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포성이 멈추지 않던 1968년 다낭에서 트란 안 홍은 태어난다. 사이공이 함락이 되고 위기를 느낀 그의 가족들은 프랑스로 이민을 떠난다. 유년의 기억과 가족에게 물려받은 유산 같은 정서만을 간직했던 그였지만 영화라는 빛은 그를 다시 베트남으로 돌려놓았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낸 모든 이들에게 남겨두고 온 땅의 의미는 상실로 귀결될 것이다. <씨클로>에서 처럼 일말의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인생부터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처럼 처음이라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순간들 조차 소중한 것들을 잃은 이들의 우울에 잠식되어있다. 그가 비추는 렌즈 안에 베트남은 명분 없는 파괴와 비일상을 만들어내는 남성이 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공백을 메우는 여성이 있다. 무너지는 세계의 끝에서 아직 남은 희망을 찾는다면 생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지닌 여성의 사랑과 태도다. 설익은 파파야의 껍질을 벗겨 속살로 찬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무엇이 구렁텅이 같은 삶에서 우리를 구하는 가를 고민하게 했다. 자신의 빈 곳을 채우는 무언가를 찾던 트란 안 홍은 쌓아온 커리어를 이용해 자신의 정체성과 무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왔지만 평단과 관객의 반응은 냉소를 넘어 이제 끝났다는 평까지 들어야만 했다. 다시 돌아온 그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빈 곳을 채우던 근원에 대해 다시 묻기 시작했다. <프렌치 수프>는 배경과 인물이 프랑스로 옮겨 갔을 뿐 재료가 수확되고 부엌애서 음식으로 만들어지고 식탁에 올라 누군가가 먹기까지의 미식여정을 통해 ”무엇을 잃고 다시 회복하는 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영화는 동이 트기 전 새벽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침을 준비하는 분주한 움직임은 어둠을 밀어내고 밝음을 깨운다. 밭에서는 위제니라는 요리사가 식재료로 쓸 작물을 캐고 있다. 카메라는 약간은 들뜬듯한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담고 부드러운 핸드 헬드의 움직임으로 땅속에 있던 뿌리를 캐내는 순간 화면은 막 떠오른 햇빛으로 채워진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의 시작은 흙에서 시작된다. 파고 심고 기르는 시간을 지나 씻고 다듬어 조리로 이어지는 모든 여정은 사람의 손을 거친다. 이런 도입부는 미식이란 결국 어두운 곳에 빛을 들여오는 작업이라는 지점에서 상자에 빛을 담는 영화라는 예술과 상응하게 된다. 화면이 빛으로 채워지기 전에 분주히 움직이는 위제니와 하녀인 비올레트 거기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공허와 허무로 비워진 세계를 메우는 이들을 포착하여 그동안 잊고 있었던 트란 안 홍의 영화 미학이 다시 돌아왔다는 걸 느끼게 한다.
또 다른 주인공인 도댕은 그 이후에 등장한다. 충분히 자고 일어난 그는 자신이 씻을 목욕물이 준비되었는 가를 확인하고 욕조에 몸을 맡긴다. 프렌치 요리의 정점은 잘 다듬어진 재료를 정확한 레시피로 재현하는 것에 있다. 즉, 재료에 상상력을 더해 관념을 형상화하는 일인 것이다. 관념이 물성을 지닌 존재가 되기까지 채집과 손질, 조리까지 하나를 마치고 나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의 고강도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거기에 모두가 깨지 않은 이른 시각부터 깨어야 하는 수습생 폴린의 모습까지 미식의 과정으로 담아낸다. 이때 영화는 편집이라는 마법을 통해 프렌치 레시피라는 관념을 고풍스럽게 만든다. 주방은 위제니의 지휘 아래 비올레트와 함께 재료를 알맞게 다듬는다. 이때 하나의 손질이 끝날 때마다 컷을 끊어서 다음으로 넘어간다. 요리가 만들어지는 동안은 시차가 없으므로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지만 재료 하나가 숏 하나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다듬어진 것은 이전에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기존에 모습을 초탈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에 위제니를 담는 카메라는 클로즈업을 될 수밖에 없다. 맨손으로 흙을 파고 거친 식재를 치열하게 다듬어 이제까지 없었던 무언가로 만들어내는 힘겨움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건 클로즈업 말고는 없다. 이 험난한 과정을 거치는 위제니의 반대편에 도댕이 있다. 비올레트가 받아둔 욕조물에서 목욕을 즐기는 그의 모습을 지긋이 줌인을 한다. 거칠고 투박한 주방의 모습을 담던 핸드 헬드는 본래의 속성을 말끔하게 지워낸 듯 정제된 화면으로 그를 담아낸다. 그는 조리의 전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아침 식사를 평화롭게 즐긴다. 이제 완전히 떠오른 해는 본격적인 아침이 되었음을 알린다.
작품의 원전이 된 “도댕 부팡의 열정”은 19세기 당시 프렌치 미식계의 절대자라 불리던 퀴르농스키의 도움으로 쓰였다고 한다. 저자인 마르셀 루프는 원칙을 강조하는 그의 조리법에 감명을 받아 연구와 분석으로 요리를 만드는 주인공인 도댕을 만들어낸다. 영화 속 도댕 역시 퀴르농스키와 유사한 지점은 사색하고 구상하는 ”셰프“라는 점이다. 그를 담아내는 카메라는 풀샷과 롱샷을 통해 사색적이고 관념적인 모습으로 비친다. 주방에서 그의 모습은 책을 보거나 폴린에게 가르침을 주는 장면들이 주를 이룬다. 그들이 함께 하는 부엌을 하나의 몸이라고 본다면 위제니는 손과 발, 도댕은 머리다. 입으로 맛보고 생각을 거쳐 입을 통해 말로 구현을 한다. 그와 함께 식사를 하는 남성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작 실체화는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물론 아이디어는 중요하다. 하나,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줄 누군가가 없다면 그것은 공상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후반부에 들어 위제니가 사망하고 도댕은 실의에 빠진다. 그의 레시피를 재현할 요리사를 물색하지만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영화는 그런 식으로 빛을 잃고 어둠에 빠진다. 밝음을 읽어버린 이 세계는 체계가 없는 카오스 상태에 가깝다. 빛은 제련이고 그것을 통해 레시피는 완성된다. 그렇기에 도댕의 구상과 계측을 실현한 이들이 중요한 것이며 그것은 ‘그’가 아닌 ‘그녀들’인 것이다. 문제는 도댕의 레시피가 완성될 때마다 현기증을 느끼고 노쇠해 가는 건 위제니라는 사실이다. 그녀에게 요리는 정체성인 동시에 사투이기도 한 것이다. 그 흔적은 투명하게 끓여낸 콩소메와 같다. 수많은 재료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해 얻어낸 수프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관념을 실체로 구현하는데 이처럼 엄청난 희생이 발생하지만 그 결과물을 누리는 것은 정작 도댕과 그의 친구들인 남성들이다. 위제니는 도댕의 수석 요리사지만 그녀가 진짜 요리를 배운 것은 그도 그녀의 아버지도 아닌 어머니였다는 사실 역시 대외적으로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악랄한 미식 문화인 오르톨랑을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환상적인 맛이지만 잔혹한 조리법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피해 숨어서 먹어야 한다는 이 요리를 즐기는 호사도 남성들의 몫이고 위제니는 그동안 폴린을 제자로 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트란 안 홍의 편집은 극단적으로 젠더를 갈라 그들이 누리는 차이를 보여준다. 초반부는 정신없는 부엌과 화려한 식탁이 있는 식당을 구분해 남자들은 만들어진 식사를 즐기고 여성들은 남은 음식을 먹는 것을 대비시킨다. 남자들은 가끔 주방으로 내려가 위제니의 솜씨를 칭송하려 그녀는 하지만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식은 남성이 누리는 특권의식의 발현처럼 보인다. 그들은 음식을 맛보며 교황령풍, 네덜란드풍이라는 별호를 붙여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여행을 하는 듯한 자유를 느끼기도 하고 그 즐거움이 별을 발견한 것보다 큰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먹는 즐거움은 그들에게 단순한 맛의 쾌감을 넘어 현재가 아닌 다른 차원으로 도달하게 한다. 도댕이 폴린에게 소스를 맛보게 하고 재료를 맞춰보라는 행동 역시 각각의 재료가 하나로 합쳐지면 원재료에 없던 새로운 맛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재료에 인서트를 섞어가며 편집해 보여준다. 그러니 미식을 누린다는 것은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향의 여정이며 그것은 남성의 욕망과 결부되는 것이다.
중반부까지 영화는 남성과 여성이 공간과 누리는 혜택으로 구분을 하다가 후분으로 가면서 시간이 흐르며 변해가는 계절과 사람을 그려낸다. 그들의 인생은 생동하는 여름을 지나 가을로 향한다. 도댕은 미식을 접하는 태도로 위제니를 대한다. 목욕을 하는 모습, 침대에 나신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는 도댕의 시선은호사스런 식기 위에 아름답게 놓인 음식을 보는 것 같다. 상대를 대상화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폭력성이 동반되는 것이다. 식재료가 고급음식이 되는 과정이 고유의 향과 모양을 필요에 따라 제거하듯 위제니를 탐닉하는 도댕의 사랑은 일방적으로 흐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노크를 하고 수락을 받는 상호 존중의 관계를 만들어 가려 한다. 알 수 없는 지병으로 지쳐가는 그녀를 위해 음식을 만들기도 한다. 마치 남성 손님을 대접하듯 존중과 경의를 담아 요리를 하고 대접을 한다. 위제니가 쓰러지기 전에는 왕자를 대접하기 위한 메뉴도 함께 구상할 약속도 하며 열의를 품는다. 상호 존중이라는 바탕 위에 경험과 지혜는 쌓여가고 그들의 삶은 가을처럼 깊어간다. 결말부에 주방을 패닝하는 롱테이크는 함께 보내온 시간이 거기에 녹아있고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신비롭게 담긴다. 위제니는 도댕에게 묻는다. 나는 요리사인가요? 당신의 아내인가요? 도댕은 기꺼이 그녀를 요리사라는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결말을 보고 나면 화제가 되었던 줄리엣 비노쉬와 브느와 마지멜의 캐스팅 역시 내러티브와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두 사람은 1998년부터 사실혼 관계로 지내다 2003년 결별을 하게 된다. 그들 사이에 생겨난 한나 마지멜의 양육을 위한 만남이 있었을 뿐 다시 연인이 되기엔 관계 자체가 금기처럼 되어버렸다. 위제니와 도댕이라는 역할은 그들의 관계가 투영된 것처럼 비친다. 절절한 감정과 예의를 동시에 가져야 하는 하는 것이다. 도댕이 위제니를 아내가 아닌 요리사로 존중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비노쉬를 여인이 아닌 배우로 인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시한다.
육체가 아닌 가진 능력으로 인정을 받는 결말은 페미니즘적인 메시지를 함께 내포한다. 미식을 즐기는 남자 멤버들 못지않은 식견을 지닌 위제니 역시 그에 걸맞은 지위를 가지고 특권을 누려야 한다. 미식계에서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도댕은 자신의 관념을 누군가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사실 역시 그가 직접 음식을 만드는 장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아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며 구현의 노동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드러낸다. 거기에 폴린의 부모가 짓는 농사의 방식을 통해 좋은 식재가 나오려면 어떤 노고와 연구가 동반 되는 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미식은 특정 누군가들만이 누려야 하는 것이 아닌 성취를 만들어낸 모든 이들이 함께 나눠야 하는 것이고 대가와 책임 역시 함께 견뎌야 한다는 결론을 만들어 낸다. 이 미식을 영화라는 메타포에 적용하면 감독의 구상하는 상상력을 구현하기 위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고가 필요한가로 읽어낼 수도 있다. 그리고 폴린 같은 가능성으로 가득한 다음 세대들에게 그 유산이 이어져야 한다는 메시지까지 함께 담고 있다.
트란 안 홍은 긴 방황 끝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듯 하다. 물론 요리를 하는 시퀀스를 제외하면 이야기 자체가 늘어지고 지루하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미학, 말하는 대신 보여줌으로써 의미를 갖게 하는 본질을 다시 찾은 듯 하다.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겠다.
첫댓글
바쁘다는 핑계로 영화관을 뜨문뜨문 가다보니 스케일 있는 영화만 보구 있었어요.
반성합니다..ㅜㅜ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잘 감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
잘 읽었습니다.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도 그렇고 불평등 문제가 숨어 있다니 흥미가 생깁니다. 태백산맥에서 인가? 토하젓이 얼마나 상류층의 호사스런 음식인지를 설명하던 걸 읽고 노동집약적인 한식 요리를 삐딱하게 보게 됐어요. 음식에 진심인 세상에서 뭔가를 꼬집어 낸 것 같아 좋네요 영화도 리뷰도.
드뎌 보고 나왔습니다! 종종 잠든 바람에 리뷰를 읽고 조각을 맞추네요 ㅎㅎ 줄리엣 비노쉬의 우아한 모습이 반가웠고요. 구체적 재현에 들어가는 모두의 수고를 돌아본다는 의견에 동감합니다. 고유의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상의 고귀한 자세죠.
너무너무 보고 싶은 영화 😍
영화는 아직 안 봤지만, 메르시 크루아상 이라는 책 읽고 있는데 영화와 어울리는 책 인 것 같아요!
다수의 수고로움이 필요한 세상일들..
다시 끔 감사하며 먹고, 보고, 누리고 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