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성찰의 중요성
예수님의 탄생소식과 함께 우리는 연일 ‘죽음의 소식’(부음)을 들었습니다. 스테파노의 죽음, 아기들의 죽음! 모두들 빛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빛이 다가오면 어둠은 자신이 어둠인 것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더욱 더 어둔 곳으로 달아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을 피해 달아난 것처럼! 이런 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빛이 다가오기 전에는 어둠은 자신이 어둠인 줄 모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는 자신이 죄 중에 있었음을 자각하지 못하다가 고해성사를 통해 죄 사함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 자신이 그동안 죄의 그늘에 머물러 있었음을 깨닫는 경우가 생깁니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면, 빛이 아닌 어둠들이 잘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이 보낸 첫째 편지를 묵상함은 매우 유익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1요한 1,6절) 죄와 죽음뿐 아니라, 미움과 앙심을 품는 것도 어둠입니다. 무지의 구름 속에 머물러 있는 것도 어둠이고, 옹졸함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어둠입니다. 이밖에도 빛이신 그리스도와 반대되는 어둠은 참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요한 1,8.10; 2,1)
죄 사함의 은총이 쏟아지는 고해소에서 본인의 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상황인데, 왜냐하면 기쁨은 ‘통회’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뉘우침 없는 고백’은 기쁨을 동반하지 않습니다. 주부가 가계부를 쓰지 않고, 회사가 회계장부를 작성하지 않는다면, 살림살이를 파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가계부와 회계장부가 없으면 자신의 영혼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영혼 동산에서 불이 났는데, 연기가 올라와 불이 난 것을 알기는 아는데, 어디에서 어느 정도의 불이 났는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영혼을 만나면 영혼의 소방관인 고해사제는 참 난감합니다. 은총의 폭포수를 쏴주기는 해야겠는데, 어디에 어느 정도의 폭포수를 쏴야 할지? 짧은 시간에 그분의 삶을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죄경을 읊어줘도 그 영혼은 기쁨을 느끼지 못할 텐데... 안타까움만 잔뜩 떠안은 채 고해사제는 무기력해집니다.
영혼의 회계장부는 ‘양심성찰’입니다. 회계장부를 연말에 몰아서 쓴다면, 그것이 제대로 된 회계장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양심성찰은 매일, 그리고 매 사건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부족함과 욕망 등을 이해하고 성령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고백해야 할 내용을 잘 모르겠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마땅히 알아야 할 죄를 모르는 ‘무지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고, 양심성찰이 부족하다는 신호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쏟아지는 죄 사함의 은총’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자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1요한 2,1-2 편집) 고해소에서 자기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고해자들도 만나는데, 그리스도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빛, 사랑의 빛, 용서의 따스함, 사랑의 온기를 누리기 위해서
‘양심성찰’은 성실히 수행되어야 마땅합니다.
첫댓글 옹졸함과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이 올라올 때 고해성사를 보면서 해소했었는데, 요즘은 성사를 잊어버리고 살았네요~ㅎㅎ
성사보고 싶을 때, 연락주세요. 환영합니다.^^
@빠삐용 신부님, 눈물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