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청라언덕 ‘동무생각(思友)’ 노래비에 얽힌 사연
가족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첫 나들이를 간해가 1980년 가을이었다.
장녀가 다섯 살, 차녀가 네 살, 아들이 생후 5개월이었다.
간 곳은 대구 달성공원이다.
그 당시만 해도 가서 구경할만한 곳도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사찰 아니면 공원정도였다. 이미 남산 공원과 용두산 공원은 가 보았기에 달성공원으로 갔던 것이다.
당시 상황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공원 앞에 큰 연못이 있었고, 그곳에 연꽃이 만발했던 것과, 공원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장난치며 뛰놀던 모습과, 여관에 가서 자고 갈 방을 달라고 했을 때 아들이 어린 것을 보고 혹시나 이부자리에 오줌이라도 지릴까봐 주인이 꺼렸던 기억이 남아 있는 정도다.
지난 달 8월14일 집사람보고
“대구 달성공원에 한번 가보자.” 했더니
“이 무더위에 무슨 나들이를 간다는 말이요.”
“옛 생각이 나서 그런데 같이 가자.”고 했더니 마지못해 동행을 하는 것이었다.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내려 신세계백화점 음식 코너 에서 점심을 먹고, 전철 1호선 명곡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을 했는데 ‘청라언덕역’이 있었다. 그 역의 이름을 보는 순간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나는 지금까지 ‘청라언덕’이 마산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몇 년 전에 목일 산악회에서 마산 소재 노비산 근린공원에 있는 문학관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마산출신 여러 문학인들의 사진과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 특히 노산 이은상의 작품이 많이 소개되어 있었다.
해설하시는 분이 노비산 언덕을 일명 ‘청라언덕’이라 한다. 라고 소개했다.
청라는 ‘푸른 쑥이 자라는 언덕이라는 의미.’라고까지 덧붙였다.
우리는 대구 전철 3호선 청라언덕 역에서 내려 청라언덕을 찾아가보았다. 언덕이라고는 하나 겨우 2층 정도 높이의 나즈막한 언덕이었다.
그곳에 ‘동무생각(思友) 노래비’가 있었다.
노래비 왼쪽에는 청라언덕의 내력이 적혀있고, 오른쪽은 동무생각 가사 1절이 적혀 있었다.
청라언덕의 내력을 적은 글은 아래와 같다.
대구가 고향인 작곡자 박태준(1901∼1986)이 곡을 짓고 노산 이은상이 노랫말을 붙인 가곡이 ‘동무생각(思友)’이다.
바로 이곳이 靑(푸를청) 蘿(담쟁이넝쿨라)언덕 인데, 담쟁이 넝쿨이 휘감겨 있는 언덕이라는 의미이다.
백합화는 그가 흠모했던 신명학교 여학생이란다.
박태준의 꿈과 추억이 서린 이곳에 노래비를 세운다. 이 언덕을 찾는 이들의 가슴에 청라언덕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기원하면서
2009년 6월
대구동구문화원
계명대학교동산의료원
'동무생각(思友)' 가사 1절이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청라언덕에 얽힌 이야기와 박태준에 관한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대구 최초의 미국 선교사 아담스 목사가 1906년 선교활동을 오게 되고, 곧 선교사 수가 늘게 된다. 그로 인해 낮은 언덕에 스윗 주택, 챔스니 주택, 블레어 주택을 지어 생활하게 되는데, 그 주택들은 붉은 벽돌로 지은 주택이다. 대구의 날씨가 너무 더웠다. 그들이 궁리 끝에 미국에서 담쟁이 넝쿨을 가져와 벽돌을 둘러싸게 해서 무더위를 피했는데 담쟁이 넝쿨이 한자로 청라였다. 靑(푸를청) 蘿(담쟁이넝쿨라) 그래서 청라언덕이 된 것이다.
이런 일화도 소개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피아노를 제물포항으로 들여와서 대구까지 짐꾼들이 가마를 만들어서 운반해왔는데 처음 피아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귀신이 나오는 기계라고 모두들 도망을 갔다는 에피소트와, 대구 지방의 주민 소득을 높이기 위해서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개량된 사과나무를 가져와 보급을 했는데 이로 인해 한때 대구사과의 명성이 전국을 떨쳤다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었다. 선교사 집 옆에 실제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선교사들이 보급하기 이전의 사과는 우리나라에 자생한 능금이었다. 능금은 과일이 작았다.
박태준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계성중학교에 다녔다.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 졸업 후 한때 대구 제일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를 한 적도 있었다. 이후 평양 숭실전문대학으로 진학을 하게 된다. 졸업 후 마산 창신 학교(1919∼1923)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게 된다. 창신 학교는 노산 이은상 선생 아버지께서 설립한 학교다. 이때 이은상은 같은 학교 국어교사였다. 박태준과 노산은 자주 어울렸고, 어느 날 신명학교 여학생을 짝사랑했던 이야기를 한다.
계성학교에 다닐 때 박태준은 늘 자신의 집 앞을 지나던 한 여고생을 잊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 여학생이 한 송이 흰 백합처럼 절세미인이었지만 박태준은 내성적인 탓에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했고, 그녀는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버린 이야기를 한다. 사연을 들은 노산 이은상이 ‘노랫말을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라.’고 권유한다.
가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구분하여 지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곡이 ‘동무생각’이다.
가사는 4절까지인데 교과서에는 보통 2절까지 수록되어 있다.
1920년 이곡이 발표되자 삽시간에 널리 퍼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