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길재단에는 길병원, 가천의과학대, 경원대, 경인일보 등이 포함돼있다.
1958년 인천에서 '이길여 산부인과'에서 시작해,
그 시절 여자 혼자의 몸으로, 그녀는 50년 만에 이런 공익재단을 이뤄낸 것이다.
"지금 와서 보니 '내가 그렇게 큰일을 했어?'라며 나도 놀란다. 이런 걸 잊고 살았다.
처음부터 큰일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저 열심히 일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
―회장께서는 '나는 일과 결혼했다'는 말씀도 했다는데.
"그건 기자양반들이 지어낸 얘기다. 일하다 보니 결혼을 못한 것일 뿐이지."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일반적인 욕망(欲望)과는 다른 욕망을 가졌던 것인가?
"당시 시대상황 때문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살 거냐'고 하면,
'결혼해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 거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왜 우리나라는 일제하에 살아야 했나' '왜 6·25가 났고
우리는 왜 조국을 지키지 못했나'하는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나는 여자라서 군대도 안 갔고, 전쟁통에도 가족 한 명 죽지 않았다.
그래서 편안하게 의사가 된 것이 한편으로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미안했다."
―그 시절 운영하던 병원 앞에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는데.
"내가 무료로 진료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못 냈던 것이다.
수술받기 전에 보증금 내라고 하면, 돈 없는 사람은 당장 죽게 생겼는데도 그냥 가겠다고 한다.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나? 보증금 없이 수술을 해주게 됐고,
매번 보증금 안 받는다고 일일이 설명할 수 없어서, 병원 앞에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고 써붙인 것이다.
가난한 사람한테 돈 안 받아도, 있는 사람은 가져오거든.
그리고 의사들이 그 돈 안 받는다고 해서 굶어 죽지도 않고."
―어쩌면 '남들에게 퍼주는 것'을 업(業)으로 삼아왔는데, 어떻게 큰 부(富)와 성취를 이뤘나?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고 소문이 나니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왔다.
다른 의사가 10명을 치료할 때 난 100명을 치료했다.
다른 병원에서는 10명의 환자가 '그 병원 가면 병이 낫는다'고 홍보할 때,
내 병원에서는 100명의 환자가 홍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용한' 병원으로 소문이 났다.
환자가 몰려드니 병원을 새로 짓고, 병원이 커지니까 또 환자가 밀려들고,
이렇게 해서 자꾸자꾸 커진 것이다."
―재단 모토가 '박애·봉사·애국'이다. '애국'이란 말은 잘 안 쓰는데.
"소속 의사들이 '박애와 봉사는 촌스러워도 이해는 하지만, 애국은 뭡니까'하고 많이 묻는다.
당시에는 우리 국민이 돈이 없어 치료 못 받고 죽는 것은 막겠다는 결심,
이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먹고살아 갈 수 있는 인재를 기르고 영입하는 것에 마음이 바쁘다."
―돈을 많이 벌었는데 본인을 위해 얼마나 쓰나?
"젊었을 때는 '돈 많이 벌었다'는 말이 가장 듣기 싫었다.
돈 벌려고 의사 된 것도, 돈 벌려고 환자를 열심히 돌본 것도 아니다.
나는 우리 의사들에게 '내게는 금반지 하나가 없다.
열심히 하라는 것은 의사들의 의무니까 그렇지, 내게 돈 벌어 달라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가천길재단은 비영리 공익법인이라, 내 개인 재산과는 상관이 없다."
―자녀가 없으니 재단은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
"자식을 주기 위해서 의료법인이나 학교법인을 한 것은 아니다.
가족(재단 사람) 중에서 재단을 잘 운영할 수 있는 인재가 나올 것이다."
―후계자에게서 어떤 점을 중시하나?
"능력과 품성이다. 박애·봉사·애국을 잘 실천할 수 있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회장께 많이, 호되게 혼난다고 들었다.
"난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걸 많이 혼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난 열심히 안 하는 것과 잠 많이 자는 것을 보면 혼낸다.
주변 사람들한테 '4시간 이상 자면서 성공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4시간 이상 잤던 기억이 거의 없다.
잠을 조금 자서 주어진 내 인생보다 3배 정도 더 산 것 같다."
―회장은 스스로를 '멈추기를 거부하는 바람개비'라고 표현했다.
재단 설립 50년이 됐는데 여전히 멈출 생각이 없나?
"멈추면 죽는 것이다. 젊어서도 '난 죽을 때까지 환자를 볼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난 일하는 게 너무 행복하고 재미있다. 내 손으로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는데,
다 죽던 사람이 뻘떡 일어나는데 어찌 즐겁지 않겠나."
―일 말고 다른 취미는?
"나는 어렸을 때 많은 것에 호기심이 많았다. 육상, 노래, 무용 같은 것을 모두 잘했지만
당시 여건이 안 좋아 배우질 못했다. 요즘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면
'노래를 좀 더 해볼 걸' '춤을 더 배웠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내 살아온 길에는 후회가 없고 너무 만족스럽다.
잘난 척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다시 태어나도 결혼을 하지 않고 똑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결혼 안 하겠다'라는 말을 왜 꼭 집어넣나?
"결혼 했으면 이렇게 못 됐을 테니까.
나는 한번 무슨 일을 하면 몰입해서 끝을 보는 성격이다.
결혼했으면 남편한테 매달렸을 것이고, 자녀들한테 모든 것을 걸었을 것이다."
―가까운 지인에게 "집에서 파티를 하고 사람들이 우르르 떠나고 나면 굉장히 허전하다"고 말했다는데.
"내가 그런 말을 했나? 난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미국 유학 시절, 다른 친구들이 외로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난 눕기만 하면 바로 잠들었다.
지금도 '혼자 사니까 집에 들어가면 외롭지 않으냐'고 그러는데,
감각이 둔한 건지 전혀 모르겠다. 누가 있으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 같다."
―재단 50주년인데 마지막으로 빼먹은 말씀을 한다면.
"50년을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런데 나 혼자 노력으로 된 게 아니라, 내 말을 잘 들어준 학생,
치료하니 나아준 환자들 덕분으로 이렇게 이뤄냈다. 내가 아니었으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 자리에서 의사가 됐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다른 사람보다도 훨씬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내 생각이 옳았고, 그 음덕(陰德)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길여 회장은
1932년생으로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메리이머큘리트병원과 퀸스종합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쳤고,
일본 니혼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 '이길여 산부인과'를 개원, 1978년 여의사로서는 국내최초로 의료법인을 설립했다.
현재 길병원 이사장, 경원대학교 총장, 경인일보 회장, 가천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요즘 그녀는 "좋은 인재를 모셔오는 게 내 임무"라며,
기초의학과학 분야의 최고 인재 영입에 무한(無限)투자를 하는 중이다.
작년에 영입한 바이오에너지분야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븐 추 박사에게는
백지수표를 제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계적인 뇌과학자 조장희 박사와 암당뇨 분야의 권위자인 미국립보건원의 김성진 박사도
그녀가 나서서 영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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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958년 이길여산부인과로 출발한 가천 길재단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아 이길여회장은
- 17일 조선인터뷰를 통해 자신과 길재단의 의료활동은 애국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진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