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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낙랑 세번째 글-낙랑=평양설에 대한 정리
키레네 추천 2 조회 496 15.09.23 21:47 댓글 2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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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9.23 23:06

    첫댓글 고조선과 한사군이 존속하던 당시에 기록된 중국고대1차사료(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진서)가 가장 신빙성이 있죠. 당나라때는 한사군이 없어지고도 몇백년이 지난 때이니 무엇이라고 주석을 달았던 내용에 착오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존속 당시의 기록과 후대의 주석간에 차이가 있다면 어느쪽을 취사선택해야 하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가 되는거죠. 고구려사신이 무슨 말을 했든지 상관없이요. 사신이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별하지 못하고 착오를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고요. 아니면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요동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역도원이 고구려사신의 패수 북쪽에 평양성이 있다는 말을 덧붙혀서 추가 주석을 달아

  • 15.09.23 23:08

    놓았을 가능성도 있구요. 패수는 고조선의 국경이지 수도인근에 있던 강도 아니였거든요. 존속 당시의 기록을 무시하고 당나라때 주석을 가지고 위치를 비정하려고 하거나 고려말 조선시대 학자들 혹은 조선사편수회 학자들의 주장을 앞세우며, 존속 당시의 중국고대1차사료의 내용을 무시하는 것은 역사연구의 기본을 무시한 발상이죠. 그래서 국민들 사이에서 강단사학계가 욕을 들어 쳐먹는겁니다.

  • 15.09.23 23:09

    키레네님이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것은 자유이겠지만 이미 누리꾼들이 알고 있는 재평양설을 구지 올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식상한 느낌마져 들고요. 역사를 아는 국민들 사이에서 평양설은 논리가 파탄난 학설로 평가받고 있구요. 국민들에게 버림받은 학설입니다.

  • 15.09.23 23:20

    역사나 고고학은 학자가 하는거지 국민이 하는게 아닙니다.
    그럼 치우천황이나 환단고기가 국민에게 지지받으면 그게 맞는게 되나요? 그럼 역사는 앞으로 언플의 영역에서 접근해야겠군요!?

    역사를 아는 국민을 근거로 대는게 혹시나 어느 학술대회에서 그렇게 말하듭니까?

  • 15.09.23 23:21

    @삼한일통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중국고대1차사료를 열어볼 수가 있거든요. 하여 국민들이 평양설의 허구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 작성자 15.09.23 23:24

    낙랑존속당시 1차사료로서 00이 낙랑조선현이다 왕험성이다 라고 직접 본문에서 언급한 사서기록이 있나요? 있으면 알려주시고.. 역도원은 당나라사람도 아니고 언급했듯이 장수왕 당대 사람이고 본인이 저자로서 직접 의문점을 고구려사절과 나눈대화를남긴겁니다. 이걸 왜 무슨근거로 평가절하하시는지.. ? 초기정사 4서에도 어긋나지않습니다. 각종버젼요서설이 근거로삼는것도 후대의 주석이라는점 이전글에서 충분히언급했고 왜 논리적으로 다른기록과 맞지않는지 여러번언급했는데 반론을 하시려면 추론말고 충분히 논거를가지고 말씀주시면 감사히보겠습니다 그와더불어 요동지역과 평양의 고고학적 위치비정자료도 해설해주시고요

  • 작성자 15.09.24 00:39

    @키레네 본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각종버젼요서설에서는 평양설을 직접언급한 기록들을 대흠무님처럼 반응할뿐 기록자체를 분석하지 않죠. 평양이 낙랑이다라는 기록들이 낙랑소멸후 후대 기록이지만 당대 시각과 관념을 반영한것인데도불구하고 ..평양의 낙랑유적, 유물은 물론 요동의 한대 토성, 중국계 고분군과 취락유적, 지명명문 등은 언급조차하지않습니다. 제가 요서설의 근거들을 언급한 지난 두글에서 평양설의 논거로 반박하지않고 당대 다른기록과 자료로만 가지고 문제를 지적했는데 평양설에는 평양설 근거만가지고 논파할수있는지..근거없이 착오다 조작이다 하는말말고 논리적인 해설이 가능할지 ..좋은 반론글들을보고싶습니다

  • 작성자 15.09.24 00:47

    @키레네 아.. 참고로 저는 논란대상이되는 ...사실 논란거리라고생각도안하지만 봉니나 낙랑고분. 명문전돌. 인장명문, 명문와당, 점제현신사비등은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그것들을 근거로 들지 않아도 충분하다 생각됩니다. 아..초원4년명 낙랑목간은 좀 다른케이스군요 나중의 글에서 다룰예정입니다

  • 15.09.24 11:18

    @키레네 낙랑유물과 관련해서는 SBS다큐를 한번 보시구요. 위만의 왕험성과 낙랑군이 요동에 있다는 존속 당시의 1차사료의 기록들은 도저히 눈에 안들어오는가봅니다. 평안도가 언제부터 요동이 되었나요. 북위의 역도원과 고구려사신이 살던 당시에는 낙랑군이 없었습니다.

  • 15.09.24 14:24

    @大欽茂 토론에서는 본인이 주장한 것의 근거는 본인이 제시하는게 기본입니다. 도대체 '위만의 왕험성과 낙랑군이 요동에 있다는 존속 당시의 1차사료의 기록들'이 뭘 가리키는지, 상대방이 어떻게 압니까? 알지도 못하는 상대방이 그 기록들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흠무님이 그 기록들을 제시해주셔야죠. 그래야 상대방도 그 기록들을 검토하고 논의를 이어갈 수 있는 겁니다.

  • 15.09.26 13:54

    @삼한일통
    허 학자는 국민 아닌가? 뭔 논리지?
    요즘 역사학자들이 국민이 보기에 하도 같잖으니 국민이 나선 것을 모리나 보네.

  • 15.09.24 10:54

    낙양에서 요동까지 3600 리, 낙랑까지 5000 리란 기록의 5000 리 끝은 한국인 누가 보더라도 한반도 평양이 확실하다라는 소리군요.
    그런데 북경까지는 몇 리인지 아세요?
    3000 리 안팎이지요?
    그러면 북경에서 600 리 떨어진 곳이 지금의 요동이고, 2000 리 떨어진 곳이 한반도 평양이라는 소리네요.
    과연 그럴까요?

    그런데 정약용이 아방강역고/조선고에서 `연경으로부터 의주까지 2100 리니`라고 하였는데 2000 년 가까운 시간차가 있으니 단위 리수가 다를 수 있겠지만 어쨋든 정약용의 거리감으로 2000 리 지점은 당시의 압록강 서쪽에 있었겠지요?
    그러면 정약용이 말한 당시의 압록강 주변이 낙랑군이여야 하지 않겠어요?

  • 작성자 15.09.24 18:26

    평양에 5000리거리가 딱 떨어진다는 뜻이기보다는 요서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상황을 말하는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유독 낙랑만 5000리라는 점. 그 해설을 어떻게 하는지를 궁금했던거죠.
    베이징부근으로 비정하는 탁군의 거리가 후한서 군국지에는 님이 말씀하신 3000리 안팎이 아니라
    1800리라는거는 알고 계십니까?
    당시의 의아한 거리기록에 대해 아무도 시원하게 분석하려하지 않아서 제가 한번 살펴보는중입니다. 정리가 되면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 작성자 15.09.24 18:58

    그리고 그 이전에 양평과 서안평의 지역비정 근거로 든 자료들에 대해 체계적인 반론이 있어야 하는게 우선이지 싶습니다. 낙랑5000리는 평양임의 정황적 근거지만 양평, 안평명 금석명은 어찌봐야한단 말일까요...조작일까요? 후첨..그리고 낙랑목간까지요...

  • 15.09.25 22:17

    양평.안평명 금석명,목간?
    몽땅 조작이거나 굴러온 것이겠지요.
    낙랑군까지 5000 리 기록, 절대로 한반도 평양의 정황적 근거 아닙니다.
    왜일까요?

    탁군이 북경 부근이라 우기면 상곡군도 북경 부근이겠군요.
    그러면 상곡군까지는 몇 리라 되어 있지요?
    3200 리지요?
    탁군보다 어양.우북평군까지 2000 리, 2300 리가 님 주장에 더 유리한 기록아닌가요?

    어쨋든 낙양에서 상곡군의 거용관까지나 지금의 고북구 부근이였던 어양군의 백단현 지역까지 어떨것 같나요?
    비슷할 것 같지 않나요?
    고북구까지가 조금 멀까요?
    또 우북평군에서 발원한 650 리 길이의 경수가 서남쪽으로 흘러 어양군 옹노현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 것 알죠?

    그러면

  • 15.09.25 22:36

    상곡군에서 습여수, 우북평군에서 650 리 길이의 경수가 어양군의 750 리 길이의 고하로 흘러든 것도 알겠군요.
    또한 저 고하가 지금의 밀운.통현.천진을 관통하는 북운하라는 것도 알죠?
    그러면 말예요.
    <수경주>의 濡水난수와 <한서/지리지> 요서군 비여현의 濡水난수가 같은 물길일까요?
    <수경주>의 난수가 어양.우북평.요서군을 관통하는 것은 명확하니 당연히 같겠지요?
    또 우북평군 무종현이 지금의 옥전이란 것도 알죠?
    그러면 북경 부근에서 동쪽으로 상곡.어양.우북평.요서군이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죠?
    백번을 양보하여, 지금의 산해관 위치라는 한 시기의 요서군 임유현까지 지역에 완벽한 3 개 군이 설치된 것입니다.

  • 15.09.25 22:41

    그런데 그거 아세요?
    요동군은 요서군에서 300 리 떨어졌다는 것?
    그러면 백번 양보하여,
    지금의 산해관에서 300 리 떨어진 요동군이란 지금의 요하 하구에도 이르지 못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그 요동군 지역에 2100 리 염난수와 1250 리 대요수가 흐르나요?

    그까짓 돌멩이.목간쪼가리보다 수 억 배나 더 큰 역사지리 자료에 올인해 보세요.
    중국인들은 2000 여년 동안 조선과의 경계인 요하를 지금의 란하라고 말하는데 왜 한국사학계는 지금의 요하라 강변합니까?

  • 작성자 15.09.26 12:27

    쪼가리..몽땅 조작! 명쾌하고 좋은분석이네요. 저도그럼 님의 해석과 비정이 소설나부랭이찌끄래기라고하면 되는건가요? 하지만 저는 그러진 않겠습니다 하도 몇리 무슨수 000리00수 관용구처럼 읊는사람들이 많아서 물길시리즈도 준비하려고합니다 상대논리는 상대논리자체로 반박해야죠. 그래서 제가 요서설을 다룬 앞전 글에는 평양설자료를 반론근거로들지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요동바로옆에 있어야될 낙랑이 왜 5000리인지는 덕님도.... 요서설에서는 그 아무도 설명을 못하는군요 고고학자료도 몽땅 조작인데 그쯤이 머대수겠습니까.

  • 15.09.26 14:02

    님은 중국의 정사 지리지 기록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한 이해하려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는군요.
    남 생각해서 반론근거로 들지 않았다는 것도 우습게 들리는군요.
    그러지 말고 매시간 최선을 다하세요.

    골방에 들어앉아 봉니.목간이나 만지작거리지 말고 낙양에서 3600 리 떨어진 요동이 어디인지나 현대지도에 정확하게 짚어보기 바랍니다.
    상곡.어양.우북평.요서군도 모르는데 요동을 찾으라니 조금 무리일 듯도 하지만 옛요동에는 지금도 2100 리 길이의 염난수와 1250 리 대요수가 흐르고 있으니 찾아보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에야 낙랑에 대해 얘기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 작성자 15.09.26 15:53

    @덕림석 아 그렇군요. 유물들을 한방에 조작으로 판결때리신 자격충만하신 덕림석님께서 그럼 정사지리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계시니 요동은 왜 3600리이며 낙랑이 왜 5000리인지 고견을 명쾌히 들려주시면 머리를 조아려 감사하겠습니다 정말듣고싶습니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계시니 답을 하사해주십쇼.아 최선을다해들어보겠습니다

  • 15.09.26 15:52

    도대체 사서에 나타난 몇천리 기록이 얼마나 정확하다고 생각하기에 고고학마저 무시한 채 저것에만 골몰하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그렇게 100% 확실한 정밀성을 갖는다고 스스로에게 확신할 수나 있는 것일까. 참 답답스럽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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