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미래는 현재를 과거로 만들면서 생겨난다. 인연이라는 말은 인과의 연결 그러니까 직접과 간접을 엮여서 만들어진 끈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끈 하나를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그 수많은 우연들은 어떤 분 기점을 만들어낸다. 살아오면서 했던 그 많은 선택들을 돌아보면 거처를 옮기고 학업과 취업, 만남과 이별 심지어 어느 날 고른 메뉴 때문에 찾게 된 식당까지. 만약 다른 쪽을 골랐다면 인생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까? 설령 지금까지 했던 모든 것들에 반대 지점을 택했다고 한들 순전히 내 의지로만 만들어지는 건 없다. 모든 결말엔 자신을 지탱하는 외부의 요인이 있고, 운이란 어떻게 작동할지 모르는 거니까. 인생이 그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예술은 그 과정을 조용히 들춰보는 일이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 복수의 시간들을 따라가며 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색깔과 내가 서있던 그 자리에 서있는 누군가와 낯선 어딘가에서 당신의 꿈을 꾸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려는 시도다.
영화의 시작은 뉴욕의 어느 바에서 동석한 노라와 해성, 아서를 관찰하는 관객의 시점으로부터다. 맞은편에서 그들의 관계를 유추하듯 어느 쪽이 커플인지 친구 혹은 가족일지를 판단하려 한다. 그러다 줌인으로 클로즈업되는 순간 그건 당신의 판단에 맞긴다는 듯 노라는 미소를 짓는다. 후반부에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될 이 오프닝에 영화는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모두 담았다. 현재(노라)가 나아가도록 놓아주러 온 과거(해성)와 현재와 과거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려고 하는 미래(아서)가 한자리에서 통하지 않는 서로의 언어로 어긋나고 맞춰지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12살의 시간을 24년간 각자의 방식으로 경유했고 7년을 온전한 자신을 만들어가려 했다. 노라의 관객을 향한 미소는 당신이 어떤 식의 이야기를 만들어도 이미 만들어진 비가역적 진실은 바뀌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프닝을 부연하듯 영화는 타임라인을 노라가 나영이 던 때로 돌린다. 반에서 1,2등을 다투던 너무도 좋아했던 단짝 친구 해성과 함께 하는 시간은 이제 태평양과 시차라는 벽에 막힌다. 부모의 결정으로 이민을 떠나지만 노벨상이 목표라는 나영은 한국이 좁다고 말하고 좋아했던 해성보다 자신의 미래를 더 생각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나영은 더 이상 한국이름을 쓰지 않고 극작가를 꿈꾸는 그녀는 이제 노라라는 인생을 산다. 목표 역시 노벨상에서 퓰리처로 바뀌었다. 해성 역시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다니며 보편의 한국인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우연히 sns를 통해 서로가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14시간이라는 시차를 넘어 연결되지만 12살의 그때를 간직하고 싶은 이와 그때보다 진전된 관계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은 그들을 갈라놓는다. 그 사이 해성은 중국으로 연수를 떠나고 노라 역시 예술가 레지던시를 떠난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연인을 만나게 되고 또다시 흐른 12년은 자신의 삶에 확신을 가져야 하는 어른으로 만든다. 노라는 레지던시에서 만난 유대인 아서와 이미 결혼을 했고 해성은 어중간하다 싶은 스스로를 다잡으려 연인과의 만남을 유예하고 있다. 해성은 이제 노라를 만나러 뉴욕으로 간다.
<패스트 라이브즈>라는 제목은 전생이라는 의미하는 단어를 복수형으로 썼다는 게 중요해 보인다. 뉴욕에서 만난 노라와 해성 사이에는 반가움과 어색함이 함께 한다. 그들은 12살의 해성과 나영인 동시에 36살의 해성과 노라이기도 한 것이다. 두 번의 이민을 거치며 자신이 원하던 꿈을 좇아 전에 생을 버려두고 온 노라와 파란색으로 기억되고 반복되는 가장 소중한 12살에 나와 함께 했던 생을 놓아주려는 해성은 이제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려고 한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아서는 미래처럼 불확실과 믿음을 동시에 품고 있다. 꿈을 꾸는 노라는 한국어로 잠꼬대를 하고 그 꿈속은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음에 불안하기도 하고 이 이야기 안에서 자신은 백인 빌런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아쉽기만 하다. 하나, 관계와 관계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충돌 대신 인연이라는 생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데 집증하고 연극이 아닌 영화여야 가능한 연출을 통해 12살과 36살의 몽타주가 교차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을 통해 영화는 영어와 한국어가 만들어내는 침묵과 떠나가는 이들을 담는 트래킹 숏으로 담아내는 감정의 간극, 때마침 자신의 전생인 12살을 보내고 그 비어버린 마음을 눈물로 채우는 노라를 기다리는 건 12살의 나영의 자리에 서있던 아서의 품이었다. 이는 자칫 통속의 삼각관계로 이어질 법한 이야기대신 과거를 보내고 미래로 향하는 현재의 모습을 그려내는 영화적 연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과 우연 사이에서 서로가 놓친 것들과 놓아주어야 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영화가 이민자에 관한 이야기임을 간과해서도 안된다.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셀린느 송은 자신이 겪은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 속에 녹여냈다. 영화감독인 아버지를 따라 이민을 가는 딸이라는 설정 역시 송감독의 아버지가 한국에서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던 송능환 감독이다. 극 중 서류를 정리하며 담배를 피우던 나영의 부모가 아이들이 들어오려 하자 방으로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이야기하라고 하는 장면은 내가 밟은 전철을 너희는 밟지 말라는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세기말> 이후 자신의 예술이 대중과 언론에게 무시를 당하던 그때 이민을 결심하던 송능환을 떠오르게 한다. 거기에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노라와 아서가 공항 검색대에서 취조에 가까운 질문을 받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노라를 통해 아시아인 여성 예술가가 받고 있는 처우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노라가 목표로 하는 상도 마찬가지다. 노벨 문학상을 꿈꾸던 소녀는 자라 극작가를 목표로 하며 퓰리처상을 작가가 되고는 토니상을 말하게 된다. 성장하며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꿈의 크기는 작아지는 것을 보여주며 이민자가 느끼는 한계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녹여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잠깐이지만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곡이 흐른다. 다시 생각하면 그들이 서로에게 건네던 ‘안녕’이라는 말로 치환이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해성에게 12살의 안녕은 다음을 기약하는 안녕이었다. 나영은 노라가 되었고 그 안녕은 서울에 묻어둔 안녕이었으므로 전해지 못한 것이 되었지만 뉴욕에서 다시 전하는 안녕은 그들이 이번 생에 갖지 못했던 사랑은 너무 아픈 사랑이라 사랑이 아니었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그렇기에 해성이 말하는 너의 남편이 좋은 사람이라 슬프다는 말은 어딘가 후련하면서도 아리게 들린다. 인생은 회전목마처럼 돌고, 열차와 교각처럼 서로를 이어도 우리가 잡고 있는 손잡이 바에 손 높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순간에 안녕을 이젠 인연이라 말하자.
첫댓글 침묵과 감정의 간극과 아서의 품. 연출의 힘 공감합니다. 저는 너무 아픈 사랑이어서 사랑이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너무 아프면 아무것도 아니겠죠. 인연은 너무 거창하니까 살짝 바꿔서, 안녕 대신 좋은 날이었어 라고 인사해야겠어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마지막 장면에서 아서가 계단서 담배피는 장면이 너무나 이해가 갔습니다
마지막 바에서 세 명이 대화하는 장면이 너무 좋았습니다.
김중혁 작가님이 이렇게 평하셨네요. “첫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과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과 뒤를 돌아보려는 사람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
한국어가 익숙치 않은 주인공에게서 듣는 묘한 한국어의 낯섬과 어색함, 어떻게 보면 소극적이어 보일 수 있는 주인공들의 행동을 공감하지 못했다면 이 영화가 와닿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저는 이런 점 때문에 너무 좋았지만! 😍 음악과, 멋진 뉴욕, 특히 부르클린(으로 추정되는) 의 풍경도 더욱 감성 충만하게 만들어주더라고요. ^^ 좋은 감상평 감사드립니다.
저렇게 이야기 할 걸…. 역시 김중혁
나인틴 정주행중인데, 100회 언저리 무렵 pd님들이 이런 말씀을 하시네요. ‘넘버3’ 를 찍은 송능한 감독이 ‘세기말’을 찍은 후 어느 평론가가 쓴 혹평에 모든 영화일을 접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일이 있었다고. 그 멘트를 들은 게 얼마전인데 그 분의 따님이 이 영화의 감독님인 셀린 송이신걸 알고 너무 놀랐습니다. ^^ 나인틴과 세 pd님은 정말 저에게 귀한 인연인 것 같아요!! 😍
단순한 간질간질 첫사랑 이야기에 유태오 얼굴보러가는 영화인가 했는데 글 읽고 나니까 꼭 보고싶어지는군요! 역시 소대님
뭔가 에세이 같은 리뷰 잘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