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세계는 아직 냉전이라는 이름의 불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든 무너질 준비를 하고 있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예술은 여전히 자기 색을 드러내며 현실을 다각도로 지켜보고 있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조국 러시아가 소련이던 시절에 그곳에서 5편의 영화를 만들어 내고 6번째 영화를 찍기 위해 떠난 이탈리아에서 돌연 망명을 선언한다. 끓어오르는 예술에 대한 열망은 자유를 갈구했다. 7번째 작품이자 유작인 “희생”은 많은 것을 감수하며, 견뎌야 했다. 암으로 인한 투병, 망명자라는 사회적 신분, 수련에 두고 온 아들에 대한 죄책감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느끼던 비애와 고통 앞에서 그는 영화의 거장, 성자가 아닌 소망을 갈구하는 가련한 인간이었고 아버지였음을 이 영화를 통해 고백한다.
영화는 장중하게 흐르는 바흐의 ‘주여, 나를 불쌍하게 여기소서’와 함께 다빈치의 그림 ‘동방박사의 경배‘를 틸트 업하는 화면으로 시작된다. 스텝 스크롤이 함께 올라오면서 마치 엔딩 크레디트처럼 보이는 이 연출은 영화가 가진 큰 주제인 시작과 맞닿아 있는 시작이란 결국 무언가가 끝이 남과 동시에 발생한다는 의미를 구현한다. 동시에 예수에게 선물을 바치는 동방박사와 아기 예수를 통해 신의 아들에게 주어진 숙명, 자신을 희생해 미래를 구원해야 하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오프닝이다. 음악과 그림은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주제를 상기시킨다.
긴 오프닝이 지나면 다음 장면은 스웨덴 남부 발트해의 작은 섬에 사는 알렉산더와 그의 아들 고센을 비춘다. 그들은 죽은 나무를 심고 있다. 정성스럽게 땅을 다지고 물을 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느 수도승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 돌보았더니 3년이 지나자 나무에 꽃이 만발하였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엔딩에서 고센이 읊조리는 독백과 맞물려 탄생은 곧 죽음으로부터 시작되고 둘은 서로 다른 듯 하지만 한치의 틈도 없이 맞물려 있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니 알렉산더가 물을 주던 죽은 나무는 희망을 배태한 채 죽은 존재다. 영화는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최후의 순간이란 결국 무언가 다시 시작되려 하는 것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알렉산더의 생일이다. 축하를 위해 친구들과 이웃이 함께 그의 집에 방문한다. 그와 동시에 세계는 3차 대전이 발발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것들이 하나 둘 소멸해 가는 것들을 전기와 물자가 서서히 사용이 불가하거나 떨어지는 상황은 남겨진 이들의 불안을 가중시킨다. 알렉산더는 어떤 희생이라도 각오할 테니 제발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구해달라 신에게 간절히 기도한다. 응답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전달되는데 이웃이자 우편배달부인 오토로부터 세상을 구할 방법은 하녀로 일하는 마리아와 알렉산더가 동침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터무니없는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남은 수단이 없는 그는 마리아가 거주하는 곳으로 향한다. 너무도 간절한 그의 바람을 들은 마리아는 동침을 허하고 부둥켜안은 알렉산더와 마리아의 몸은 공중으로 떠오르는 경험을 하고 잠에서 깨어난 알렉산더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평온한 세계를 마주한다.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평화로운 세상에서 깨어난 알렉산더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지인들이 집을 비운 동안 불을 붙이고 집을 태워버린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전소시키고 정신 병원을 끌려가며 소중했던 이들과의 연마저 끊어낸다. 관객은 이 말도 안 되는 개연성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전쟁은 과연 일어난 것인지 묻고 싶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열린 결말을 통해 행위가 지닌 당위성이 아닌 그것을 지속하려는 관성이야 말로 생의 본질이라 말한다.
”희생“의 서술 방식은 산문이 아닌 운문에 가깝다. 타르코프스키는 인과라는 구조로 만들어진 세계를 조각 내고 시간이라는 파편을 다시 조립한다. 서사성을 지닌 이야기라기보다 시에 가까이 다가간 영화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시작과 끝이 같이 맞물려 가는 지점이나 인물들의 이름과 소품과 미장센이 가지는 성징성은 무엇보다 중요하게 보인다. 가령, 알렉산더와 동침을 하게 되는 하녀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했던 동정녀 마리아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가 품는 알렉산더라는 이름은 인류의 수호자라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알렉산더를 품는 것은 제의를 넘어 희생을 통한 희망을 수태하게 됨을 의미한다. 고센이라는 이름 역시 스웨덴어로 ‘작은 아이’로 번역이 된다. 알렉산더가 구하고자 했던 존재이며 희망을 이어가며 죽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을 사명을 지닌 사람을 해석한다면 그 역시 어린 예수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또 다른 하녀인 마르타는 지극 정성으로 고센을 돌본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를 극진하게 모시던 성녀 마르타를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마태의 수난곡과 동방박사의 경배와 어우러져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함께 기독교의 구원 방정식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동차와 자전거로 나눠지는 인물의 구성 방식 또한 세밀하다. 8명이 배우들은 그들이 극중에서 이용하는 이동 수단으로 기계화된 현대 문명에 길들여진 이들과 그 대척점에 놓인 이들로 구분을 짓는다. 오토는 자전거를 타고 편지를 나르고, 고센은 그의 자전거에 줄을 건다. 알렉산더는 마리아를 찾아가기 위해 자전거를 타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불확실성과 망설임으로 가득하다. 마리아 역시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기에 집 문 앞에 세워져있다. 이들은 연약하여 가끔 졸도하고 넘어지고 구원을 간절하게 바란다. 반면 차를 이용하는 아델라이드와 빅토르, 줄리아는 눈 앞에 놓인 절망의 고통을 망각하려 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이 영화의 백미는 말미에 등장하는 집을 불태우는 6분이 넘는 롱테이크 장면일 것이다. 이 방화는 아마 많은 이들에게 알렉산더의 자기희생 혹은 제물로 바치는 번제로 비칠 것이다. 그 시각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암시적으로 비치던 다른 장면들과 연결을 해서 본다면 다른 의미를 파생시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반부에 고센이 아빠를 위해 준비한 선물로 집과 똑같이 생긴 모형을 보여주는 장면과 방화 전에 전축으로 가서 전원을 내리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는 장면들과 연결을 하면 집은 그의 정체성이고 타르코프스키의 정체성은 영화이니 생의 마지막이 될 영화라는 예술을 태워 아들을 구하고자 했던 마음이 거기에 타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그게 무슨 말이죠. 아빠?“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말을 하게 된 고센이 아버지와 심은 나무에 기대 누운 모습과 함께 나무를 틸트 업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고센은 묻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그게 무슨 말이죠. 아빠? “ 이 질문은 영화 초반에 알렉산더가 하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너는 한마디도 못하는구나. 마치 작은 물고기처럼 “과 대비를 이룬다. 생의 시작이 죽음이듯 태초의 말씀 이전에 침묵이 있었다는 전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아빠인 알렉산더가 아닌 그야말로 아버지라 불리는 신을 향한 물음일 수도 있다. 태초에 말씀이라는 게 있다면, 당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은 왜 이런 것인가요?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가 세상에 “희생”을 내놓고 떠난 지도 벌써 40년 가까이가 흘렀다. 그가 예술로 맞서던 냉전은 이미 종식을 맞이했고 그와 아들을 갈라놓던 소련은 진즉에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던진 질문과 구원의 방정식이 대안처럼 다가오는 현실은 여전히 쓰리고 아프다.
첫댓글 현실은 85년의 그때에서 한걸음도 나아진게 없는것 같은 요즘이라 쓰신 글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소중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동침과 희생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니. 동침으로 새 세대를 배태하고 너는 뒤안길로 사그러지거라. 그런 뜻일까요? 자신의 영화가 아무리 칭송받아도 전쟁과 냉전이 가져온 수많은 죽음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과 속죄의 표현일까요?
아주 고상하게 표현했는데 자꾸 잠들고 안개속의 풍경인지 희생인지 구별도 못하는 이국의 관객은...
소대가리님 글 덕에 예술영화를 찍먹해봅니다. 감사합니다~
타르코프스키님
처음 뵙겠습니다~~~~ ㅎㅎ
우리 소대가리님덕에 40여년전의 작품을 소개받았습니다.
소대가리님덕에 넓은 시야를 갖게 되어감을 진심 감사드립니다~~~~^^
멋진후기 감사합니다!
멋진후기읽었으니 이거로 영화 감상을 갈음해도 되겠쬬.....? (먼산)
보고오세요.
깊이있게 보고 생각하는 당신과 같은 관객이 있어서 그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예술이란 이렇게 시간과 장소를 넘어 누군가에게 와 닿을 수 있어서 영원하다고 하는 건가 봅니다.
소대님 해석 덕분에 제 머리속이 좀 정리가 되네요.
영화 초반에 서양인 답지 않게, 윤회설을 오래 이야기 하는 것이 신기하더군요.
인생에서 길고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결국 죽음을 기다리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기 전까지 각자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 나갈 것인가 하는 질문을 제 자신에게 하면서 영화를 봤네요.
오토가 처음 등장할 때 니체를 인용한 가벼운 농담을 하죠. 결국 그건 후반부에 모두를 구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과 연결된다고 봤습니다. 이것은 말씀하신 윤회에 대한 그 나름의 해석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영원회귀라는 그 해골 아픈 아리송한 사상은 결국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말한다고 느꼈습니다. 끝은 결국 종료가 아닌 시작을 위한 것이라는, 불안정한 세계에서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타르코프스키 마음속에 작은 희망의 씨앗이 아니었나, 저는 그렇게 느꼈네요.
그렇게도 해석이 되는군요.
기독교적 색체를 가능한 배제하고 영화를 감상하려 했으니 감독의 의도를 종잡을수 없었던 것이군요.
명작이죠..
탈콥스키라는 영화나무는 누군가 끊임없이 물을 줄것입니다
총7편의 영화가 있으니 정주행을 권해드립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중 하나가 생각나네요
거울 촬영때 갈대숲이 필요했는데 마땅치 않아서
직접 심어 원하는 높이로 자랄때까지 몇년을 기다렸고 움직임을 위해 동원된 대형
선풍기의 위치와 풍량조절에 들인 매우 까탈스런
제작과정
거울의 갈대숲장면을 저는 희생의 엔딩장면보다 좋아합니다
이눔아 잘지내냐? 아프지말아야하는디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