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31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12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할머니의 생신
집안 어른의 생신이 되면 자손들은 온 동네 사람들을 다 초청하기도 하고, 그럴 수 없어서 몇 집의 어른들 만이라도 초청하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초청해서라도 아침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정말 먹을 것이 아주 부족했습니다. 그렇지만 할머니 생신이 되면 작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음력으로 7월이었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여름 방학의 막바지에 이를 때였습니다. 그때는 정말 먹어보기 힘든 강낭콩과 완두콩을 넣은 흰쌀밥을 먹을 수 있는 흔하지 않은 기회였습니다. 할머니의 생신이 다가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동네 사람들도 있었고 나도 그날을 몹시 기다렸습니다. 이모할머니와 진외가의 어른들이 많이 오셨고, 내 또래의 아저씨 항렬의 아이들도 많이 왔습니다.
할머니께 드릴 선물과 여러 가지 맛있는 과일과 과자도 많이 들어왔고, 어린 우리들에게 근사한 옷을 선물하는 어른들도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음식솜씨가 좋은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초청 되어 며칠 전부터 잔치가 벌어집니다. 두부도 만들고, 전도 부치고, 고기와 생선도 잘 다듬어 파리가 꼬이지 않도록 잘 간수해 둡니다. 나물도 채소도 잘 다듬어 두어야 합니다. 냉장고도 없고, 음식 재료들이 아주 쉽게 상하는 8월 중순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생신 잔치는 아침 식사에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초대할 사람들의 명단을 어린 제게 작성하게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초대할 명단을 만드실 때, 아이 낳고 먹을 것이 없어서 젖이 안 나온다는 애기엄마, 병이 들어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소문 난 아저씨, 허리 굽은 노인, 우리 집에 일 나오시는 분들을 초청 명단에 우선순위로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내게 ‘누구를 아침 먹으라고 할까?’하고 상의하셨습니다. 사실 나는 그런 사람들 보다는 훈장님하고, 학교 선생님하고, 구장님(이장님) 같은 분을 초청하였으면 좋을 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런 분은 별로 초청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았습니다. 초청 명단이 작성되면 우리들은 전날 저녁에 그 집을 찾아가서 “내일 아침 저희 집에 오셔서 아침 잡수시래요. 아침 잡숫지 마시고 집에 꼭 오세요.”라고 메시지를 보내러 집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때의 파티는 아침에 대부분 이루어졌습니다. 저녁에는 등불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소고기 미역국과 흰쌀밥이 고봉으로 올라오는 아침 밥상만 보아도 행복하던 때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불구자들을 초청하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어릴 적 할머니 생신에 초청하던 그 어른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때 그분들은 지금 아마 80이 넘은 고령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분들은 아들딸들이 효성을 다하여 모셔서 지금은 편안하게 사실까 아니면 지금도 고생하시며 사실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파티(party)문화가 가장 먼저 발달한 나라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정서가 어떤 나라보다도 더 발달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많이 나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가진 것을 쪼개어 정성을 다해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잔치에 초청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잔치에 초청하여 배부르고 즐겁게 시간을 만들어 보내게 할 것입니다. 의인이 되어 하느님의 잔치 상에 초대 받을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나 그 초청이 이기적이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어떤 목적이 있다면, 하느님의 잔치 상에 초대 받지 못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옛날에는 잔치를 그렇게 자주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시골에서는 어느 집 잔치가 언제 있는지 모두 손꼽아 기다리던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파티가 열리지만 그 파티에 초대 받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리고 부자들을 위한 잔치는 지금도 많이 벌어집니다. 워런 에드워드 버핏(Warren Edward Buffett)과 점심식사를 위해서 5억 원을 준비해야 한답니다. 그렇게 비싼 파티는 지금도 열리고 있답니다. 그러나 워린 버핏은 그의 재산 대부분을 기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갑부들은 아직도 그런데 쓰는 돈은 인색한 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늘 말씀이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성모의 집이나 빈첸시오의 집에서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는지 잘 보고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작은 실천이 필요할 때입니다.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1-4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2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3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축일10월 31일 성 볼프강 (Wolfgang)
신분 : 주교
활동 지역 :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활동 연도 : 930-994년
같은 이름 : 볼판고, 볼판구스
독일 남서부 풀링겐(Pfullingen)의 백작인 슈바벤(Schwaben) 가문의 후손인 성 볼프강은 어린 시절 가정에서 개인교수에게 교육을 받고 이어서 라이헤나우(Reichenau) 대수도원과 뷔르츠부르크(Wurzburg)에서 수학하였고, 그의 친구인 하인리히와 더불어 뷔르츠부르크와 트리어(Trier)의 대성당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친구인 하인리히가 956년에 트리어 교구의 대주교가 되자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구 개혁과 교회 쇄신에 앞장서는 하인리히 대주교의 성실한 협력자가 되었다. 하인리히 대주교는 964년 선종하였다.
그 후 성 볼프강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수도생활을 실천하고자 아인지델른(Einsiedeln)의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다. 그의 뛰어난 학식과 영성을 알아본 수도승들이 그의 가르침을 청하면서 성인의 명성은 곧 나라 전체로 퍼져나갔다. 968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의 성 울다리쿠스(Uldaricus, 7월 4일)에게 사제품을 받고, 오늘날의 헝가리 지역인 판노니아(Pannonia) 지역까지 침략해 정착한 마자르족(중앙아시아 출신 유목민족)에 대한 선교활동을 하던 중 972년 레겐스부르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즉시 교구 내의 성직자와 수도원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여러 지역을 다니며 선교활동에 직접 참여하고 설교했으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교구민으로부터 ‘위대한 자선가’로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황제를 수행하여 프랑스를 여행하였고, 바이에른(Bayern)의 공작의 아들로 후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성 헨리쿠스 2세(Henricus II, 7월 13일) 공작의 개인교수로도 활약했다.
하지만 성 볼프강 주교를 시기한 이들의 모함으로 교구에서 물러난 그는 실망하기보다는 평소 소망했던 은수자의 삶을 살고자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다.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 지방에 있는 볼프강 호숫가에 성당을 짓고 말년을 보내고자 했다. 볼프강 호숫가에 있는 장크트볼프강(Sankt Wolfgang)이란 도시는 바로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성인의 상징으로 도끼가 등장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볼프강 성인이 호숫가에 성당을 지을 장소를 찾을 때 산 아래로 도끼를 던져 정했다고 한다. 그는 오스트리아 북부를 여행하던 중 병에 걸려 린츠(Linz) 교외의 푸핑겐(Puppingen)에서 선종하였다. 1052년에 교황 레오 9세(Leo IX)에 의하여 성인품에 오른 후 장크트볼프강의 성 볼프강 성당은 주요 순례지가 되었고, 1481년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하엘 파허(Michael Pacher)는 성 볼프강과 성 베네딕투스 사이에서 성모 대관이 이루어지는 제단화를 제작했다. 그는 볼판구스(Wolfangus, 또는 볼판고)로도 불린다.
오늘 축일을 맞은 볼프강 (Wolfgang)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