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기적비명 서문을 아울러 붙이다五老紀績碑銘 幷序
의흥현(義興縣) 부계(缶溪) 마을은 팔공산 북쪽에 있어 산천이 웅장 화려하고 골이 넓으니 영남에서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한 시내[溪] 위아래에 예로부터 이름나고 큰 선비가 그 사이에서 많이 나왔으니 이는 땅의 신령함이 부여해 준 것이다. 조선 중엽 선조 때부터 영조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 동안 이곳에서 다섯 군자가 태어나 유풍(遺風)과 의적(懿蹟)을 지금에 이르도록 후인들이 구전하여 칭송하며 경모하고 있다.
부천(缶川) 이공(李公)의 휘는 정남(挺南), 자는 계언(季彦), 본관은 흥양(興陽)이니, 부윤 낙빈(洛濱) 휘 언(堰)의 6세손이다. 선조 기사년(1569)에 현 내의 일대리(一大里)에서 태어나 음직으로 세 차례 참봉에 제수되고, 임오년(1582, 선조1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한강(寒岡), 여헌(旅軒) 두 선생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만년에 자여도(自如道) 찰방,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제수되었다. 이월사(李月沙), 이오봉(李五峯), 이창석(李蒼石), 최관은(崔灌隱) 등과 교분이 좋았는데 고향으로 돌아올 때 네 분의 증별시가 있다. 을해년(1635, 인조13)에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였다. 문집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막암(幕巖) 이공(李公)의 휘는 시간(時幹), 자는 맹견(孟堅), 본관은 철성(鐵城)이니, 쌍매당(雙梅堂) 휘 윤(胤)의 후손이다. 선조 무진년(1568)에 현 내의 창동(倉洞)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기유년(1609)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광해조의 정사가 어지럽자 마침내 소매를 떨치고 남쪽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독서하며 부천 이공과 함께 자주 내왕하며 도의를 강마하였다. 여헌 선생이 막암의 진경을 찾던 날 내방하여 여러 날 머물며 강하고 토론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임오년(1642, 인조20)에 돌아가시니 향년 75세였다.
물계(勿溪) 홍공(洪公)의 휘는 귀서(龜瑞), 자는 경오(景五), 본관은 부림(缶林)이니, 경재(敬齋) 휘 노(魯)의 후손이다. 영조 병오년(1726)에 대율리(大栗里)에서 태어나 백씨 쌍료당(雙蓼堂) 공과 함께 배우고 익혔다. 기묘년(1759, 영조35)에 문과에 올라 주서, 승문원 정자, 종부시 주부, 병조 좌랑 등을 역임했다. 일찍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날마다 주자서(朱子書)를 읽었다. 〈출처사(出處辭)〉를 써서 뜻을 보이고, 〈십물잠(十勿箴)〉을 지어 좌우명을 삼고, 호를 물계(勿溪)라고 하였다 기해년(1779, 정조3)에 돌아가시니 향년 54세였다. 문집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동호(東湖) 신공(申公)의 휘는 택화(宅和), 자는 자안(子安), 본관은 평산(平山)이니, 남강(南岡) 휘 빈(蘋)의 5세손이다. 영조 무신년(1728)에 현 내의 가곡리(佳谷里)에서 태어났다. 32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적, 예조 정랑,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역임하였고 사직하고 남쪽으로 돌아와 원근의 학자들과 문암서숙(文巖書塾)에서 강회(講會)를 하여 문풍을 진작시킨 효과가 많았다. 소산(小山) 이선생(李先生)이 일찍이 공을 ‘산남고사(山南高士)’라고 일컬었다. 경신년(1800, 정조24)에 돌아가시니 향년 73세였다. 문집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수헌(睡軒) 홍공(洪公)의 휘는 택하(宅夏), 자는 화로(華老), 본관은 부림(缶林)이니, 물계의 조카이다. 영조 임신년(1752)에 대율리에서 태어났다. 병오년(1786, 정조1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부정자를 역임한 후 정자에 오르고 박사, 직장, 전적, 병조 좌랑 등으로 옮겼다. 두 번 이조 정랑에 제수되고, 네 번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만년에 통정대부에 올라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제수되어 사은(謝恩)하고 상소하여 관직을 벗고 돌아왔다. 기묘년(1819, 순조19)에 다시 앞서 제수된 직책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경진년(1820, 순조20)에 돌아가시니 향년 69세였다. 문집이 있다.
아, 오로의 세대가 이미 3백 년 전후가 되니 각 가문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일방에 두루 퍼져 세의(世誼)를 강구하고 계를 맺어 계금이 모였다. 이에 돌을 채취하여 유허에 표시하여 오로를 사모하는 바탕으로 삼으니, 이는 조상을 받들고 전현을 숭상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공들이 나에게 와서 비명(碑銘)을 지어줄 것을 청했는데, 내가 노쇠하고 문장이 부족한 것으로 누차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삼가 가져온 기록에 의거하여 차례로 서술하고, 명(銘)을 붙인다.
아득히 다섯 어른 생각해보니 緬惟五老
같은 고을 같은 덕이었네 同鄕同德
혹 산림에 은거하고 或遯山林
혹 왕조에 벼슬하니 或敭王國
출처의 바름은 出處之正
학문의 힘이었네 問學之力
삼백 년이 지나도록 曠三百年
맑은 향기 사라지지 않았네 淸芬未沫
이에 좋은 비석을 세워 迺竪貞珉
남긴 자취를 표시하네 庸表遺躅
차례로 나열하여 기록하니 次第列書
찬란하게 아름다운 자취일세 煌煌懿蹟
한 조각 돌에 전할 만한 말 一片堪語
천 년토록 마모되지 않으리라 千秋不泐
구름 안개는 광채를 더하고 雲烟增彩
시내와 산은 색을 발하네 溪山動色
길이 갱장의 뜻 부치니 永寓羹墻
지나는 이 반드시 공경하라 過者必式
이월사(李月沙) : 이정귀(李廷龜, 1564∼1635)를 말한다.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590년(선조3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중기 4대문장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관직은 병조 판서, 예조 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월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오봉(李五峯) :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을 말한다.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584년(선조17)에 문과에 급제 후 응교, 집의, 이조 좌랑, 부제학, 예조 판서, 대제학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오봉집》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이창석(李蒼石) : 이준(李埈, 1560∼1635)을 말한다.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본관은 흥양(興陽)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2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첨지중추부사,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창석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소산(小山) 이선생(李先生) : 이광정(李光靖, 1714∼1789)을 말한다. 자는 휴문(休文), 호는 소산(小山),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아우이다. 저서로는 《소산집》이 있다.
한……말 : 이 구절은 한산편석(寒山片石)의 고사를 인용하였다. 양(梁)나라 문사 유신(庾信, 513∼581)이 북방에 이르러 온자승(溫子升, 495∼547)이 지은 〈한릉산사비(韓陵山寺碑)〉를 읽고 베껴 둔 일이 있었는데, 남방 사람들이 유신에게 북방의 문사가 어떤가를 묻자, 〈한릉산사비〉를 두고 말하기를 “오직 한릉의 일편석(一片石)을 정히 함께 말할 만하고, 나머지는 새가 울고 개가 짖는 듯하여 귀에 시끄러울 뿐이다.”라고 하였다. 《歷代典故辭典 韓陵片石》
갱장(羹墻):국과 담. 우러르고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이고(李固)가 말하기를, “옛날 요 임금이 죽은 뒤에 순 임금이 3년 동안 우러르고 사모하여, 앉았을 때는 담에서 요 임금을 보고 밥 먹을 때는 국그릇에서 요 임금을 보았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牆, 食則睹堯於羹.]”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93 李固列傳》
白渚文集(下), 배동환 저, 김홍영, 남계순 역, 학민문화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