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고독이라는 실존적 체험과 마주하게 된다. 어두운 어딘가에서 길을 잃어 본 사람은 거기서 결핍된 감각들을 인지하는 순간들을 포착할 때 비로소 단서 하나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이라면 단어 하나를, 그림이나 사진을 찍는 다면 이미지를 포착하게 될 것이다. 작품이란 작은 부속들이 모아 뭉치고 다시 불필요한 부분들을 덜어내고 남는 것들을 발견하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기자이자, 평론가였던 과거를 스스럼없이 밝힌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그간 자신을 만들어온 외부적 가치, 역사라는 시간의 자장과 신화와 인간이라는 환상과 현실의 조응을 필름이라는 세계 안으로 끌어와 재구축했다. 이번 신작 <어파이어>는 감독 자신이 필모로 만든 벽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스스로를 대면하게 되었다. 그에게 영화는 현실에서 꿈을 꾸고, 꿈속에서 현실을 자각하는 영원회귀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레온이라는 작가를 관찰하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마감 이외에 모든 것에 무심하다. 동행하는 친구 펠릭스가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같지 않냐는 질문에도 심드렁하고, 어렵게 도착한 별장에서도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한다는 예정에 없던 소식에 잔뜩 신경질적인 태도를 일관한다. 반면 별장의 주인이자 사진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그곳에 온 펠리스는 평안하기 그지없다. 둘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러 왔지만 강박과 여유로 대비될 정도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 한편, 그곳에는 미리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던 나디아와 그의 파트너 레비트는 얇을 벽을 울리는 밤 사운드로 자신들을 각인시킨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소설가와 사진사, 아이스크림 판매원과 인명 구조 요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펠릭스에게 그들은 함께 있으면 즐겁고 영감을 주는 존재이지만 마감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레온에겐 예술과 거리가 먼 하급 노동자로 보일 뿐이다.
자신이 첫 소설을 출간한 작가라는 오만함과 좀처럼 출간이 통과가 되지 않는 두 번째 책에 대한 스트레스는 그의 시야를 더 좁게 만들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영화는 레온이라는 인물을 예술적 정체성을 상실하는 지경으로 밀어 넣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태우고 남은 것을 발견하길 주문한다. 나디아는 그가 주변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소리로 다가오는 것들은 불안과 귀찮음으로 여겨졌지만 잠을 사이에 두고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그를 깨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된다.
<어파이어>의 내러티브 안에서 실존하는 것은 어쩌면 소리뿐일지도 모른다. 레온을 귀찮게 하던 벌레는 그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때 주변을 날아다니며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고, 낮은 비행을 하는 헬기와 산불을 알리는 방송은 그가 이야기라는 자장 안에 갇혀 있음을 알려 주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들이 지닌 메타포의 색도 진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펠릭스는 이미지를 포착하고 나디아 그 자체로 미장센과 색채가 된다. 데비트는 자신의 이야기로 사람과 사람의 연결하는 편집점을 만든다. 레온을 담아내던 카메라의 시점이 레온의 시점으로 바뀌는 순간들은 창 하나를 사이에 두거나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것처럼 담아내는 방식 역시 마치 레온의 설명처럼 보이게 하는 연출로 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모든 것이 타고 남은 곳에서 사랑을 찾아내는 젊은 예술가의 이야기지만 그 과정들은 페촐트 그간 쌓아왔던 역사라는 시간의 더께와 현실과 공존하는 신화라는 환상을 통해 세계를 재해석하고 구축하는 과정은 잠시 내려두고 자신이라는 내면 속에서 진짜 내가 추구하는 영화는 무엇인지 탐구하는 작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레온의 클럽 샌드위치와 나디아가 낭독하는 하이네의 시 아스라가 두 번 낭독되는 것은 강렬하게 다가온다. 레온의 소설은 중간에 끊겼다가 다시 읽히고 나디아의 낭독은 앙코르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시 들어야 이해가 가는 이야기와 다시 듣고 싶은 이야기의 간극은 이승과 저승만큼 멀게 느껴진다.
레온은 뭐 하나 제대로 본 것이 없다. 그가 닿으려던 것들은 모두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실패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핼무트는 새로운 소설을 받아들이고 책에 펠릭스의 시선 하나를 심으려 한다. 레온은 조심스럽게 나디아를 바라본다. 프레임 속이 아닌 정면 그대로 인지한다. 어쩌면 그것은 페촐트가 던지는 영화의 가능성이 아닐까 싶다. 예술적 오만도, 다 타버릴 듯한 간절함이 아닌 프레임 안을 보고 프레임 밖을 상상하게 하는 것.
첫댓글 두 번 정독했습니다 👍
감독이 그 간의 작품 활동을 돌아보고 새롭게 나아가려는 다짐을 보여주는 것이었군요
본인이 자가 격리 중에 영감을 얻었다는데
펜데믹 중 사망자가 많았던 유럽을 생각하면 큰 불이나 사라지는 사람들이 이해가 갑니다
한편으로 역사와 신화를 주제로 자신의 예술 한 꼭지를 아낌없이 연소시킨 작가의 마음 풍경이구나 하고
리뷰 덕분에 생각하게 됩니다
잘 맞는 와꾸에 대해 설명 듣고 이제 좀 소화되네요 ㅎㅎ
꼭 보고싶은 영화에요!! ^^ 나중에 영화 보고 다시 읽어볼께요!! ^^
소대가리님 리뷰를 보면
아~!! 이 영화 꼭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글의 힘 인가요? ㅎㅎ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기회되면 보구 다시 올게요~~
리뷰를 읽지않았으면 몰랐을 영화네요. 다시 들어야 아는 이야기와 다시 듣고싶은 이야기가 뭔지..저도 기회가 되면 꼭 보고 싶어지네요.
잘 봤습니다
제 영친중에 페촐트 빠가 있어서
(그분은 감독님내한중 모든 행사를 예매
하고 사인받고 적극애정공세를 했어요)
많은 얘기를 했던 감독님의 신작
의외로 팬덤이 두텁더라구요.
저는 이영화를 페스트리같은 영화로 봤어요
맨위에 이기적인 작가의 성장스토리가 있고
그 밑에 러브스토리가 있고
그 밑에 물과불의 이미지 대립과 상생이 있고
결국 모든것을 태운후에 남은것과의 조우가
페촐트 특유의 연출로 아름답게 그려졌어요
매력적인 폴라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