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한 남자와 소녀가 있다. 소녀의 옆으로 물건이 떨어지더니 테이블 유리가 깨진다. 수영장으로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가 추락하지만 놀라는 소녀에 비해 남자는 무덤덤하다. 급기야 공중으로 몸이 떠오르는 소녀는 아빠를 외치며 도움을 요청하지만 남자는 쓸던 마당을 무심하게 쓸 뿐이다. 이 이상한 상황은 식탁에서 폴이 딸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다. 왠지 모르게 섭섭하다는 반응의 딸에게 그는 의아해하면서도 실제로 그렇지는 않을 거란 것을 어필한다. 폴은 중년에 접어든 너무도 평범하고 존재감이 없는 남자다. 카푸치노처럼 중앙이 빈 헤어스타일, 늘 평범한 옷차림에 재미없는 유머감각까지, 두 딸과 아내는 물론이고 주변의 시선 역시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각인되어있다. 대학에서 진화 심리학을 가르치는 교수인 그가 가진 유일한 욕망이라면 자신이 속한 학계에서 이름난 학자로 알려지는 것이다. 명망 있는 대학 동기가 만든 사교 모임에도 끼고 싶고, 동료가 발표하는 논문에 자신의 이름도 함께 실리길 간절하게 바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반기는 이는 없다. 학자로의 유명세를 원했던 그의 욕망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발현이 된다. 딸의 꿈에서 등장했던 자신의 모습이 미국을 넘어 전 세계 곧곧에 다른 이들의 꿈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일어나는 것이다. 폴은 어느 순간부터 현실 속에서 ’ 밈‘이라는 사회적 현상이 된다.
<드림 시나리오>는 평범했던 한 남자의 일상이 밈이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소셜 미디어가 바꾸어 놓은 현실과 인간이라는 동물의 내면에 자리한 욕망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다. 근래에 주목받는 감독 크리스토퍼 보글리는 찰리 카우프만의 세계관을 우디 앨런의 화법으로 풀어내면서 현대인의 집단 무의식이 발현되는 방식을 칼 융의 이론을 끌어와 이야기한다. 결코 만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서사를 빌드업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영화적 장치들과 폴을 연기하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개인사를 어느 정도 인지하는 관객이라면 그와 겹치는 모습들을 통해 출연작 <피그>를 상기시킬지도 모른다.
모두의 꿈속에 등장하던 폴은 일약 인플루언서가 된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를 유명인으로 만든다. 폴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호기심의 대상이 되지만, 꿈속의 그는 방관자에서 능동적인 태도를 지닌 인물로 변한다.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 괴물이 되었다. 이제 그는 모두에게 기피의 대상이자, 걸어 다니는 악몽으로 비친다. 기회처럼 다가오던 출판과 오바마와의 만남, 스프라이트 광고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자신을 둘러싼 혐오의 시선과 위협 때문에 가족까지 피해를 입는다. 아무리 억울함을 토로해도 그를 향한 공세는 거세진다. 근거 없이 시작된 호기심은 근거 없는 불안과 공포로 변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시점은 분명하다. 그가 성적인 상황에서 느꼈던 흥분과 수치심을 느끼던 때와 갑자기 생겨난 인기를 자신의 욕망과 연결하려 던 순간부터다. 무의식이 능동적 행동으로 변하는 순간 타인의 꿈속에 있던 폴 역시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폭력성이 깨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 촌극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소셜 미디어라는 무의식의 복합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그대로 반영한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폴에게 일어나는 일과 그가 학교에서 진행하는 수업의 내용은 영화 속에서 대구를 이룬다. 얼룩말의 생존방식을 주제로 강의를 하는데 골자는 집단 속에서 튀지 않고 자신을 감추면 공격당할 확률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혼자 일 때 얼룩말의 무늬는 너른 초원에서 튀어 보이지만 무리를 지어있으면 개체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폴의 평이한 일상은 그의 욕망을 철저하게 감추었지만 무의식에서 만들어진 강제 인과는 그의 삶을 철저히 나락으로 몰고 갔다. 그는 무리 속에 얼룩말이었으나 타인들로부터 다른 무늬를 칠하게 되었고 결국 사냥감이 되었다.
영화에선 이 해괴한 현상들에 왜?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일어났고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지켜볼 뿐이다. 개인들은 트라우마로 받아들였고, 자본은 이를 기회로 삼는다. 폴이 극도로 혐오하던 이 현상을 싸구려 출판물로 만들고 어느 스타트업 회사는 무의식을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대체 소셜 네트워크인 ‘노리스’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폴이 타인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안 좋은 방향으로 사용했지만 긍정적으로 사용하면 내면을 치유하고 타인의 꿈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폴은 해명도 사과도 현 상황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하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침묵으로 시간을 보낸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관심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가족들과는 이제 그리움을 공유하는 과거의 가족이 된다.
영화 속애서 대구는 폴의 수업과 일상뿐만 아니라 주요하게 다뤄지는 식탁 장면들과 사용되는 음악에 까지 녹아있다. 우선 폴이 함께하는 식탁은 두 분류로 나뉜다. 그가 갈망하는 친구의 사교 모임 식탁과 가족이 함께하는 집에서의 식탁이다. 갈망했던 자리는 악몽 속 자신 때문에 모멸감을 받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고 이어지는 가족의 식사는 그의 원치 않는 유명세의 결과로 붕괴되고 만다. 이 두 장면에 흐르던 음악은 교묘하게도 바흐의 <골든 베르크 변주곡>이다. 이곡은 바흐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귀족을 위해 만든 곡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꿈으로 인해 모든 것이 망가지고 부서진 폴에겐 악몽의 골든 베르크 변주곡일 것이다. 폴의 이상과 현실이 무너지는 한가운데 바흐의 곡이 있다면 현실직시라는 의미를 제시하는 곡으로 토킹헤즈의 <city of dreams>를 엔딩 크레디트에 깔아 둔다. 이 곡이 나오기 시작하는 마지막 장면에선 폴이 이별한 아내와 그녀의 취향을 반영한 토킹헤즈의 의상을 입고 함께 한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에서 딸이 공중으로 띄워지듯 폴 역시 무중력 상태로 떠오르다 사라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처음과 끝을 같은 방식으로 연결하는 대구를 이루는 구조까지 보고 나면 우리가 지금 잃고 있는 것과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을 갈망하고 있는 가를 여실히 느낀다.
보이는 게 다이자, 보이는 건 전부 허상인 세상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일까? 폴이 무의식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것은 가장 소중하다고 믿었던 아내와 나누던 짧은 대화였다. 80년대를 상징하던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간 재킷을 입고 토킹헤즈의 앨범재킷 사진을 구현하려 했던 건 그녀의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띄워 올린 것은 더 먼 곳에 더 높이에 좋은 것이 있을 거라는 망각이었다.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우리가 찾던 그것이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있다고 장담은 못한다. 이토록 진부한 주제로 치닫는 결말이면 어떠한가, 이런 철 지난 담론에 A24, 니콜라스 케이지, 신예 감독 크리스토퍼 보글리가 가담했다. 잃었다고 믿는 거 말고 진짜 잃은 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시간이다.
첫댓글 철 지나 보여도 계속 되는 고민이 있죠 흠 볼 만하단 말이죠? 보고 나서 다시 정독해야지 ㅎㅎ 감사합니다~
자칫 겉에 드러난 장치들은 난해할것 같은 느낌의 영화인데
그럼에도 소대가리님 리뷰덕에
담겨있는 주제를 생각하고 보면 깊이 있을 영화 같아요.
좋은 영화 소개시켜주신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당~
소대가리님 안녕하세요
예매했다가 못가서 아쉬운 영화
소대가리님 리뷰 보니 몬간게 더 아쉽네요
안까먹고 챙겨볼게요!!
점점 더워집니다
건강 관리 잘하시고🙏🙏🙏
기력 허하면 냉면 육수라도 한그릇 드시길.
잃었다고 믿는것 말고 진짜 잃은것은 무엇인가 한문장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어제 보고 왔어요. 진부한 주제인지 몰라도 그것이 발현되는 사건이 너무 요즘 일들이라 생각할 거리가 풍성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반전이 일어나는 지점에 눈이 흐려졌는데 소대가리님 설명을 읽고 나니 이해가 됩니다. 리뷰왕 소대님 😊
아직 못보고 있네요..ㅠ
지금이 아니면 못볼 고전 클래식전 클리어중입니다잘지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