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날씨 때문 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곳 사람들의 대부분은 눈에 총기가 없고 어딘가 우중충하다. 이니셰린이라는 아일랜드 변두리에 있는 이 섬에 사는 이들은 가벼운 맥주 한잔이면 즐겁게 웃고 노래도 부르지만 조금만 수가 틀리면 거여이 상대를 비웃고 심한 말을 하고, 나아가 피까지 보고야 만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건) 마틴 맥도나 감독은 이 작은 섬에서 벌어지는 별것 아닌듯한 소동을 그려내며 그가 늘 해왔던 자신의 장기인 어떤 환경에 놓인 인물에게 주어진 갈등과 번민이 어떻게 사람과 관계를 바꿔내는 가를 주목한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파우릭과 콜름이라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해가 힘든 절교 선언과 그들과 얽혀진 인물들의 맺어지다 사라지는 인연의 과정을 통해 다양한 감상이 나오도록 은유적인 상징들을 심어두고 맥커믹 부인처럼 이 상황을 관조하고 있을 뿐이다.
파우릭은 절친인 콜름에게 절연과 침묵을 요구 받는다. 평생을 함께 할 벗이라 생각했던 그에게 터무니없는 말을 들었지만 이내 고민하길,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우리가 싸웠던가? 다시 찾아가 이유를 물어도 이젠 지겹다는 말과 자신의 음악을 완성해야 하니 방해 하지 말길 바란다고 한다. 거기에 또다시 귀찮게 한다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서 주겠다는 끔찍한 경고까지 남긴다. 파우릭은 술기운을 빌려 콜름에게 당신의 하잘것없는 음악보다 다정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일갈을 남긴다. 다음날 취기에 함부로 건넨 말들과 당신 음악에 대한 모독을 사과하게 된 지만, 집으로 날아든 것은 잘려나간 검지였다. 영화는 이들이 왜 이런 감정싸움을 하고 있는지 직접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 촌극은 이 섬에 내려진 유한한 인생과 바뀌지 않는 일상의 권태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불러온다.
콜름이 작곡하고 있는 노래의 제목은 이니셰린의 밴시다. 밴시는 원래 죽음을 예고하는 귀신이나 정령 같은 전설적 존재다. 파우릭은 콜름에게 요즘은 그런게 어디있냐 말하지만, 콜름은 물 건너에서 그저 지켜보며 이 상황들을 관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본토에서 서로를 죽이는 포성이 울리고 있지만 어떤 소식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이니셰린이라는 섬,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파우릭과 콜름은 죽음과 닮은 고립 속에서 소멸하고 있었다. 권태는 파우릭에겐 부정으로, 콜름에겐 인정으로 나타난다. 파우릭이 짐승을 집 안으로 들이고 여동생과 자신보다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도미닉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파우릭이 자신에게 닥쳐온 권태를 부정하는 방식이다. 홀로를 견디지 못하기에 무엇도 내려놓지 못한다. 반면 콜름의 절교 선언은 파우릭이라는 인간과의 단절보다 음악적 재능의 박약으로 부터 도주하려는 명분으로 보인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는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손가락을 잘라 파우릭의 집에 던지는 행위는 동시에 침묵을 강요하며 입술에 대던 검지 이기도 했다.
권태는 콜름에게 의미 없음의 세계였고, 파우릭에겐 이유 없음의 세계였다.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이 두려운 콜름은 노래와 함께 자신의 재능이 박약한 것이 아닌 손가락이 없다는 명분을 완성하기 위해 나머지 네 손가락을 모두 자른다. 그것은 파우릭과 이니셰린이라는 공간이 불러온 무지와 허무로부터 멀어지려는 발악이었다. 파우릭에게 콜름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자신보다 풍부한 학식과 연륜은 그와 함께 어울린다는 것 만으로도 자존감을 갖게 해주었다. 그런 그에게 하루아침에 지루하고 덜떨어진 인간 취급을 받으며 내쳐지는 순간 그의 남은 자존감도 바닥에 처박힌 것이다. 화가 난 그를 찾아가 이니셰린에서 가장 싫은 세 가지에 대해 일갈한다. 경찰관, 뚱뚱한 바이올린 연주자 그리고 세 번째를 말하려던 그는 일순 생각이 나지 않아 말을 얼버무린다. 아마도 그 세 번째는 파우릭 자신이었을 것이다. 똑똑한 여동생과 든든한 친구가 아니면 스스로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고 믿는, 그렇기에 결국 모든 것을 잃고도 이유를 모르는 바보 같은 자신을 차마 마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 안에서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한다는 모티프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 중심에는 상점 주인인 어라이어던 부인이 있다. 그녀는 알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유일하게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은 경찰인 페더다. 그는 두 개의 잔인한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전한다. 마치 가십을 다루듯 누군가의 죽음을 떠벌이고 심지어 본토에서 벌어지는 사형 집행에 동원되는 일화를 이야기하며 점심값을 버는 가벼운 일로 여기고 있다. 파우릭은 어떤가? 콜름과 어울리는 음대생을 돌려보내기 위해 그의 아버지가 임종을 맞을 준비를 한다는 거짓말을 한다. 돌고 도는 소식들은 ”죽음과 떠남“이다. 어쩌면 이니셰린은 그때의 아일랜드, 즉 당시의 본토를 축약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짐작해 볼 수 있다.
아일랜드에서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접하는 것은 밴시의 예언이다. 검정색 옷에 늘 어딘가에 우두커니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밴시는 매커믹 부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매커믹 부인은 두 개의 죽음을 파우릭에게 예언하고 그 대상이 동생인 시오반과 네가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말한다. 콜름의 말처럼 밴시는 이제 예언 대신, 관조를 하며 웃고 있을 것이다. 죽음이 운명의 결과물이 아닌 신화적 숭고함에서 사람의 말과 말로 전해진다.
영화가 막을 내리면 관객의 기억은 파우릭과 도미닉이 조우하던 초반으로 데려간다. 도미닉은 호수에서 주운 꼬챙이가 달린 장대를 파우릭에게 자랑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미닉은 경찰인 자신의 아버지에게 성추행과 폭력을 당하다가 파우릭에게 우정을 갈구했고 하지만 그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멀어졌고, 그의 동생 시오반에게 고백하지만 퇴짜를 맞는다. 그는 이제기댈곳이 없다. 절망에 빠진 남자를 구원하거나 사랑하는 여인을 얻으면 그도 어른으로 아버지라는 굴레에서 벗어날거라는 막연한 믿음은 안타까운 선택을 하게 만든다. 도미닉이 자랑하던 그 장대는 이제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시신을 건지는 것으로 사용된다. 섬의 모두가 바보로 무시하고 파우릭 마저 자신보다 덜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풍부한 어휘력을 지녔고 현명했던 사람이었다. <이니셰린의 밴시>에 오프닝 시퀀스는 마치 초월적 존재가 그 섬을 하강하고 엔딩에는 상승하며 조망하고 끝을 맺는다. 그 사이에 도미닉과 당나귀인 제니의 죽음은 그들의 희생은 가장 순수한 것들이 먼저 죽어 나가는 시대에 대한 비유로 보이기도 한다.
파우릭과 콜름으로 나눠진 두 사람은 현실과 예술이라는 갈림길 같은 존재로 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파우릭이 콜름의 집을 태우고 그들이 잠시 함께 본 풍경은 바다였다. 저 너머에 사라지고 있는 목숨들과 실존적 존재 이유를 찾는 당신들은 무엇이 다를까? 언제까지고 이 냉혹한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할까?
첫댓글 의미 없고 이유없다는 생각의 수렁은 빠지면 나오기 힘든 것 같습니다. 세계의 끝에는 (여자친구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도 아닌) 허무주의만 있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찾지 않게 되는 듯.
손가락은 그런 것이었군용. 극단적 행동을 왜 할까 이해를 못했는데 글을 읽고 나니 조금 이해가 됩니다. 리뷰👍최고에요.
음... 모닝 음료 17잔과 스벅 다이어리 겟을 찾는 것 같은 게 답일지도 모르겠어요. 권태에 작은 파열음이 나는 듯^^
끊임없이 허공에 날아다니는 파우릭의 수다스런 불만과
무서울 정도로 단호한 콜름의 단절을 보며
저 둘이 과연 친하기는 했었을까 싶기도 했어요.
그것은 한쪽의 이해와 양보의 일방통행은 아니였을까 싶기도 합니다.
조금씩의 양보와 조율이 가능했더라면
본토에서 자국민들끼리 전쟁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리라...
좋은 영화를 다시금 새겨보게 하는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
👍 영화 보는거 보다 소대가리님 리뷰글읽을면서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는것도 꿀잼이네요.
막 보고 한 후라 먹먹함이 남아있네요.
흥미로운 내용에 공감도 하고, 이마도 탁 치며 ! ㅎ
아껴두었던 글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