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선 글레이저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통해 영화의 서사가 신화로부터 발현된 시련과 극복의 구도가 아닌 모순과 부조리가 결합된 아이러니라는 화술로 가려진 현실을 구현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아유슈비츠라는 너무도 많이 다뤄지고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된 상징성을 가져오지만 그 시선은 피해자를 관찰하거나 그들의 입장을 피력하는데 초점을 둔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독일군 관사에 사는 루틴화된 가족의 일상을 가져와 평온을 즐기고 살아있는 생명에 경외를 느끼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죽음의 비명과 인간의 목숨이 숫자라는 효율로 계산되는 미쳐버린 그 시대가 지금과 과연 얼마나 다른 가를 묻고 있다. 오프닝에 길게 깔리는 블랙 아웃된 화면과 불길함이 가득한 사운드는 예술적 쾌락으로써의 영화가 아닌 당신이 외면한 것들에 대한 질문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어두운 화면과 절망으로 가득한 사운드가 지나면 이 극의 주인공 회스 소령의 가족이 나온다. 장면이 전환되었지만 긴장감은 여전하다. 관객에 전달되는 시각적, 청각적 정보는 긴장감의 밀도를 유지시키고 우리에게 익숙한 이 파국의 다른 면모를 어떤 식으로 보여줄지를 서두를 통해 깔아 둔 것이다.
영화에서 보이는 장면들은 단조롭다. 시각적 자극을 배제하기 위해 클로즈업이나 풀 숏을 최대한 줄이고 마치 관찰 카메라처럼 포착된듯한 화면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서사의 중심에 감정 이입을 할 인물이 생기거나 누군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을 막는 대신, 사운드 연출의 극대화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았던 것들이 무엇인지 말하려 한다. 극적이지 않은 내러티브에 기괴한 사운드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는 대신 내부에서 평화롭고 일상적으로 이어지는 상황들과 부딪히며 작은 소용들 이를 만들어낸다. 가령 초반에 회스 소령의 생일을 축하하려 선물로 준비한 카누를 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장면은 이 즐거움과 행복은 누군가의 고통과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영화는 지속적인 단서로 전한다. 집안일을 위해 징발된 유대인들은 온갖 허드렛일과 농장일을 겸하고 있다. 사택은 거대한 벽을 경계로 두고 있는데 그 너머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고 그곳에서 울리는 총성과 비명은 회스 가족에겐 생활 소음 정도로도 느껴지지 않는다. 소령이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면 카메라는 연기가 솟아오르는 수용소의 굴뚝을 비춘다. 그것은 아마도 유대인의 시신을 불태우는 연기일 것이다. 관사 마을에 사는 장교의 부인들은 수용소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나누며 품평과 농담을 나눈다. 회스의 헤트비히는 고급스러운 모피 코트를 입어보고 만족하고는 옷장에 넣어둔다. 벽 너머의 죽음과 절망을 인지하게 하는 건 사운드일 뿐 일상을 살아내고 정해진듯한 노동의 루틴을 견디는 건 유대인 노동자들이다. 이 극적이지 않은 이미지가 지옥이라는 사실을 자각시키는 것은 집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검은 개뿐이다. 사람과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이들 사이를 마음대로 다니며 그 억지스러운 모든 것들을 관찰하는 지옥의 파수견처럼 보인다.
영화는 보이는 세계와 외면하는 세계가 병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세계는 이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헤트비히가 열심히 가꾼 예쁜 꽃과 탐스러운 과일들은 소각장에서 타고 남은 시신의 재가 거름으로 뿌려지는 장면으로 드러나고 아들들과 강가에서 몰놀이와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회스가 그 물에 유대인의 시신들이 흐르고 있고 다는 사실에 황급히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 욕조에서 빡빡 씻어내려 하지만 그들이 지닌 죄는 물로 씻겨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병렬 연출은 트래킹숏으로 농장을 지나가는 유대인 노역자와 그곳을 관리하는 헤트비히와 대비를 이루기도 하고, 회스와 헤비히트가 침실에서 나누는 대화중 이탈리아에서 추억담인 소에게 아코디언을 불어주는 남자와 프랑스산 향수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장면이 나오다가 컷이 바뀌면서 수용소의 아우성과 굴뚝 연기 장면으로 붙는다. 그들의 부르주아적 일상은 화려한 꽃과 식수로 가리려고 해도 가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 추악함을 먹고 생존한 지옥의 개와 다르지 않다.
아우슈비츠라는 공간에서 회스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몇 명의 인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죽이고 노역에 이용하는 가는 그의 능력과 권능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하나, 그들 역시 국가가 내리는 명령과 처분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장담하지 못하는 신세다. 회스는 명령에 의해 전출을 하게 되고 헤트비히와 분란이 생긴다. 그녀는 꿈꾸던 삶, 모범적인 삶 그리고 히틀러가 말했던 동쪽의 보금자리가 여기라고 말한다. 함께 떠나자는 회스의 말에 혼자 떠나라 말하며 자신과 아이들은 그곳에 남겠다 한다. “내가 곁에 있다고 생각해 줘”라는 억지스러운 사랑의 다짐으로 남편을 보내기로 하고 회스는 저녁 식사 시간에 가족들에게 전출을 가게 되었으니 마음에 준비를 하라고 한다. 모두들 방으로 가 잠자리에 들려할 때 검은 개는 방문 중앙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한다. 사상누각 위에 만들어진 불안정한 평안과 각자의 지옥에 위태롭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밤은 기만으로 만들어진 평화의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한낮을 채우던 빛과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자 들리는 건 가족 모두가 조용하길 바라던 막내의 울음과 회스의 장모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붉은 소각장의 연기였다. 딸과 연을 맺은 사위를 믿고 자신의 삶에 마지막 구원을 줄 곳이라고 믿었던 그곳은 유황불의 지옥임을 자각하게 된다. 영화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막내의 울음은 형제들의 모습과도 대비를 이룬다. 사과 때문에 싸우던 유대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러면 안 되지 하고는 병정놀이에 빠진 셋째 아들과 동생을 온실에 가두고 가스실 소리를 내며 장난을 치는 장남의 모습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울음이 얼마나 정상적인 행위인가를 인지하게 한다.
줄곧 공무원처럼 일하는 회스와 그 참혹한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발적인 사고가 아닌 주입된 사상을 신봉하는 악을 만든다는 이 논지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설명하기 좋은 예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순히 과거를 재조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님과 절대 악에 대한 통렬한 비판만을 위해 아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영화가 보이는 카타르시스를 철저히 부정하는 것을 통해 영화적 메시지를 관철시키는데 폴란드 소녀의 선행을 통해 극단적으로 묘사된다. 회스가 몽유병에 걸린 딸을 재우려 동화책을 읽어주는 순간과 대구를 이루는 장면으로 소녀가 밤에 몰래 나가 노역 현장에 먹을 것을 숨겨두는 것이다. 과감하고 영웅적인 이 행위는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이 되는데 처음에는 누구인지,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이해를 못 하도록 담아낸다. 이런 장면은 두 번에 걸쳐 나오는데 처음엔 어른과 아이, 사역자와 노역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추후에는 독일군 상층부에서 서로를 향한 증오와 적대감이 녹아있는 체계를 대비시킨다. 이어 한 번 더 등장하는 소녀의 선행은 회스가 딸의 침상에서 읽어주는 헨젤과 그레텔과 병렬된다. 열화상으로 처리된 화면은 동일한데 돌아오는 소녀를 폴란드어로 맞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수용소 근처에 사는 폴란드인임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된다. 소녀는 음식을 숨기던 현장에서 악보를 줍게 되고 피아노로 그 곡을 연주하는 순간 화면은 플레어효과를 통해 감정에 파토스가 발생하는 것을 막는다. 동시에 회스가 딸에게 들려주는 헨젤과 그레텔에 대목은 난로에 처박혀 태워지는 것과 이어진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어떤 의미에서 닮은 영화로 <보이 후드>를 생각했다. 전혀 관련성도 없고 비슷한 구석을 찾으라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두 영화의 공통점은 삶의 어느 순간이 아닌 켜켜이 쌓인 삶의 더께를 보여준다는 지점에 있다. 다만 시간이라는 마법을 영화로 구현한 것이 보이 후드라면 그 좁혀진 시야에 외부로부터 침투한 사운드라는 장치를 통해 벽으로 갈라진 공간의 의미를 지우고 외연과 내포를 허물었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영화의 중간중간 회스는 집안에 소등을 철저하게 하는 장면을 통해 인생이 통제 가능한 것으로 믿는 인물처럼 그려진다. 후반부 그는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을 하고 간부 파티에 모인 이들을 내려다보며 어떻게 하면 가스로 군집한 인간들을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을까를 골몰한다. 정신은 전형적인 워커홀릭의 사고를 취하지만, 반대로 몸은 구토를 한다. 이 행위가 일어나는 곳은 계단이 있는 복도다. 구토를 하다 그는 카메라를 한번 바라본다. 그 순간 화면은 현시점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관리되는 장면을 잠깐 보여주는데 그것은 회스가 서있는 그곳이 일상과 비극의 경계이며 계단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오름과 내림 그 어느 쪽이든 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의 눈높이와 같은 곳에 서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故 황현산 선생의 말씀을 조금 빌리고 싶다. ”어떤 이에게는 조선시대 노비의 고통도 현재의 것이다. “ 아우슈비츠는 전시된 과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아픔이다. 우리는 여전히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처럼 세상을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리의 생존 윤리는 어디쯤에 있을까?
첫댓글 돌아와^^
음 열화상 카메라 이해 못했는데 덕분에 이해했어요. 맞습니다. 조선시대 노비가 누군가에겐 현재에요.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안위와는 별개일 것이란 확신이 드는 거리에서만 정의롭습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 영화, 제 소감이 끝이면 카페 면이 안서죠 ㅎㅎ
말씀하신 아우슈비츠를 다룬 작품들을 그저 몇 봤을뿐이라..
보여주지않고
들려주고, 느껴지게 한다는 이 작품을경험해보며 나만의 감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부디 쫌 만 더 걸려있어라~!!!
오늘도 감사히 잘 읽고
자극받고 갑니데이~!!
올만에 리뷰보고 댓글 남깁니다.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참신하게 만들었다는 소문에 보고싶었지만,
지방에서는 영화관에서 거의 철수한 상태라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소대님의 리뷰로나마 위안을 얻고 갑니다!!^^
소대가리님 리뷰 너무 좋아요!! ㅜㅜㅜㅜ 깊이 있는 사유 끝에 쓰신 글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읽으면서 영화 다시 복기해 보았고, 그 의미들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려요! ^^
잘 지내시죠
어떤 작품인지 궁금했는데 글 잘 읽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정의로운 척하는 나약힌 존재들인지 잘 그린 작품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