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보다 율법준수에만 몰두하는 유다인들
5장 9절은 불길한 징조를 예고하고 있다. 38년이나 병석에 누워 있던 사람이 치유되어 들것을 들고 걸어간 날이 하필 안식일이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5,9) 이 문장은 짧고 단순하지만 폭풍전야를 암시하고 있다. 바로 그다음 구절에 나오는 ‘그래서’라는 말이 앞으로 전개될 유다 지도자들이 박해를 암시한다.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5,10)
위에서 ‘곧’은 요한복음 저자가 사실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한 단어다. 곧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일어났을 때 치유 역사가 ‘곧’ 일어났음을 가리키기 위해서였다.
들것을 들고 가라고 한 예수님의 명령은 유다인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날은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이었다. 유다인들은 치유를 받은 사람에게 안식일에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한 행위가 아님을 지적한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기를 고쳐준 분이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예수님께 책임을 돌린다. 그 대답을 들은 유다인들은 그런 명을 내린 예수님에게 적개심을 품고 박해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여 안식일 법을 어긴 것도 나쁘지만, 그 병자를 부추겨 안식일 법을 어기게 한 것은 더 나쁜 일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 법만 아는 지도자들
5,9-11은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을 제지하고,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유다인들이란 인종적 구분이 아니라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바리사이들을 중심으로 한 유다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치유받은 사람이 유다 지도자에게 대답한다. “나를 건강하게 해주신 그분께서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5,11) 그런데 유다 지도자에겐 병을 고쳐준 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당신을 낫게 한 사람이 누구요?”가 아니라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요?”(5,12) 하고 묻는다. 이로써 유다 지도자들의 우선적 관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거동하지 못하다가 성한 몸이 되었다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유다 지도자들은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면서도 보지 못 한다.”는 말대로 사람보다는 율법이 더 중요했기에 병자가 치유된 것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점에만 관심을 둔다.
이러한 모습은 마르코복음 3장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자, 바리사이들은 그다음 안식일에 일부러 손이 오그라든 사람 하나를 회당에 데려다 놓는다. 이 사람을 고쳐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잡기 위한 책략에서다.(3,1-6) 예수님은 이들을 ‘위선자’요, ‘눈먼 인도자’라 하시며 “작은 벌레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마태 23,24)이라고 비난하셨다. 이들은 온갖 종교적 행위와 믿음도 사랑과 연민의 마음 없이는 모두 헛되다는 사실을(1코린 13,1-3) 모르는 사람들이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지키기 위해 39가지 금지 규정을 정하고, 각 금지 규정에는 세부 조항들을 추가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다.
․ 안식일에 가능한 한 침을 뱉지 마라. 뱉은 침이 흙 부스러기를 동그랗게 만들었다면 안식일에 일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 안식일에 틀니 착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만일 틀니가 빠지면 자기도 모르게 떨어진 틀니를 집게 되기 때문이다.
․ 안식일에 정원을 거닐면 안 된다. 정원을 거닐다 벌레 먹은 이파리를 보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이파리를 따게 되기 때문이다.
․ 안식일에 여자들은 거울을 보면 안 된다. 거울을 보다가 흰머리가 보이면 자기도 모르게 그 머리카락을 뽑게 되기 때문이다.
․ 안식일에 용변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용변 행위는 냄새나고 더러운 것을 내보내는 것이기에 거룩한 안식일을 더럽힌다.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수많은 규정을 정해놓고서 사람들이 제대로 지키는지 살펴보았고 지키지 않으면 단죄했다. 결국 안식일은 축복의 날이 아니라 악몽의 날로 바뀌었다.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조잡하고 비인간적인 세칙들을 만드는 데만 정신이 팔렸떤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나가 니네베가 망하기를 바랐던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12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을 앞에 두고 애간장이 타는 하느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 또한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동생이 집을 나간 후 아버지가 왜 우는지, 왜 대문을 잠그지 않고 잠을 자는지 그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고 애태우는 마음이 없으면 잔인해진다. 제아무리 진실과 정의를 외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자비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이의 아픔을 헤아리고 애타는 마음이 있다면 진심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아낄 줄 안다.
솔로몬 왕 앞에서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기라고 주장할 때, 솔로몬은 그 아기를 반으로 잘라 한쪽씩 나눠 가지라고 했다. 그러자 한 여인은 저 여자가 아기의 엄마이니 아기를 주라고 애원했다. 차마 자기 아기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아기를 포기한 그 여자가 바로 진짜 아기의 엄마임을 알아챈다. 세상에 어느 엄마가 자기 아기가 죽어 가는데 애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보면 “세상을 사는 데는 단지 서恕, 하나만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서恕는 마음 심心과 같을 여如로 되어 있다. 곧 상대방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인들도 안식일 규정을 지키며 산다.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이 시작되면 일체의 교통 운행이 정지된다. 시내버스, 시외버스, 기차, 항공기, 선박 등 모두가. 단, 외국 항공기가 안식일 이전에 출발하여 도착하거나 일시 기항하는 경우는 예외다.
열심한 유다인은 전기 스위치도 절대 손대지 않으며 전등이 켜져 있어도 끄지 않는다. 심지어 깜깜한 밤에도 불을 켜지 않는다. 전화를 걸지도 받지도 않고 인터넷도 사용하지 않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 회당이 아무리 멀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간다. 대부분의 사람이 금식하여 혹 식사를 한다하더라도 설거지는 하지 않고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이스라엘 호텔에서는 안식일에 두 가지 승강기를 운행한다. 하나는 외국인을 위한 일반 승강기고, 다른 하나는 ‘안식일용 승강기’다. 안식일용 승강기는 매 층마다 문이 열리고 닫히도록 자동장치가 되어 있다. 여기에 탄 사람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이런 승강기를 만든 이유는 안식일에 승강기 단추를 누르는 것도 안식일법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어떤 성경학자가 이스라엘에서 안식일에 일반용 승강기를 타려고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안식일용 승강기를 기다리던 유다인들이 우르르 일반 승강기 안으로 들어왔다. 자기들 대신 외국인이 단추를 눌렀으니 그 틈을 이용한 것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한국 순례객들이 올리브 산 언덕 위에 있는 하얏트 호텔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날은 금요일 저녁이었고 이미 안식일이 시작된 시각이었다. 여종업원이 주문을 받는데, 일행의 식사 주문이 다 달라 주문 받는 것이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종업원은 고개만 까닥까닥할 뿐 받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걱정이 된 한 사람이 “왜 주문을 적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안식일이 시작되어서 글을 쓸 수가 없거든요.” 아무리 주문이 복잡해도 안식일에는 외워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주문 내용을 종이에 써서 주었다. 그러자 그 종업원은 환하게 웃으며 돌아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