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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 (양) | +(양) | 중 | -(음) | -(음) |
오행 | 목 | 화 | 토 | 금 | 수 |
오방 | 동 | 남 | 중앙 | 서 | 북 |
오상 | 仁(興仁之門) | 禮(崇禮文) | 信(普信閣) | 義(敦義(門) | 智(肅靖門) |
오색 | 청 | 적 | 황 | 백 | 흑 |
사상 | 소음 | 태양 |
| 소양 | 태음 |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유교도덕적인 오상(五常), 즉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 오행과 관련된다. 구체적으로 인(仁)은 목(木)과 동(東)에, 의(義)는 금(金)과 서(西)에, 예(禮)는 화(火)와 남(南)에, 지(智)는 수(水)와 북(北)에, 신(信)은 토(土)와 중앙에 연결된다.
음양오행설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조선이 개국하고 도읍지를 정할 때 오행에 기초했다.
조선의 천도 후보지로 계룡산 신도안 터, 서울의 무악 터(현재의 신촌), 서울의 한양 터(현재의 사대문안)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었다, 결국 무학 대사의 인왕산 주산론이 채택되어 현재의 사대문 안을 도읍지로 정한 것이다.
도성 안은 성을 쌓고 사람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4대문을 만들었다.
1396년(태조 5년) 9월 성문이 완공되었다.
이른바 동대문을 仁(興仁之門), 남대문을 禮(崇禮門), 서대문을 義(敦義門), 북대문을 숙청문(肅淸門)이라 했다. 후에 숙정문(肅靖門)이라 개칭했다. 중종실록에는 북정문(北靖門)으로, 선조실록에는 숙정문(肅靜門)으로도 표시되어 있다.
다른 4대문과는 달리 숙정문(肅靖門)은 이름도 여러 번 바뀌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肅靖門)을 폐쇄하였다. 그리고 통행을 금지시켰다.
숙청문(肅淸門)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
다만 한재(旱災: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崇禮門: 南大門)을 닫았다.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볼 때 북(北)은 음(陰)이고 물이며, 남(南)은 양(陽)이고 불이다. 한재(旱災)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기 위해서다.
숙청문을 평소에는 닫아두었다. 그 까닭은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음(陰)이 왕성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진다고 여겼다. 그것은 이 문이 음방(陰方: 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이었다.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글이다.
우리민족에게 가장 치욕스럽게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병자호란이다.
중국 청나라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남한산성을 에워싼다. 결국 인조는 1637년 1월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항복 의식을 치른다. 볼모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이 된다. 그리고 조공을 바치기로 강화를 체결 한다. 거기에 여자는 성노리개로, 남자는 노비로 삼기위해 일반인 50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소현세자 세자빈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도 함께 인질로 잡혀 심양으로 간다. 처음에는 정숙한 세자빈이었지만 후에 억척스러운 여인으로 변한다. 청나라에서 토지를 빌리고 인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확장한 후 노예시장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사서 농사를 지어 한 해에 무려 3,319석의 곡식을 거두었다. 경제에 눈을 뜬 강빈은 조선에서 면포, 종이, 모피 등을 들여와 청나라 각처의 시장에 공급했고,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과 약재까지 가져다 팔아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강빈은 그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거리에서 매매되던 수많은 조선인 노예들을 사들여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선행을 한 강빈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녀의 인기가 높아짐을 제일 미워한 사람이 인조였다.
훗날 인조는 강빈에게 모함을 씌워 사약을 내린다. 이런 짓거리를 한 사람이 우리나라의 지도자였다.
건국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우리 나라를 가난에서 해방시킨 박정희 대통령, 사업보국(事業報國 : 업을 일으켜 국가의 은혜를 갚는다)의 사훈(社訓)을 내걸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켜 우리 나라 경제의 20% 이상 기여하는 삼성을 핍박하는 것을 보면 오늘 날의 지도자도 인조에 버금가는 지도자들이 아닐런지?
청나라에서 고향으로 귀국한 여성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다. 이 발음이 화냥녀로 불리게 되고, 자녀들을 화냥녀(還鄕女) 자식이라 하였다.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혀간 처녀가 낳은 자식을 멸시하여 부르는 말이 호로(胡虜)자식 또는 호로(胡虜) 새끼다.
환향녀(還鄕女)는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뜻인데 왜곡해서 ‘행실이 나쁜 여자’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해 조선 처녀들의 성(性)이 청나라 사람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밟혀서 조선여인의 성에 관한 정숙한 이미지가 나빠져 사회문제가 되자 인조가 북한산 숙청문 쪽에서 내려오는 홍제천 물로 여성이 성기를 세척하면 처녀로 인정한다. 는 왕명도 내렸다.
그 후에 숙청문(肅淸門)을 숙정문(肅靖門)으로 개명하여 불렀다. 淸(맑을 청)을 靖(편안할 정)으로 고친 것이다. 사실 숙청(肅淸)은 ‘꼼꼼히 청소하다’란 뜻이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정적, 반대파 등을 제거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본래 의미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정화의 개념이었다.
인생 살이는 참 아이러니 하다.
박원순은 우리나라 대표적 페미스트다. 1993년 국내 최초로 성희롱 사건 변호를 맡아 승소했고, 그 후에도 여성의 성희롱 사건의 변호를 맡아 성공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출세하는데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했던 그도 그의 전직 비서가 제기한 ‘미투(Me Too)’ 의혹에 연루되면서 심적 부담감으로 인해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자살한 장소가 숙정문(肅靖門) 부근이라고 한다.
숙정문은 북쪽이고, 음의 자리고, 물의 자리고, 지(智)의 자리다.
삶이 양(陽)이면 죽음은 음(陰)의 자리다. 남자는 양(陽)이고 여자는 음(陰)이다.
죽음에 이른 원인이 여자이고, 자기 자신을 기만 하는 행위도 음(陰)이다. ‘미투(Me Too)’운동에 관련됨도 음(陰)이다.
남에게 원한을 많이 남기면 그 벌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선열들의 동상은 무자비하게 철거해도 묵인하고, 세월호 천막은 몇 년씩 법을 어기면서 까지 보호해 줌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로 부터 원한을 쌓았을 것이다.
법망(法網)은 용케도 피할 런지는 모르지만 하늘의 그물은 보이지 않아도 촘촘하다.
정치 지도자들은 남의 단죄에 앞서 자신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첫댓글 김공의 글을 읽다보면 오묘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끌려가는 느낌이구료
과거에도 그랬지만 요즘들어 신구의 학문이 크게 정진한 느낌을 주는구려
감명깊게 잘 읽고 가지만 짧은 소견이라 제대로 소화시켜 내 마음속에 보관이 잘 될런지 모르겠소
곧 잊어버리까 두려워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