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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제사 드리던 시대는 끝났고 신약 시대에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찬송과 선행의 제사를 드린다
은성아, 히브리서를 공부한다는 것은 굉장히 복된 일이다. 모든 성경이 귀중하고 잘 배워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히브리서를 통하여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큰 차이를 확실히 배우게 된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신약 시대의 신자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 가톨릭의 잘못된 성경 해석과 교회 생활을 보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힘썼던 것들이 많이 무너지고, 점점 개신교와 가톨릭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교회 생활이 혼란스럽게 되어버린 오늘날 히브리서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고 개인과 교회의 신앙생활을 바르게 고쳐가기를 바라면서 최근에 나에게 보내온 히브리서에 관한 글을 보내주니 잘 읽기를 바란다. 나도 정말 많이 배우고 이전의 생각을 고치면서 서둘러 너에게 보내야 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읽고 나서 혹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다소 어렵고 신비하기까지 한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역사 속의 다른 어떤 영적인 인물들이나 혹은 우주의 그 어떤 영적 존재들보다도 왜, 어떻게, 얼마나 더 우월하신지에 대한 논의로 시작합니다. 이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진정한 제사장으로 오셨는데, 그의 제사장 되심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의 계열을 뛰어넘어, 마치 율법이 미처 주어지기 전인 아브라함 시대의 멜기세덱과도 같은, 율법 위의 신적인(divine) 계열로 오셨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은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며(“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7:19) 오직 예수의 제사장 역할만이 율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8장에서부터 10장까지는 예수의 오심이 구약(옛 언약)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어떻게 하여 예수님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우리에게는 확실한 보증이 되신 것인지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23-10:18을 보면 단 한 번의 제사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님을 더 좋은 제물(속죄 제물)이라고 강조합니다. 율법은 장차 나타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실체가 아니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드리는 똑같은 희생 제사로써는 하나님께로 나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제사 드리는 사람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제사 드리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겠습니까?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5-7; 시편 40:6-8 인용)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이 뜻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오직 한 번 바치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똑같은 제사를 거듭 드리지만, 그러한 제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오직 한 번으로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신 뒤에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시편 110:1 인용) 그리고 그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판이 되게 할 때까지”(시편 110:1 인용)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되고, 그로 인해 금생의 모든 비참함과 사망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9문). 이러한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이 바로 제사 제도였고, 그것은 장차 참 제사, 완전한 제사를 드릴 그리스도의 제사를 예표하는 그림자이었습니다(히 9:1-14). 하나님 자신이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인간 세계에 오셨고, 대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성자께서) 두 번째 아담(인간)이 친히 되셔서 의로운 희생을 치루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제사 제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0:18에서처럼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가 바로 예수님의 대제사장 및 속죄제물 되심의 결론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제사는 “오직 한번으로 영원히”(once for all) 완벽한 제사입니다. 율법의 모든 그림자와 모형은 이제 예수님에 의하여 다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하신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죄 사함을 얻기 위한 땅에서의 모든 종교적인 의식들은 불필요해졌습니다. 우리는 10:10에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그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거룩함을 입었다”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14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영단번의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온전케”라는 단어는 “완벽하게 하다”(teleioo)라는 동사의 현재완료형입니다. 즉, 예수님이 당신의 피로써, (믿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바울의 용어대로 하면, 의롭다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또한 하나님이 보실 때에 “완벽하게” 하셨으며 그 효능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영원한 직분입니다(히 7:24; 히 8:1). 다시 말해서,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제는 의로운 자로서 완벽하게 영원토록 세우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히 4:14-16; 10:19; 엡 3:12).
이제 이런 가르침을 마음에 두고서 오늘에 적용해야 할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설교자들 중에는 가정 제단, 새벽 제단을 쌓으라고 하거나 우리가 제단이 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배당 청소를 ‘성전 미화’라고 하고, 강단 꽃꽂이를 하면서 ‘성전 꽃꽂이’라고 말합니다. 예배당을 가리켜 ‘대성전’ ‘소성전’ ‘제1성전’ ‘제2성전’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제단이란 용어는 구약 시대에 성전 뜰에서 희생 짐승을 제물로 드리던 곳입니다. 소나 양을 잡아서 불사르는 제단인 번제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대속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히 10:10, 12) 예수님 이후의 2천 년 동안 교회는 더 이상 이런 구약 시대의 희생 제물이나 제단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은 ‘제단’이라는 말 대신에 ‘강단’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제단을 쌓는다’는 말을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개신교회에서 목사님을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라는 말 대신에 ‘예배당’ 또는 ‘교회당’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배당 안에는 제단이 아니라 ‘강단’이 있고, ‘성찬상’과 ‘세례대 혹은 세례반’이 있을 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소제를 제외하고는 짐승을 제물로 하여 제단에서 번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등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신자들이 제사를 드리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러 가면서 성전에 간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예배당(교회당)에 간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신약 시대 성도들은 예배드리는 곳, 즉 장소로서의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성령께서 내주(內住)해 계시는 성도의 몸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고전 3:16; 6: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단번에(히 10:10)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리심으로 더 이상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는 성전 제도가 필요 없게 되었고,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요 4:24).
한국 교회의 예배를 지배하고 있는 제사적 용어와 상징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당을 성전으로, 목회자를 제사장으로 보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축제적 응답’으로서의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지 않는 한,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 혹은 물질적인 복을 구하기 위해 제사 드리는 심정으로 예배에 임하게 됩니다. 이미 주어진 은혜와 복에 눈뜨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으려면 무엇인가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바치며 그 대가(?)를 바랍니다. 삶의 예배를 소홀히 하고 건물인 예배당에 모이는 공적 예배에 집착하며, 공적 예배와 삶이 분리되는 잘못에 빠집니다. 따라서 예배를 제사로 오해하게 할 만한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야 하는데 예배 시간에 자주 듣게 되는 ‘제물’, ‘제사’, ‘제단’ ‘성전’ 등의 용어들을 가능한 한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 교회와 종교개혁시대의 전통이고, 특히 장로교회의 전통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직도 건물 속에 제단을 마련하고 제단에서 미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성전이란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오늘날 대성전(大聖殿)은 교황에 의해 특전이 부여되어 있으며, 역사, 예술, 신앙적인 면에서 중요성이 인정되는 성당인데, 이중에 상급 대성전은 교황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대와 성년에만 열리는 성문이 있으니 예를 들어 라테라노 대성전, 베드로 대성전, 성 바오로 대성전, 성모 마리아 대성전(四大 Basilica)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급 대성전은 휘장, 종, 성가대 특별 복장의 사용 등이 특전으로 부여되어 있으며, 이에 해당하는 성전은 예루살렘의 성십자가 대성전, 카타콤바의 성 세바스티아노 대성전, 트란스테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 12사도 대성전, 빈콜리 성 베드로 대성전,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건물 내외를 아름답고 장엄하게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제단에서 촛대를 봉헌하고 십자가를 모신 후 제대 앞에 꽃을 봉헌하는 순서도 있습니다. 성체성사요 성찬례인 '미사(Missa)'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친 것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제사이며, 가톨릭 교회 생활 전체의 원천이자 정점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모든 직무나 사도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톨릭의 예전이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분별없이 개혁교회가 건물을 웅장하게 짓고자 하고, 내부 장식을 화려하게 하며, 특히 강대상 주변에 꽃꽂이를 많이 하여서 예배의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한다면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개혁교회에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성도들의 모임이요 교제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물론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인 교회당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당은 성도들이 모여 좋은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건물 때문에 찾기보다는 그곳에 복음이 있고 성도의 교제가 있기 때문에 찾게 될 때 그 교회는 참된 개혁주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히브리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영원한 제사로 모든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른 곳은 율법을 주던 시내 산이 아니라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는 말씀에서 이제는 제사를 드리는 땅의 생활을 다 끝낸 것을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온 산에 이른 자들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이며,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며,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의 뿌린 피로 인해 거룩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나가게 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불러냄을 받고 거룩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시온 산에 이른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다만 자신을 시온 산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택하심과 불러내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뿌림만 자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국에 이른 자의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 성도들이 이른 시온 산과 예루살렘은 이 지상의 장소가 아니라 하늘 성전을 가리킵니다. 시온 산과 예루살렘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것이 천상의 실제에 대한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도들이 예배할 때 이르게 되는 곳은 이 지상의 어떤 곳이 아닌 하늘입니다. 그 하늘은 우리가 만질 수 없는 곳이 아닙니까? 이런 대조를 염두에 두고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성도들이 이른 곳은 만질 수 있는 곳이었다고 먼저 말했습니다. 신약 성도들이 예배할 때는 신자들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늘에까지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로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예배하는 곳에는 하늘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제사는 구약 시대나 가톨릭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히 13:15-16)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의 제사”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선행의 제사”입니다.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는 제사를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뿐만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하도록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성전’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고 주의하자는 것입니다.
첫째로 교회의 직분자들이나 먼저 믿은 분들이 예배당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교인들이나 나중에 믿게 된 분들이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특히 설교를 하거나 대표기도를 하면서 예배당 건물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아마 예배당을 새로 건축을 했을 때 이런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 건축’보다는 ‘성전 건축’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구약성경을 공부할 때에 성전을 사모하고 사랑한 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교인들의 마음에 성전이라는 것을 교회나 예배당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전에 올라가는 시편을 공부하면서 우리도 이렇게 교회에 모이기를 사모하고 힘써야 한다는 강조를 하면 교인들의 마음에는 예배당 건물이 교회라고 하는 생각이 굳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공부할 때에 성전과 교회의 시대적 차이나 구속사적 의미에 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시켜야 합니다. ‘교회에 모인다’는 말보다는 ‘교회로 모인다’는 말이 더 안전할 것입니다.
셋째로 찬송가의 가사 때문에 잘못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주 영광 이 성전에 가득히 넘치네(찬송가 17장)”라는 찬송이나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찬송가 208장)”라는 찬송을 부르다 보면 무의식 중에 예배당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찬송가는 사람들이 작사를 하기 때문에 가끔 오류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348장의 “마귀들과 싸울지라”라는 가사입니다. ‘마귀’는 하나인데, ‘마귀들’이라고 함은 신학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은성아, 좀 복잡한 것도 많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대단히 중요한 점을 지적해 주고 있지 않니? 이제는 제사를 드리지 않고, 그래서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나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고 우리를 온전히 의롭다 하심을 기뻐하며, 어떤 핍박이나 어려움도 믿음으로 이기며, 찬송의 제사와 선행의 제사를 드리면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히 13:20-21)라는 말씀에 감사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