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문학 초회추천작.
금암바위 - 심 주희
금녀의 집이라면 여자의 주거와 출입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금남의 집이라면 남자가 얼씬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그럼 금암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아마도 禁癌이란 뜻이 아닐까? 불현듯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 무렵에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위 하나에서라도 의미를 찾아내고 싶었다.
푹푹 찌는 칠월.
여름 산길이 힘들어 자꾸만 숨이 찼다. 가다 쉬고 가다 쉬는 오르막길.
떡갈나무 밤나무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다. 기다시피 해서 팔각정에 올랐다.
작년에도 남편과 함께 왔던 곳이다.
금암동에서 논산으로 넘어가는 바람은 상쾌하다. 정자 옆에 산 지킴이처럼 서있는 금암바위. 우람한 몸피가 듬직하다. 금암은 산꼭대기에서 동네 어귀를 내려다보며 망을 보는 검은 바위다.
뒷동 엄마와 남편, 셋이서 팔각정 정자 마룻바닥에 돗자리를 깔았다.
땀에 젖은 옷이 선들선들한 바람에 시원하다. 배낭에서 커피와 달짝지근한 거봉을 꺼낸다.
“아! 커피 맛 죽인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구만!”
환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마냥 좋아하는 남편.
일회용 커피 한 봉지도 얼마든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신기하다.
시내에서 공기 좋은 이곳으로 온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멀고 먼 시골로 용감하게 이사 온 미안스러움을 남편에게 퉁겼다.
“공기 좋고, 산 좋고, 여기 너무 좋지요?”
이곳으로 이사 오느라 돈 손해를 잔뜩 봤다. 그러나 남편은 날 나무라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기가 차는 일이었다. 돈 벌이도 없는 백수 처지에 교통비까지 많이 드는 시골로 기어들어 오다니. 아파트 공급량이 남아도는데 무슨 시세 차익을 보겠다고 프리미엄까지 주고 샀단 말인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나는 바보 등신이었다.
게다가 현지에 가 보지도 않고 계약을 했다. 융자 신청에, 이자에 거기다가 등기까지 했는데 언제 팔릴지 모르는데다 전셋값도 너무 헐해서 새 집을 전세로 놓을 수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우리가 가서 살기로 했다. 덕분에 나는 비자금을 모조리 털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등신(?) 같은 짓이 남편의 병 치료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남편도 나도 내심 알고 있었다.
우리 아파트의 둘레는 수채화처럼 예쁘다.
창밖으론 흰 구름이 보이고 푸른 하늘이 보이고 초록빛 산이 보인다.
앞산은 천마산 공원. 베란다 너머론 진달래, 밤나무, 소나무, 키 큰 나무, 키 작은 나무들이 서 있고, 뚝배기 깨지듯 우는 꿩이며 부엉이며 이름 모를 새들이 쉴 새 없이 날아다닌다. 바람이 불고 소나기가 오면 큰 나무 이파리는 빗자루로 쓸어내리듯이 쏴아쏴아 쓸려 다니고, 나뭇잎을 쓸어가는 힘 찬 비바람 소리가 가슴을 뻥 뚫어놓는다. 체증이 쑥 내려간다. 남편의 암도 바람에 쓸려, 꿩 소리에 묻혀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은 이 생명 함양의 기세들.
아침에 눈을 뜨면 산봉우리 사이로 주황빛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처럼 아우성을 치는 새들. 집안엔 소나무 향이 흘러들어 오고 식탁엔 밝은 햇살이 자리 잡는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산모퉁이를 돌아 나가는 버스의 뒤꽁무니가 잡힐 듯하다.
산은 마술사야. 남편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마술에 감동한 남편은 하루에 두 번씩 산행을 했다.
일 년 동안 내내 남편과 나는 신비로운 풍광에 젖어서 날마다 병마를 전송했다.
금암바위에 앉았다.
마을이 한 눈에 보인다. 시청 앞에서 역 쪽으로 산 하나가 뭉개져 있다. 새 아파트가 들어설 곳이다.
땡볕 탓인지 텃밭에는 아무도 없다. 신추장도 송 촌장도 보이질 않는다.
작년 이 맘 때는 땅을 고르느라 더운 줄도 모르고 열심히 호미질을 했다. 멀찍이 서서보고 있던 신 추장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슨 땅을 그렇게 파냐고 신 추장이 침을 퉤퉤 뱉으며 나섰다. 삽으로 흙을 푹푹 파 뒤집더니 쇠스랑으로 돌을 슬슬 추려낸다. 배추와 고구마를 심자면 두덕을 높여야 한다며 이랑 이랑을 봉긋하게 만든다. 자갈밭이 금세 꼴을 갖춘다. 제법 가지런한 밭고랑이 생기고 밭에서 추려낸 크고 작은 돌들로 밭 경계선을 만들었다. 여기는 우리 땅. 우리 농장이다.
생전 처음 손에 흙을 묻혀보고 호미질을 했다. 신 추장은 식물을 추종한다는 뜻이란다. 이 텃밭에선 자기를 추장으로 불러 달란다.
나와 뒷동 부부는 허리도 아프고 손바닥이 부르터 끙끙거렸다. 돌을 가려내는 것은 손도 많이 가고 농사짓기는 내동댕이치고 싶을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뒤로 우리는 밭을 핑계 삼아 나들이를 했다. 농사짓는 건 뒷전이었다.
보온병에 싸온 커피를 마시고 낄낄대며 막걸리를 마신다. 길가에 돗자리를 펴 놓고 앉아 자장면을 시켜 먹는다. 자기는 기름진 것을 먹지 않으면서도 남편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한 몫 거든다.
공기 좋은 들판에서 놀아가며 얼렁뚱땅 끝내는 밭고르기. 밭 귀퉁이의 넓적한 돌판은 우리들의 술상.
텃밭에는 남편도 있고, 뒷동부부도 있고 신 추장도 있고 송 촌장도 있다. 송 촌장이란 이름도 밭에서 붙인 별명이다.
따스한 커피, 막걸리, 작고 예쁜 호미, 돌상에 앉아서 웃는 남편.
우리는 일요일마다 밭에 갔다.
“나, 죽으면 금암바위 아래 뿌려 줘.”
“흔적도 없이, 먼지마냥 날아다니는 게 뭐가 좋아요.”
나는 일축했다. 남편은 죽음만 생각하고 있었다.
한 솥밥을 먹고 한 지붕아래에 살면서도 동상이몽을 꾸는 우리.
어떻게 하면 아이들하고 돈을 벌어 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내가 그런 꿈을 꾼다면, 어떻게 하면 고통 받지 않고 빨리 죽을 수 있을까 남편은 그런 꿈을 꾼다.
금암바위 위에 우뚝 서서 나 몰래 하늘 저쪽을 보던 남편.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흩어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아파트에서 바라보는 풍광도 그대로고 꿩 소리 바람소리도 그대로다. 주황빛 해도 아침이면 여전히 떠오르고 솔잎 향도 여전히 식탁에 내려앉는다.
오로지 저승길로 홀로 떠난 남편의 자리만이 헛헛하다.
이제, 금암바위만 덩그러니 남았다.
금암(嶔巖)은 그저 험한 바위일 따름이었다.
첫댓글 심주희선생님~! 싫것 쏟아내세요. 문학은 치유니까요. 아프면 아프다하고 그리우면 그립다하고........세월 밖에 별 효험이 없답니다. "동상이몽" 남편의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먹먹해옵니다. 이젠 금암바위를 홀가분한 마음으로 쳐다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이 글을 "회원작품"방에 옮겨야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저 세월에 맡길 수 밖에요.
아침에 금암바위에 앉았다 갑니다.. 회원수필방으로 옯깁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경주 선생님.시상식때 인사를 못드리고 왔습니다.
제 마음이 아픕니다.. 헛헛한 그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