞섰다.
공연장에서 아내의 자살소식을 들은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어 진행 중이었던 앨범 Pretender의 작업을 강행했다. 오히려 잭슨 브라운의 장모 낸시가 딸이 살아있을 때 써둔 일기장을 잭슨에게 건네주었고, 그는 아내가 남긴 내용을 가사로 한 Here Come Those Tears Again을 Pretender 앨범에 담아 발표함으로써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함께 애석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78년 잭슨 브라운의 음악인생을 만개시킨 다섯 번째 앨범 Running on Empty(텅 빈 도로의 질주)가 발매되었다. 자동차의 왕래가 뜸해 비어있는 도로를 배경으로 드럼 세트가 놓여있는 그림이 실린 갈색 톤의 이 앨범은 주로 라이브 스테이지나 달리는 버스 안, 시골의 모텔방 등에서 녹음된 내용으로 기획되었는데, 여기에 실린 타이틀 곡 Running on Empty와 The Load-Out/Stay 접속곡이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자 한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이 앨범과 더불어 잭슨 브라운의 이전 음반들까지 수입되는 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 앨범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민요가수이자 연주자로 유명한 데이빗 린들리(David Lindley)와 공동으로 작업했는데, 타이틀 곡인 Running on Empty와 The Load-Out/Stay는 워싱턴 근교의 대형 숲속 공연장으로 유명한 메리웨더 포스트 파빌리언에서 가진 실황을 레코딩한 곡으로, 경쾌하고도 흥겨운, 그러나 왠지 모를 슬픔의 그림자도 함께 느껴지는 컨트리 록 사운드 스타일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민요가수이자 기타리스트인 데이빗 린들리(David Lindley).
잭슨 브라운과 절친인 그는 두 사람이 낸 듀엣앨범도 있을 정도다.
1977년 대규모로 치러진 전미 순회공연을 마친 잭슨 브라운은 자신의 공연을 위해 수고했던 스태프들과 운전기사, 짐꾼, 백 보컬, 엔지니어 등 많은 사람들과 애환을 나누며 경험했던 기억을 한 곳에 모아 발매한 컨셉트 앨범 Running on Empty의 끝자락에 담긴 The Load-Out/Stay는 앨범이 담고 있는, 즉 길(Road)이라는 주제의 축약판이었다. 따라서 수려한 전자 오르간의 음색에 담긴 블루지 필링은 아내의 자살이 남긴 어두운 그림자가 아직 잭슨 브라운의 가슴에 여전히 남아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특히 데이빗 린들리가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 이 곡은 잭슨 브라운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세션의 연주, 간주곡 사이에 등장하는 데이빗 린들리의 고 옥타브 팔세토 고음창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지성팬들의 절대적 인기를 누렸다. 이 앨범의 대대적 성공으로 인해 잭슨 브라운은 상업적 성공도 뒤따랐지만 특히 웨스트 코스트(이글스처럼 미국 서해안 지방색이 가미된 노래풍) 컨트리 로커로서의 확고한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라이선스로 제작된 Running on Empty 음반에서는 The road와 Cocaine 등 두 곡이 당시 문공위 사전심의에 걸려 삭제되었고 방송금지로 묶였는데, 이 곡들은 제목과 내용에서 각각 코카인이라는 단어가 문제가 되었으니 마약과 관련된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를 강제로 삭제해 비정상적 음반을 만들도록 한 군사정권의 의식이 얼마나 저열한 수준이었으며,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가 하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어쨌든 이러한 여세를 몰아 80년에 발표한 앨범 Hold on은 미국 빌보드 차트 앨범부문 정상에 올랐는데, 이러한 성적은 음악생활을 하는 동안 처음 경험해 보는 고무적인 결과였다.
82년 영화음악앨범 Fast Times at Ridgemont High는 차트 7위까지 올랐으며, 여기에 실린 Somebody's Baby 가 또다시 히트하는 등 잭슨 브라운은 최대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고, 이러한 호기를 맞아 그는 한동안 거리를 두었던 정치 사회적 이슈를 다시 앨범에 담기 시작하는데, 특히 핵에너지 사용을 반대하는 내용의 노래를 만들어 환경 시민운동 단체들의 큰 호응을 얻자 이에 부응해 83년 Lawyers in Love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의 내용 절반은 사회적 부조리와 풍자를 담은 것으로, Tender is the Night, For a Rocker 등이 히트하자 86년에 이르러 저항적 메시지를 더한 앨범 Lives in the Balance를 발표하자 이 앨범이 자그마치 6개월 동안 차트에 머무르면서 골드디스크를 기록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무거운 프로테스트(Protest)한 색채가 반복되자 점차 피곤함을 느낀 지지층들이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자가 정말 좋아하는 반전 반핵 개념 가수인 잭슨 브라운. 2018 가장 최근의 모습이다.
잭슨 브라운의 지지층은 대부분 고학력 중산층을 중심으로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고, 미국이 가진 정치사회적 부조리가 점차 감소함에 따라 지지층들은 자신들의 지성을 자극할만한 새로운 메시지를 기대하게 된 것이다.
잭슨 브라운은 이러한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팬들의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앨범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Lives in the Balance 앨범의 히트 이후 앨범 작업을 한시적으로 중단하고 여자 친구와도 결별하는 등 새로운 앨범의 발매 없이 몇 년의 시간을 독서와 여행과 사색으로 보내면서 미국의 팝 무대에서는 잭슨 브라운의 이름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잭슨 브라운은 은둔 후 7년이 지난 93년,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앨범 I'm Alive를 발매하면서 팝계로 다시 복귀했다. 자신의 가치관에 담긴 철학과 사색적 메시지를 담은 이 앨범 역시 조용히 히트하면서 골드레코드를 기록했지만, 그가 원하던 대중적 성공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고, 그 앨범을 끝으로 잭슨 브라운의 황금시대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유명세는 대부분 일시적이며, 개인의 능력과 열정은 최고의 정점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다 수명을 다해 사라져가게 마련이다. 그것은 비단 비틀즈나 레드 제펠린같은 수퍼스타들뿐만 아니라 세계를 지배했던 모든 인물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이후 사회 환경운동에 참여해 활발한 활동을 보이다가 96년 Looking East 앨범에 이어 97년에는 25년간의 음악생활을 결산하는 히트곡 모음집 Greatest Hits를 발표한 잭슨 브라운은 2020년인 올해 73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포크, 팝, 록 분야를 넘나들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잭슨 브라운의 음악은 시류에 편승한 상업적 음악을 거부하고 시대변화에도 달라지지 않는 지성적 감성을 자극했다는데서 그만의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한 세대를 설득한 그의 깊은 성찰이 담겨있는 노랫말, 담담하고 블루지한 사운드와 더불어 반전 반핵 환경운동에 앞장선 잭슨 브라운의 족적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세대를 초월해 많은 지성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글 / 友戀 최기만(팝 컬럼니스트)
++++++++++++++
노래하는 무대가 끝나고 로드 매니저들은 무대를 철거해서 노래하고 연주할 다음 도시로 떠나 맨먼저 도착해서 무대를 새로 만들고... 로드 들은 가장 값싼 임금을 받지만 맨 먼저 도착하고 맨 나중까지 고생하며 무대를 만들고 또 철거까지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그들, 로드매니저들에 대한 삶을 노래하는 Jackson browne 의 The Load out 과 Stay 두 곡을 합한 곡으로 함께 들어불까요?
이젠, 청중들이 모두 가버렸으니 스탭들에게 무대를 치우도록 하세요.
무대를 철거하고 짐을 싸게 해요. 몇 푼 되지도 않는 임금을 받는 그들은 맨 먼저 왔다가
맨 나중에 떠나는 사람들. 그들은 다음 공연할 도시에 또 무대를 설치할 겁니다.
오늘밤 모인 청중들은 아주 괜찮았어요. 줄을 서서 기다려 줬고 또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적인 호응을 해주기도 했으니까요. 관객들 때문에도 너무 좋았지만
나는 문닫는 소리와 의자를 접는 소음을 들으며 생각했어요.
관객들은 이 모습을 절대로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이제 앰프를 담은 상자를 끌어내고 무대의 지붕틀도 끌어내리고 이동식 계단도 치워야 하죠.
내가 또 다른 도시 공연장으로 이동할 때에는 당신들이 챔피언이지만
마지막 기타마저 꾸려질때 쯤에도 나는 여전히 연주하고 싶어한다는걸 알거에요.
그러니까 피아노를 가지러 오기 전에 다른 짐부터 챙기세요.
밴드는 버스에 올라 출발하길 기다리고 있네요.
밤새 버스를 타고 달려 아마도 시카고나 디트로이트 쯤에서 공연을 해야 하겠죠.
계속해서 공연을 하다보니까 이들 도시는 모두 그게 그거인 것처럼 느껴져요.
우리는 호텔방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무대 뒤에서 서성거리다가
조명이 켜지고 청중의 함성이 들리면 그제야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를 생각해 냅니다.
버스에서는 컨트리와 웨스턴, 리듬엔 블루스를 들을 수 있고
스테레오 카세트에 녹음된 여덟 곡짜리 디스코 음악도 들을 수 있어요.
좋은 시골 경치도, 읽을 수 있는 잡지도 있습니다.
무전기에서는 트럭기사들 목소리가 들려오죠. 비디오에서는 Richard pryor 가 나오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생각할 여유도 있어요. 먼 길을 달려 가는 동안엔...
하지만 왜 공연하는 시간만큼은 그렇게 짧게 느껴지는 걸까요?
우리를 힘내게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청중들이죠.
그들은 관중석에 앉아서 기다릴 수도 있고 우릴 끌어내릴 수도 있어요.
노래를 같이 부릅시다. 여러분들이 문제될 건 없으니까.
아침해가 비칠 때면 당신들은 당신들의 도시에서 아침 잠을 깨게 되겠죠.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또 공연준비를 하게 됩니다.
Stay
조금만 더 머물러 주세요. 우리는 조금 더 공연을 하고 싶어요.
이제 공연 프로모터는 신경 쓰고싶지 않을테고 노조도 개의치 않을 거에요.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모든 것들을 제쳐놓고 노래를 한 곡 더 부르고 싶어요.
그러니 제발, 제발 조금만 더 머물러 주세요.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모든 걸 제쳐두고 노래를 한 곡 더 부를 거에요.
노래를 한 곡 더 부를 거에요.
The Load out, 그리고 Stay 까지 9분이 넘는 아주 긴 사운드네요.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손질이 더 필요한 곡이었지만
라이브 공연 때 뜨거운 앵콜신청 때문에 앵콜송으로 부를 곡이 마땅치 않아서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드럼 맴버가 벌떡 일어나 나오더니 잭슨 브라운에게 말합니다.
"미완상이면 어때? 까짓것 한 번 해보자고"
그래서 앤딩곡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그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첫댓글 박정해 지기님은 "그리운 바우덕이"를 쓰시고, 김붕래 선생님은 노천명 시인의 "남사당"으로 화답을 하십니다.
두 글 작품에서 진하게 묻어나는 떠돌이 극단들의 남모를 애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이마당을 펼치는 시간은
오직 그들만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산을 넘는 그들에게도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고 노천명은 말했을까..
서양에도 기타 드럼 등 많은 악기를 싸들고 전국을 돌며 돈을 벌어야 하는 대형 장거리 공연패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양의 남사당패들은 스스로의 애환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 이 글을 올립니다.
동서양은 표현양식이 다르겠지만 그들이 가지는 고된 여정은 결국 똑같지 않겠나 싶군요..
포크.팝.록을 넘어 이제는 자기만의 색깔로 노래하고있는 잭슨브라운의 일대기를 쓰셨군요
70년대 일찍 블루지 컨트리에 관심을 가지셨던 우연님...공부는 별로였고 ㅎㅎ
암튼 이토록 장문의 팝칼럼을 쓰는 힘이 대단하십니다
팝 장르와 일상의 이야기를 접목한 수필을 써보면 어떠실까요
남사당 외줄타기만큼 잭슨브라운의 삶에서 묻어나는 진한 페이소스...
그도 광대의 피가 흐르고있는게 분명합니다 글 감사합니다
햐.. 이거 미치겠다 증말... 제가 음악에 눈이 멀어 공부를 안 했다면 정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ㅜㅡ
이건 몇 년 전에 글이 길어 신문에 2회로 나누어 기고했던 건데 어떤 블로거가 하나로 합쳐
자기 블로그에 올렸더라구요. 미국식 남사당패의 애환을 그린 글이라 그걸 그대로 가져와
여기에 올렸습니다. 이게 다~~ 지기님과 김붕래 선생님 두 분 탓이라는 거 아시지요?ㅎ
신문사에서 제가 여기서 이러고 논다는 걸 아는 날이면 편집장도 같이 놀자고 달려올 겁니다 아마.ㅋㅋ
어떤 분이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젊은 시절의 향수에 잠긴다고 했다면서요?
처음 들으면 잘 몰라도 여러 번 듣다보면 중독되는 노래죠. 말씀 감사합니다.^^
음악엔 문외한이 외출해보니 하늘은 늪고 산은 넓으네요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
오늘도 자세한 해설과 함께 많이 배우고 갑니다..._()_^^
농산물도 여러가지가 있고
맛도 여러가지가 있는데요
음악도 다양하고
맛도 다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