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영동정 심공 제단비명 서문을 아울러 붙이다高麗令同正沈公祭壇碑銘 幷序
옛날 고려의 운명이 끝날 때 몸을 바쳐 절의를 다한 이와 빗장을 잠그고 자신을 지킨 이들이 잇달아 많았으니, 그 자취는 달랐지만 의는 하나였다. 전리 판서(典理判書) 악은(岳隱) 심선생(沈先生) 같은 이는 곧 그 시대에 목숨을 바쳐 절의를 지킨 신하이다. 맏아들 영동정공(令同正公)은 임금과 부친을 애통하게 생각하여 새 왕조의 부름에 응하지 아니한 채 몸을 숨기고 세상을 마쳤다. 이때 화변이 망극하여 온 가족이 흩어져 판서공과 영동정공 양 대의 산소를 잃어버렸다. 그 후 후손이 매우 번성하여 항상 이것을 통탄이 여기고 대를 이어 널리 찾았으나 심목(深目)을 만나지 못하였다. 이에 온 문중이 함께 도모하여 선향의 요산(堯山) 아래에 나아가 양 대를 위해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사모의 정을 부치고 향기로운 제사를 받드니 이는 효사(孝思)의 무궁함에서 나온 것이다.
후손 상진(相縉)이 자신이 기술한 유사를 가지고 나에게 와서 명(銘)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 일은 매우 중하여 보잘것없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나에게 당시 의를 같이한 이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선대의 일로써 책임을 지우니 의리상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천윤(天潤)이다. 고려 조의 문림랑(文林郞) 위위시승(衛尉侍丞) 청기군(靑己君) 휘 홍부(洪孚), 합문지후 휘 연(淵), 문하시중 청화 부원군(靑華府院君) 휘 용(龍)은 조부 이상 3대이다. 부친의 휘는 원부(元符)니 곧 악은(岳隱) 선생이다. 선비(先妣) 및 배위(配位)의 성씨는 모두 전하지 않는다.
3남을 두었는데 장남 효상(孝尙)은 호가 석촌(石村)이고, 다음 효연(孝
)은 참판이고 공훈으로 청천군(靑川君)에 봉해졌고 호가 만우(晩愚)이고, 그 다음 자연(自
)은 지군사(知郡事)이고 호가 농은(聾隱)이다. 효상의 아들은 태산(太山)이다. 효연의 아들은 맹합(孟合)이니 여절교위(勵節校尉)이다. 자연의 두 아들은 우향(禹鄕), 치산(致山)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지금 공의 세대와 거리가 이미 5백여 년이니 문적(文蹟)이 흩어지고 없어져 공의 자(字)와 생졸 연월 및 관직의 이력에 대해 그 상세함을 알 길이 없고, 다만 집안의 가승(家乘) 몇 조목만 증거가 될 뿐이다.
공이 선친의 유명을 받들어 선대의 전장으로 물러나 숨어 농사짓고 독서하면서 매번 선친이 두문동으로 들어간 날을 당해서는 서쪽을 바라보며 절하고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고 불사이군의 지조를 더욱 견고히 하였다.
일찍이 길야은(吉冶隱), 원운곡(元耘谷)과 더불어 사우(師友)의 교분이 있었는데, 운곡이 편지로 관직에 나아가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나는 전 왕조의 천한 포로이고 지금 이미 나이가 늙어 남은 날이 많지 않으니 세상에 나갈 수 없으나, 그대는 곧 젊은 사람이고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니 깊이 숨어 나가지 않을 필요는 없다. 나가서 밝은 군주를 섬겨 시대의 여망을 위로하라.”라고 하였다. 공의 답서에 간략히 말하기를 “불행하게도 이제 외람되이 징벽(徵辟)의 명을 입고서 죽음을 무릅쓰고 애걸하여 겨우 살펴주심을 입었는데, 족하처럼 저를 알아주는 이가 곧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화를 거듭 입히고자 하십니까?”라고 하니, 운곡 또한 벼슬을 강요할 수 없었다.
이보다 앞서 야은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공이 시 2수를 지어 전송하기를,
재잘되는 황조며 嚶嚶黃鳥
간드러진 수양버들이로다 裊裊垂柳
이 사람 남쪽으로 돌아가니 之子南歸
저 길 오른쪽에서 전송하네 祖彼道右
다시 어느 때에 만날까 復會何時
그대의 손을 잡네 言執子手
술 있고 술 있으니 有酒有酒
큰 말통으로 마시네 爵以大斗
한강은 넓디넓고 洋洋漢水
금오산은 멀고머네 遠遠烏山
이 사람 남쪽으로 돌아가니 之子南歸
저 한가한 곳일세 于彼閒閒
날이 이미 저무니 日旣晩矣
가는 길 어려움 많으리라 謂行多艱
이 사람 있지 않으면 不有之子
누가 나의 집 문 두드릴까 誰叩我關
라고 하였다.
이 편지와 시에 나아가 보면 공의 지절의 고매함은 이미 말할 것이 없고, 문장의 아정(雅正) 또한 그 한 부분을 엿볼 수 있다. 공의 만년에 태종은 공이 전 왕조를 잊지 않는 것으로써 특별히 충효를 장려하여 정려를 명하였다.
아, 공의 재덕의 아름다움으로 만약 조금만 그 지조를 굽히고 나가 세상에 쓰여 임금을 곁에서 모셨더라면 공명과 사업이 어느 누구만 못했겠는가? 그러나 신하가 되지 않고 죽기를 맹세하여 변하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천지의 정기는 일찍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고 춘추의 대의는 배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자신의 마음을 편안히 하고 자신의 지조를 지킬 뿐이니, 그 맑은 풍모와 높은 절개가 어찌 두문동(杜門洞) 제현의 아래에 있겠는가? 아, 위대하도다. 명(銘)을 붙인다.
오직 충 오직 효는 維忠維孝
그 아버지에 그 아들 是父是子
집안일과 나랏일에 애통함이 깊었나니 痛深家國
하늘이 어찌 이런 화란 내리는가 天胡此禍
새 왕조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新朝屢徵
죽음을 무릅쓰고 벼슬하지 않았네 冒死不仕
자신을 지키고 충절을 바쳐 以自靖獻
오직 나의 본분 다할 뿐 惟盡在我
양 대의 제단 兩世壇壝
고향 땅 옛 마을일세 桑鄕舊社
양양하게 영령이 오르내리니 洋洋陟降
여기서 제사로 보답하네 于焉報祀
청풍이 어제와 같으니 淸風如昨
분별없는 이 분별 있게 하고 나약한 이 뜻 세우게 하네 廉頑立懦
악은(岳隱) 심선생(沈先生) : 심원부(沈元符, 1330∼?)를 말한다. 호는 악은(岳隱),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고려 말 오은(五隱)의 한 사람으로 고려가 망한 뒤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심목(深目) : 눈이 우묵한 사람인데, 실전(失傳)한 묘소를 찾아 준 신인(神人)을 말한다. 당(唐)나라 정원(貞元) 연간에 조공긍(趙公矜)이 유주(柳州)에서 객사하자 관가에서 장사를 지내주었는데, 그 후 아들 조내장(趙來章)이 장성하여 묘소를 찾았으나 아는 이가 없었다. 이에 점을 치니, “을사일에 들에 나가면 서쪽 사람으로 눈이 우묵하고 수염 많은 이를 만날 것이다.[乙巳于野, 宜遇西人深目而髯.]”라고 했는데, 과연 그 사람을 만나 묘소 위치를 찾았다고 한다. 《柳河東集 卷11 故襄陽丞趙君墓誌》
길야은(吉冶隱) : 길재(吉再, 1353∼1419)를 말한다.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고려 우왕(禑王) 12년(1386)에 문과에 급제했다. 관직은 문하주서(門下注書)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야은집》이 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원운곡(元耘谷) : 원천석(元天錫 1330∼?)을 말한다.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고려 말 정치가 혼란함을 보고 치악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징벽(徵辟) : 학덕이 있는 선비를 조정에서 부르는 것을 ‘징(徵)’이라고 하고, 삼공(三公)이하의 신하들이 천거하는 것을 ‘벽(辟)’이라고 한다.
두문동(杜門洞) :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다. 고려 조의 신하 72인이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고 이곳에 들어가 살았는데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한다.
白渚文集(下), 배동환 저, 김홍영, 남계순 역, 학민문화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