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옥이는 오늘도 일어나자 마자 앞마당에 나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미 일을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으시고 마당에 핀 여러 이름 모를 풀꽃들만 생긋 생긋 웃으며 잘 잤니, 아침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옥이는 잠시간 마당 근처를 여기 저기 둘러보다, 이내 마음이 슬퍼집니다. 아침 바람에 방긋 방긋 몸을 흔들며 귀엽게 웃어대던 예쁜 아기풀꽃들도 바람만 부는 추운 겨울이 시리다는 듯 얼굴을 찡끄리는 것 같습니다. 새옥이는 다시 방 안으로 쌩 들어와 문을 쾅 닫고는 TV를 켭니다.
TV에는 이미 이곳 저곳 눈이 퍼엉펑 내리고 있다는 정겨운 소식들이 대롱 대롱 묻어나옵니다. 사람들은 길가에 소오복이 오는 눈을 행복해 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한 해의 정리와 새로운 다짐을 하겠지요.
그러나 새옥이는 다시 TV를 꺼버립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또 나와서 끝없이 푸르기만한 겨울 시골 아침 하늘을 원망하듯 바라봅니다.
치―, 하느님은 정말 너무하시지요. 올해들어 한번도 새옥이가 사는 구장리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니까 말이지요. 맑은 날씨가 있어야만 늘 웃을 수 있는 날이 오고 모든 것이 푸르러 사람들은 투명한 마음으로 자신을 반성할 수 있다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시지만 새옥이에겐 섭섭하기만 합니다.
새옥이는 외로운 아이입니다. 할아버지는 늘 밖으로 일을 하시러 가야 하기 때문에 새옥이는 매일 집에만 있어야 합니다. 마을에는 친구들이 없습니다. 언니, 오빠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다 오래 전에 도시로 나갔기 때문이지요. 그나마 몇 있던 새옥이 또래의 아이들도 아랫마을 산외초등학교가 폐교가 된 이후에는 모두 전주로 나갔지요. 그래서 새옥이가 사는 구장리에는 여섯 살 새옥이를 빼면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 뿐입니다.
엄마랑 아빠요? 음......굳이 말을 해야 한다면 새옥이네 집 앞마당에서 귀엽게 고개를 살랑이며 빙그레 웃는 풀꽃들에게 미안하지만, 다시 슬픈 말을 해야겠군요.
새옥이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있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몸이 아주 많이 편찮으셔서 전주에 있는 큰 병원에 입원해 있으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엄마가 병간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새옥이는 멀리 시골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도 늘 밖으로 일을 나가셔야 하기 때문에 집에 안 계시고 어쩌다 방에 계신 날은 종일 아랫목에 누워 주무시기만 하시지요. 새옥이는 항상 심심하고 엄마가 너무 너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엄마가 정말 보고 싶어서 엉엉 울기도 하고 병원에 계신 아빠가 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새옥이에게 얼마전부터 아주 기다려지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눈을 기다리는 일이지요.
작년까지만 해도 엄마, 아빠랑 함께 전주에 살며 포근히 내리는 눈을 맞았습니다. 엄마는 감기에 걸린다고 새옥이더러 밖을 나가지 말라고 하셨지마는, 하아얗게 송이 송이 벙그는 눈이 새옥이에게는 동화 속 천사님처럼 아름답고 엄마 젖가슴처럼 향기로웠습니다.
어떤 날은 눈을 컵에 가득 담아와 방 안에 놓고, 보고 또 보다 그것이 금새 소리 없이 녹아 물로 변하는 것을 보고는 울음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게도 눈을 좋아하는 새옥이에게 12월 어느 날, TV로 눈이 세상을 온통 투명하게 물들이는게 보였습니다. 야아, 드디어 겨울이다―. 새옥이는 손뼉을 치고 깡총깡총 뛰다가 혼자 방 안에서 두 손 모아 눈을 빨리 보게 해 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눈은, 깊은 산골 마을에 내리지 않았습니다. 매일 매일 맑은 바람이 아침부터 잠든 머리맡의 방문을 살금 살금 두드리며 얼굴을 삐죽 내밀더니 오랜 밤이 지나도록 따뜻함은 한 자리에 머무르기만 했습니다. 마을 어른들도 허허, 요것이 대체뭔 일이다냐―구장리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할아버지도 난생 처음으로 눈 대신 따뜻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며 의아해 하셨습니다.
새록이는 매일 마음 속에 간절한 소망을 담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지만, 역시 눈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새옥이는 다시 예전처럼 슬퍼졌습니다. 깨끗한 하늘은 농부들에겐 희망인겨, 아 비라도 내리면 고맙제. 눈 내리면 힘들어야. 구장리같이 가난한 마을에, 글지 않아도 올해 흉년인디. 하따, 눈 한번 내려봐야. 요것이 을매나 사람 잡아븐지 니는 몰라야.
그러나 이제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도 밉고 엄마만 보고 싶었습니다. 새옥이는 처음으로 마음이 텅텅 빈 것 같았습니다. 가끔 일찍 들어오신 할아버지가 다른 날보다 얼굴이 붉어지신 채로, 맴이 펑 뚫려버린 것 같구먼, 하신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조금이라도 하늘이 어두어져 밖으로 나가면, 이내 구름만이 아기처럼 살랑이는 날의 연속인채로 새옥이는 저 깊은 맑은 속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엄마―
2
TV엔 크리스마스 준비가 한창입니다. 새옥이가 즐겨 보는 뽀뽀뽀나 TV유치원에서도 초록색 크리스마스 트리를 멋지게 장식하며, 언니와 아저씨들이 친구들과 함께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새옥이는 다시 가슴이 쿵쿵 쾅쾅 뛰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양말을 머릿맡에 두고 잠이 들면 다음 날은 예쁜 선물이 가득 눈에 닿았던 기억이 새록 새록 떠올랐습니다.
하느님. 눈은 안 오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니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오시는거죠? 아무리 시골이어도 꼭 오셔야 돼요. 안 그러면 이제는 정말 정말 하느님 미워할거예요. 사실 계속 눈을 보여주시기 싫으신거죠? 하느님이 조금은 밉지만 뭐, 이제 크리스마스니까요. 그동안 제가 나쁜 마음 먹었던 것 정말 정말 죄송하고요, 다시는 안 그럴테니까 한번만 봐 주세요. 그리고 산타할아버지한테 새옥이가 선물 꼭 받고 싶어 한다고 말씀 드려 주셔야 해요. 알았죠? 꼭이예요. 참, 선물은 아직 안 정했으니까 나중에 생각나는데로 기도 드릴게요. 그럼 이만 하느님, 안녕!!!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새옥이는 다른 날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서 밖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앞마당은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새옥이는 안타까운 마음을 덮고 밝은 기분으로 방 안에 들어와 어서 빨리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새옥이, 일어났냐?"
새옥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아보니,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
새옥이는 할아버지가 일을 안 가시고 집에 계신 걸 보자 깜짝 놀랐습니다,
"새옥아, 할애비 오늘 어디 좀 갔다 올 테니까, 집 잘 보렴. 일찍 들어올거야."
할아버지는 버스를 타고 밖에 나가신다며 문 잘닫고 있으라고 몇 번이나 새옥이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하루 세 번 오는 버스의 첫차는 할아버지 혼자만 승객의 전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차창 너머로 새옥이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버스가 흘러가는 겨울 뒷바퀴로 목마른 논줄기 사이 사이 가난한 풀꽃들이 그렁 그렁 몸을 흔들었습니다.
새옥이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할아버지 말씀대로 문을 단단히 잠그고 살며시 눈을 감고는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하느님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말씀드리지 못했거든요. 엊저녁부터 이것 저것 몇 번이나 생각을 하고 바꾸고 한 뒤에야 겨우 겨우 결정한 것을 새옥이는 정말 정말 간절하게 하느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3시차로 오신다는 할아버지는 6시 막차가 떠난 뒤에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새옥이는 모종에서 기다릴까, 하다가는 밤공기가 추워서 이내 방으로 들어와 할아버지 말씀대로 다시 문을 단단히 잠그고 방안에만 꼭 있었습니다.
갑자기 무서워졌습니다. 점점 날이 어두워지자 여기 저기 작은 소리도 크게 느껴져, 문을 열고 누군가 이놈―하며 달려 올것만 같았습니다. 새옥이는 발가락 하나까지도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꽁꽁 이불로 온 몸을 감쌉니다. 그리고는 TV도 켭니다. 그러나 여전히 무섭습니다. 금새 울것만 같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어서 빨리 와 주시기만을 새옥이는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래도 1시간, 2시간이 지나도 할아버지는 오시지 않고 어둠만이 더욱 짙게 몰려왔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할까? 새옥이는 아까 하느님께 기도한 선물을 바꾸고 할아버지가 빨리 돌아오시라고 할까―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새옥이는 머리를 도리 도리 저으며 그래도 이것만은 안 돼, 하였습니다.
이윽고 새옥이는 무서움 속에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한참을 잠에서 자며 꿈 나라 속에 들어갔을 때입니다. 이곳 저곳 아름다운 곳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 새옥이가 있는 것입니다. 새옥이는 반가워 거기로 가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와 계셨습니다. 새옥이는 할아버지―선물 주세요, 하며 달려갔습니다. 산타 할아버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빨간 주머니에서 선물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새옥이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셨는데 갑자기 어디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새옥이는 안 돼요―말하다 잠에서 깨었습니다. 왜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시지 않고 그냥 가셨지? 새옥이는 자기가 누운 자리를 돌아보았습니다. 맞아! 새옥이는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런...그만 양말을 옆에 두지 못했군요. 새옥이는 재빨리 양말을 벗어 머릿맡에 놓았습니다.
다시 잠이 들면 산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거야. 그러면 양말에다 아까 그 선물을 넣어주시겠지.
새옥이는 어서 꿈나라로 여행을 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루에 쿵!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엄마―새옥이는 너무 무서워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불 속에 머리 끝까지 집어 넣고는 엉엉 울기만 하였습니다.
"엄마, 무서워! 무서워요!"
새옥이는 세상에 떠나가라는 듯이 계속해서 울어댔습니다. 너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지요. 산타 할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나 선물은 다 잊은 뒤였습니다.
"새옥아...새옥아..."
새옥이는 갑자기 눈을 뜨고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또 무서워져 아까보다 더 크게 울었습니다.
"새옥아...새옥아 할애비여..."
"할아버지?"
새옥이는 할아버지가 오셨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방문을 열었습니다. 할아버지만 오셔도 무섭지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오셨다는 소리에 새옥이는 금새 밖으로 나갔습니다.
"으앙!"
그러나 새옥이는 다시 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마루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계속 울기만 하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마루에 쓰러져 계셨기 때문입니다. 새옥이는 그걸 보고는 정말 너무 너무 무서워진 것입니다.
"새옥아......어서 빨리 옆집에 가라. 옆집에 가서 할아버지가 많이 아픈께, 어여 와 달라고 혀."
새옥이는 울기만 하였습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무섭고 무서워 엄마만 찾으며 울었습니다.
"이것아! 할애비 죽것어. 어서 가. 어서 빨리 가야혀."
새옥이는 그래도 울고 있었지만, 어린 것이 마루에 내려가 신발을 신었습니다. 맨발로 신을 신자, 이미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 밤에 발이 어는 것만 같았습니다. 새옥이는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미 눈을 감고 계셨습니다. 여섯 살의 새옥이는 그 밤길을 무서워 무서워, 엄마를 외치며 옆집으로 갔습니다.
옆집 문에 들어가려 할 때였습니다.
멍멍! 큰 개가 새옥이를 보고 짖는 것입니다. 새옥이는 그렇잖아도 울고 있었는데, 아주 이번엔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하는 개. 새옥이는 아까보다 더 빨리 길을 뛰었습니다.
다시 집으로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마루위에서 눈을 감고 누워계셨습니다. 문득, 새옥이는 할아버지가 아까 죽을 것 같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죽는다......아빠도 의사가 죽을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할아버지가 죽으신다면 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옥이는 이내 아랫마을로 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전 할아버지를 따라 아랫마을로 간 적이 있습니다. 아랫마을에는 보건소라고 하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가서 마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진찰을 받으셨습니다. 새옥이도 주사라는 것을 맞았는데 너무 아파서 울어버렸습니다. 다시는 보건소에 가지 않을 거라고 할아버지께 고래 고래 울며 소리를 질렀지만, 지금 생각나는 곳은 보건소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새옥이는 별님 하나 뜨지 않은 추운 밤길을 맨발에 고무신으로 마구 마구 뛰기만 했습니다.
시골밤길에는 아무 것도 잊지 않는 듯 했습니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옥이는 다시 엉엉 울고 싶어졌지만, 다시 또 울게 되면 뛰지 못할까봐 꾹꾹 참으며 보건소가 있는 곳까지―여섯 살 여자 아이가 헐떡거리며 어둔 밤길을 뛰어갔습니다.
3
의사 선생님은 영양제를 놓으시며 연이어 놀랍다는 말을 되풀이 하십니다.
"문을 닫으려는데 꼬마 애가 다짜고짜 뛰어와서 우리 할아버지 죽어요, 죽어요 하면서 우 는데, 집이 어디니, 물으니까 애가 대답은 안하고 쓰러져 버리더라구요. 제 딴에는 꽤 놀 랐나봐요."
의사 선생님은 지금도 엊져녁의 일이 아찔했다는 듯 말씀하십니다.
"큰일이다, 싶어서 제대로 봤더니, 글쎄 박영감님 댁 새옥이가 아니겠어요? 그 녀석 아직 도 잘 기억하고 있었지요. 저번에 주사 맞을 때 얼마나 울어대던지. 그 길로 바로 뛰어온 겁니다."
할아버지는 곤한 얼굴로 주사를 맞으시면서도 허허, 고놈 참, 웃음을 보이시며 잠든 새옥이를 바라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버스 끊겼다고 읍내에서 여기까지 걸어오십니까? 어제 바람 이 얼마나 세게 불었는데요. 근데 읍내에는 왠일이셨어요?"
할아버지는 의사 선생님의 물음에 잠시 주무시는 척을 하시다, 이윽고 입을 열으셨습니다.
"새옥이 저것에 계속 구장리에 눈 안 온다고. 맨날 엄마 보고 싶다고 찔찔 짜는디, 나라고 기분 좋것는가. 그란디, 며칠 전부터 새옥이가 크리스마슨지 뭔지, 그놈의 선물 타령만 해 대고 입반 벙벙 떠갖고. 쳇, 암만 무식혀도 나도 다 알제. 산탄지 나부랭인지 그렁게 어딨 담. 근디 소원빈다고 만날 방구석에 있는게 하도 안 되서, 내가 선물이나 좀 사러 갔는 데......"
할아버지는 강풍 속을 걸어오신 어제가 참 많이도 힘이 드셨다는 걸 알리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셨습니다.
"암튼, 저도 어제 성탄절 때문에 집에 내려가려는 참이였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저 봐 드리려고 오늘 다시 온 겁니다."
"고맙구먼."
의사 선생님은 할아버지께 약 봉지를 드리며, 절대 찬바람 쐬지 마세요, 하시며 방문을 나서십니다.
"고맙네, 내 못 나감세."
"원, 별 말씀도. 그리고 오늘 새옥이가 무척 좋아하겠는데요."
"왜?"
"영감님도 집에만 계셔서 모르시겠군요. 오늘 아침에 여기 오는데, 눈 때문에 엄청 고생했 습니다. 하도 많이 내려서 차가 올라와야 말이지요. 겨우 겨우 올라왔어요. 아마 어제 그 렇게 강풍이 몰아친게 눈오려고 했나 봅니다. 세상에 첫눈, 첫눈, 이렇게 무섭게 내린 첫 눈은 또 처음이예요."
의사 선생님은 안녕히 계세요, 하며 신을 신으십니다. 대문을 나서는 의사 선생님의 입에서 어이 추워, 하는 소리가 잠든 새옥이의 머릿맡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4
새옥이는 눈을 부시시 찡그리며 일어납니다. 하품도 한번 하고요. 새옥이는 할아버지를 보고 의아해 합니다.
"할아버지가 왜 안 나가셨지."
잠에서 이제 막 깬 여섯 살 아이는,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나 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성탄절이 왔는데도 가만이 있는 걸 보면요.
"우와."
새옥이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집니다. 잠든 머리 위 벗어둔 양말 앞에 예쁜 인형이 놓여 있었습니다.
새옥이는 단번에 그걸 안습니다. 그리고는 여기 보고 저기 보고 입도 맞춥니다.
아이는 좋은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방방 뛰기도 하고 소리도 지릅니다. 그러다 옆에서 곤히 잠이 든 할아버지를 봅니다.
아차. 아이는 이내 조용해 집니다. 그리고는 다시 제 자리에 앉아 인형을 가지고 놀다, 무언가 생각난 듯이 잽싸게 일어납니다.
산타할아버지!!!
문을 열고, 앞마당에 나갑니다.
새옥이의 눈이 다시 한번 크게 떠집니다. 산타할아버지는 보이시지 않았지만, 밖은 이미 온 세상이 하얀 빛으로 물들여져 있었습니다. 지붕도, 나무도, 일 년 내내 푸른 산도 하얀 빛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새옥이는 빨간 맨발로 추운 앞마당에 내려옵니다. 하얀 눈을 가득 안습니다. 추운 줄도 모릅니다. 눈을 안고 눈을 보며 여기 저기 굴리기도 하고, 아기 인형을 앉혀 놓고 이 눈 저 눈,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새옥이는 차갑고 시린 눈을 보다가도, 이내 크게 한번 웃습니다.
새옥이의 하얀 이가 다 보입니다.
"추운데, 여기서 놀면 감기 들어. 어서 들어가야지."
새옥이는 추운 귀를 어루만져 주는 포근한 손길을 돌아봅니다.
"엄마!"
새옥이가 와락 엄마의 품에 안깁니다. 분명 엄마가 서 있었습니다. 엄마가 새옥이한테 와 주신 것입니다.
"엄마, 엄마."
아이는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겨 울기 시작합니다. 좀전의 그 추운 얼굴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엄마. 내가 한 기도가 이뤄졌어. 내가, 내가 이번 크리스마스에 엄마 오게 해달라고 기 도했어요,"
"그래, 그래. 엄마 왔잖아."
새옥이를 안은 엄마도 눈물을 흘리십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며, 드디어 기다리던 뒤늦은 신고식을 한 첫눈이, 보란 듯이 다시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겨울인데도 예쁜 녹빛을 뽐내던 산들과, 풀잎들은 다시 몸을 움츠렸습니다. 아마, 새옥이랑 엄마처럼, 자기네들도 서로의 몸을 맞대어 따뜻한 온기를 내기 위해서 그러겠지요,
늦었지만 첫눈은, 늘 그랬듯 반갑고 정답게 깊은 산골마을에 맑은 밥꽃들을 뿌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