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는 전 세계 어디라도 암흑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지배체제 안에서 그야말로 생지옥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그 광기는 측근이 암살을 당하자 대숙청이라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진다. 추정치로 1년간 120만 명이라는 숫자가 처형을 당했고, 하층 농민부터 당의 고위 간부에 해당하는 범위까지 당시 3분의 1이 넘는 공산당원들이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잡아들이는 가를 정하기 위해 소련 정부는 비밀경찰 조직 NKVD를 동원한다. 그들은 스탈린의 계엄령을 수행한다는 미명하에 강행수사와 고문, 날조 등을 통해 대상 명단을 만들고 죄의식 없는 참상들을 자행했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NKVD 대원인 볼코노코프가 동료의 자살과 내면에 잠재된 죄의식을 마주하고 남겨진 피해자들의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볼코노고프는 어느 날 투신으로 생을 마감하는 동료를 보게 되고 자신이 이끌던 팀 역시 숙청 대상자로 조사 선상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고발된 내용의 10%만 진실이더라도 사실로 간주하라. “는 스탈린의 말은 의심을 실체 하는 것으로 만들었고 호흡 한 번조차 생명과 직결되던 시대였고, 그 엄혹한 시절을 만들어온 장본인이 볼코노코프 본인이었기에 더욱 혼란스럽고 가혹한 현실이었다. 죄의 대가는 추락이었고, 떨어지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볼코노고프는 자신의 내면에서 본 먼저 떠난 동료가 전하는 용서를 구하지 못하면 영겁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릴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기밀 자료인 숙청 대상자 명단을 들고 탈출을 감행한다. 남겨진 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처절한 여정의 시작인 것이다.
볼코노고프는 명단 속에 인물들을 찾고 그 유가족을 만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방법도, 마음을 달랠 방법도 없기에 용서를 구하는 길은 불가능에 가깝다. 의사로서 사람을 구했으나 적을 치료했다는 혐의로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숙청자들의 시신을 관리하는 여자, 아들을 잃고 아직도 당국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믿는 거짓말쟁이와 가족 모두를 잃은 아이게서 조차 일말을 용서도 받지 못한다. 한편, 그를 추격하는 상관 역시 당에 맹목적인 충성만을 하다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의 병마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아니, 알고도 외면한다. 영화는 용서를 구하는 자와 그를 추격하는 자 그들을 스치고 가는 모든 것을 잃고 불신만이 남은 스탈린의 시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고문과 사형이, 이름 없이 매장되는 영화의 암울한 진행을 지켜보다 초반, NKVD요원들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을 어느새 떠올리게 된다. 민요에 춤을 추고, 넘치는 젊음의 에너지를 발산하던 그들은 누군가를 지목하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하는 이상한 시대에 있음을 다시 상기하게 한다.
간신히 추격을 피해 가며 만난 유가족들은 누구도 그에게 용서를 주지 않았다. 체념과 방기, 아니면 타오르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구원이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시지프스적 관점의 영화일까? 이 영화에는 죄와 벌에 쏘냐가 주는 용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으로 만난 유가족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신 그의 몸을 씻겨주는 행위를 통해 볼코노코프는 자신에게도 영혼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동선이 점차 파악이 되고 추격은 결국 그를 지붕 끝으로 몰아세운다. 체포조로 온 동료들은 이제 총을 겨눈다. 볼코노고프는 자신에게도 영혼이 있음을 안다. 구원은 얻어지는 것이 아닌 속죄의 과정 그 자체라는 사실을 그 여정을 통해 깨달았다. 두려움이 사라진 그는 투신한 자신의 팀원처럼 몸을 던진다. 영화에서 두 번의 추락이 나오지만 마지막은 마치 비상하는 듯한 모습으로 연출이 된다. 그는 마침내 육체라는 지옥에서 실존적 해방을 스스로 이뤄낸 것이다.
가해자를 위한 천국은 없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라는 제목은 결국 맥거핀이다. 그는 탈출도, 명분도 아닌 피가 피를 부르던 폭력의 시대에 질문 하나를 던질 뿐이다.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여 폭력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가? 전운이 감도는 현시대에 영화는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첫댓글 기다리고 기다리던 볼코노코프 대위의 이야기를 올려주셨네요.
ㅎㅎㅎ
감사드립니다~
꼭 보고 싶었지만 적은 상영관과 회차에 못보구 지나가서 아쉬웠던 귀한 이야기를
우리 카페에서 볼수 있게 되어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어느 시대이건
명분만 달리 존재해왔던 국가와 사회의 폭력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였습니다.
쉽게 용서하지 않아서 좋네요
뒤늦게 참회한다해도 피해로 인한 고통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조금씩이라도 정의가 우상향 중인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잘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