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회고를 들어보면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미러링과 대치, 대비 같은 기하학적 개념에 골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영화계에서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작품인 <메멘토>를 들여다보면 프레임 속 시간을 잘게 쪼개서 이리저리 섞은 다음 비선형적인 연출을 통해 결국 보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짐작도 안 되는 간극이 발생한다는 것을 영화적 실험을 통해 구현했다. 후에 나오는 모든 작품들 역시 각각의 주제의식은 다를지 모르지만 플롯을 언제 어떻게 배치하는 가를 골몰하는 놀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영화가 새로 나올 때마다 항상 언급되는 이야기는 C.G나 특수효과를 대신해 거대한 세트를 짓고 파괴하는 방식의 촬영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중력을 구현하기 위해 360도로 회전하는 방을 만들거나 광활한 면적의 옥수수밭을 가꾸었다가 태우는 등등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래픽이 실사에 묻어나는 이질감 대신 현장의 생동감을 그대로 전하려고 하는 의지일 것이다. 그에게 특수효과는 촬영된 푸티지를 어떻게 자르고 붙이는 가, 즉 숏과 숏의 충돌을 통해 생성되는 특수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특수효과 전문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영화 <오펜하이머> 역시 그 자장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놀란의 특기인 편집이라는 특수효과는 인물의 일대기를 과거, 대과거, 현재라는 시점으로 나누어 보여주고 시간 순이 아닌 사건과 사건이 부딪히는 순간들을 연결해 마치 분열과 융합을 거치며 팽창하고 폭발하는 핵폭탄의 원리를 닮은 서사를 만들어냈다.
<오펜하이머>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이론 물리학자의 일대기를 다룬 아메리칸 프로테스탄트를 각색한 작품이다. ’원자폭탄 아버지‘의 아버지라 불리던 그의 생애 부분 중에 젊은 학자의 시절을 거쳐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장이 되는 과정을 메인시간 때로 하여 1954년 원자력 협회 청문회와 1959년에 열렸던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오가며 진행된다. 이 세 개의 시간은 원자폭탄의 창조자이자, 수소폭탄을 결렬하게 반대했던 모순된 삶을 이어가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 가를 드러낸다.
영화 초반을 주목해서 보면 케임브릿지에서 유학하는 22살의 청년 오펜하이머를 비춘다. 실험에 서툴러 고생을 하던 그는 지도교수에게 핀잔을 듣고 망신도 당한다. 앙심을 품었던 그는 교수실에 있던 사과에 청산가리를 넣어 살해를 시도하지만 먹기 직전에 벌레가 먹은 것이라며 빼았아 쓰레기통에 버리게 된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는 시퀀스인 동시에 자신이 초래한 행동이 불러올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실행 후에 수습하는 과정은 모두가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는 원자폭탄을 만든 장본인이면서 반핵운동을 펼치고, 부인을 두고 진 태트록이라는 여인과 외도를 하지만 그녀가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한 자신을 후회한다. 결국 원자 폭탄의 개발이라는 신념과 행동이 스스로를 구원 할 것이라는 착각일 뿐이었다.
이는 놀란이 그려내고자 하는 인간상과도 연결이 된다. 기억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기는 자와 스스로 자경단을 자처하며 악으로 규정된 이를 그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기억의 림보를 헤매기도 하고, 인류의 절멸을 막기 위해 엔트로피를 역행하기도 했다. 앞선 작품들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따르던 인물들 역시 구원을 찾고 있었지만 동시에 진행되고 있던 과거와 대과거, 현재에 까지 자신이 만든 착각 속에서 버둥거릴 뿐이었다.
양자물리학에서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라고 말한다. 관측이 되는 순간에 그 형태가 결정되는 것이다. 놀란이 보는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관측 역시 그렇다. 분열과 융합를 반복하는 핵반응으로 우주를 알려고 했던 원폭의 아버지이자, 반핵운동가라는 이중성 모두 오펜하이머였다. 영화가 클라이막스에 다다를 때 유일하게 반복해서 나오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스트로스의 소개로 만나게 조우하는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이다. 그들은 짧은 대화를 통해 핵의 연쇄반응이 결국 세상에 파멸을 불러 올거라는 미래를 읽었고, 스트로스는 멀리서 그들의 대화를 자신에 관한 험담으로 짐작하게 된다. 1940년대 후반에 있었던 이 대화는 1954년에 가서 오펜하이머를 옥죄는 계기가 된다. 이미 원폭으로 수 많은 목숨을 잃게 만든 이가 어째서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를 하는 가를 추궁하는 자리에서 그는 공산당과 어울렸던 이력과 사생활까지 모두 대중에게 폭로되고, 함께 했던 동료들은 등을 돌렸다. 비참하게 내쳐지고 권한은 박탈당하지만 적극적인 항변은 하지 않는다. 또다른 연쇄반응을 잠재우는 그의 선택인 동시에 형벌을 받아들이는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놀란 영화 속에 주인공들은 모두 자기희생을 통한 순교를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필연적 업보를 쌓고 살아가는 존재를 보다 핍진하게 담아내려는 숭고함이 있는 것이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이 외부적 구현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과장되어 보이고 말하고자 하는 방향성 대신 스펙터클에 치중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번 영화 역시 관객들의 관심은 핵폭발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를 중점에 뒀다. 놀랍게도 놀란은 그런 기대를 접으라는 듯 트리니티 실험에서 재래식 폭발 장면만을 보여주고 두 차례의 원폭 투하는 라디오 방송으로만 전해준다. 일본에 리틀보이와 팻맨이 투하된 후 오펜하이머의 연설은 끔찍한 재앙과 같은 장면과 교차 편집으로 보여준다. 이는 폭발 장면으로 그려내는 스펙터클보다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분열과 융합이 얼마나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내는 가를 말한다.
<오펜하이머>는 무엇을 표현 할것인가 보다 무엇을 표현하지 않을 것인가에 방점을 두고 있는 영화다. 원자폭탄 개발을 둘러싼 과학자의 일대기가 아닌, 오펜하이머라는 인간의 내면을 관측한다. 관객의 시선은 스트로스의 자리에 있다. 그와 아인슈타인의 대화는 여전히 x값에 놓여있다. 놀란은 그 답을 자신만의 방정식으로 산출했다. 그렇다고 그게 꼭 맞는 답이라고 강요하진 않았다. 인간이라는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방정식을 적용 시킬 것인지는 보는 사람의 몫이 아닐까 싶다.
첫댓글 과학자가 아닌 한인간의 내면의 관측이라는점 공감됩니다
놀란의 영화들이 한 필름속에서 흐르는 듯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서사속에서 많은 것을 담아내기 위한 3시간의 러닝타임이 아니였던것 같네요.
오늘도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와우~리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저도 너무 재미있게 봤어요~과학 몰라도 재미있게 볼수 있더라구요~
화려한 장면들과 대조되는 상황들..
뇌리에 박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것이 그를 더 돋보여서 저에겐 너무 좋은 전기영화였네요. :)
관측하기 전까지 알 수 없는 것은 그의 내면도 마찬가지에 공감합니다. 얽힘 상태로 남은 것 같기도 하고요.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와~~리뷰끝판왕! 전 3시간이라는 시간이 짧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