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판윤 일봉 정공 유허비명 서문을 아울러 붙이다漢城判尹逸峰鄭公遺墟碑銘 幷序
한성동(漢城洞)은 영주(榮州) 치소 동쪽 10리쯤에 있다. 옛 한성 판윤(漢城判尹) 일봉(逸峰) 정공(鄭公)이 물러나 쉰 곳인데, 마을을 이것으로써 이름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일컫고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도복(道復), 자는 내지(來之), 일봉(逸峰)은 호이고, 봉화(奉化)는 본관이다. 고조는 공미(公美)니 고려 정의대부(正義大夫) 호부령(戶部令)이다. 증조는 영찬(英粲)이니 상호군이다. 조부는 균(均)이니 보문각 제학이다. 부친은 운경(云敬)이니 형부 상서(刑部尙書)인데 전법(典法)이 흔들리지 않아 조야에서 시호를 ‘염의선생(廉義先生)’이라 하니 《고려사》 및 《해동명신록》에 여러 번 보인다. 모친은 영주 우씨(榮州禹氏)이니 산원(散員) 연(淵)의 따님이다.
원(元)나라 지정(至正) 신묘년(1351)에 공은 영주에서 태어났다. 형제가 3명인데, 맏이는 도전(道傳)이니 호가 삼봉(三峰)이고, 둘째는 도존(道存)이니 관직이 참판이고, 막내가 곧 공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출중한 재주가 있고 학문이 이미 이루어져 진사에 합격하고, 홍무(洪武) 을축년(1385, 우왕1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태조 3년 갑술년(1394)에 승선(承宣)으로부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올라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포상으로 가선대부에 제수되고 좌윤(左尹)으로 이직하고 성균관 대사성을 겸하였다. 이때 나라의 초창기를 당하여 고려 말을 이어 불교에 빠지니 선비들의 추향이 가는 곳이 많고 이단의 가르침이 뒤섞여 나오자, 삼봉(三峰) 선생이 심기리(氣心理) 3편을 지어 밝게 분변하였는데, 공이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더불어 이 책에 주석을 나누어 달고 번갈아 강론하여 밝혀 사방에 바람을 일으켜 유학의 교화가 크게 떨쳐서 마침내 한결같이 정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얼마 후 가의대부(嘉儀大夫) 판윤(判尹)에 올라 성균관사(成均館事)를 겸하여 관장하고 태묘공신(太廟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무인년(1398 태조7)에 이르러 맏형이 화를 입고, 중형 또한 함도(咸都)에서 불행을 당하였는데, 성군의 밝음이 계속 비춰주고 옛 공훈을 추념해서 무인년의 일로써 공을 연루시키지 않았다. 연달아 문하찬성(門下贊成)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마침내 영남으로 내려오니 곧 돌아가신 부모의 산소 아래였다. 이곳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노년을 마쳤다.
선덕(宣德) 을묘년(1435 세종17) 9월 10일에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85세였다. 순흥(順興) 소지동(小池洞) 자좌(子座) 등성이에 안장하였다.
아, 지금 공의 세대가 이미 5백 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라에 덧없는 변고가 많아 공이 지은 기록이 흩어지고 없어졌는데 근년에 《태종실록》을 보니,
정도복을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으로 삼는다. 도복은 도전의 아우인데 도전이 국정을 담당하여 권세가 조야를 누를 때 도복을 불러 서울로 오게 하자, 도복이 사양하기를 “권세와 지위는 오래 가기 어려우니 믿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 한미한 가문에 영화가 이미 지극하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마땅히 물에서 낚시하고 산에서 농사지으며 저의 여생을 마칠 것입니다. 청컨대 형님은 번거롭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 뒤 성주의 유학 교수(儒學敎授)가 된 지 7년에 오래되어 부름을 받았다.
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이 마음을 보존한 바를 알 수 있다.
한창 공의 가문이 융성하고 빛나던 날 공이 만약 영달의 길에 뜻을 두었더라면 공의 재덕의 뛰어남으로 무슨 관직인들 못했으랴만 항상 가득차면 넘친다는 경계를 지니고 권세와 이익을 즐기지 않았다. 맏형과 중형 두 공이 서로 이어 나라에서 죽기에 이르러, 벼슬을 간절히 사양하고 돌아가길 청하여 장수를 누리고 편안히 죽으니, 어찌 옛날의 이른바 ‘명철보신의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이 입조한 이력은 그 상세함을 알 수 없다. 오로지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오랫동안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면서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를 세워 우리 국조 5백 년 문명의 다스림을 연 것은 실로 공의 형제가 창도한 힘이 큰 것이 있다. 후인들이 문천(文川)에 모현사(慕賢社)를 세워 부친 염의 선생을 제향하고 공을 배향하니 숭상하고 보답하는 전례가 또한 지극하다.
한성동 한 구역은 그대로 당일의 남은 자취이니 차마 황폐하게 둘 수 없어 여러 후손들이 바야흐로 비석을 세워 옛터를 표시하여 갱장(羹墻)의 사모를 깃들이고자 하여, 후손 종선(鍾善) 씨가 문중의 의논을 가지고 보잘것없는 나에게 비명(碑銘)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가문의 선대는 실로 공의 중형 참판공에게서 나온 바이다. 선대의 세의로써 책임을 지우니 내가 비록 노쇠하고 문장의 재능이 없으나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참람함을 잊고 행장에 의거하여 서술하고 명(銘)으로써 잇는다.
성군의 시대에 무리지어 가니 聖世彙征
시운에 응하는 어진 보필이요 應運之良弼也
급류에 용감히 물러나니 急流勇退
기미를 아는 명철한 이로세 知幾之明哲也
예악으로 근본을 돌이켜 禮樂反本
나의 아름다운 덕 보전하네 葆我令德
고을 이름 오히려 남아 있으니 坊名尙遺
촌 늙은이가 전하여 말하네 野老傳說
저 물가와 저 언덕에는 某水某丘
지팡이 흔적 신발 자취 남아있네 杖痕屨跡
비석이 높이 서니 螭龜載屹
임천에 광채를 더하네 林泉增色
아득히 높은 풍모 우러르니 緬仰高風
지나는 객 반드시 공경할지어다 行過必式
삼봉(三峰) 선생 :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을 말한다.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조선 개국 공신이다. 저서로는 《삼봉집》이 있다.
심기리(心氣理) : 정도전이 노장과 불가(佛家)를 비판하고 유학을 찬양한 글이다. 심난기(心難氣)·기난심(氣難心)·이유심기(理諭心氣)의 3편으로 되어 있다. 권근이 주석을 덧붙여 완성한 것으로 《삼봉집》 권10에 실려 있다.
무인년(1398) :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해이다.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한다. 세자 방석과 정도전등이 살해되었다.
모현사(慕賢社) : 현재 경상북도 영주 이산면 신암리에 있다.
白渚文集(下), 배동환 저, 김홍영, 남계순 역, 학민문화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