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권환(權煥) 시전집이 묶여 나왔다. 89년 월북 작가의 해금 조치 이후 약10년만의 일이다. 필자가 권환을 지면으로 처음 접한 것은, 최원식 해제,《건설기의 조선문학》(온누리, 1988, 4쪽)에서였다. 그후 오랜 뒤에 권환을 보다 심도있게 접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지난 95년 박사과정 민족문학사 강좌 때 내게 부여된 과제가 권환에 대한 보고서였다. 그때까지 권환 연구는, 앞의 책 인명 해설 부분에 실린 약력과 권영민의《한국근대문인대사전》(아세아문화사, 1990)이 고작이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마산고등학교, 마산 교육청,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등을 찾았다. 이로써 권환에 대한 윤곽이 잡혀갔고, 이 작업은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 생각되었다. 권환은 평론과 시작 활동을 동시에 한 작가로, 카프의 맹장이며, 좌익 민족문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권환 연구는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논문은 권환 연구의 본격적 작업을 위한 선행 연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작가의 생애를 추적하는 역사주의 방법과 작품 분석을 위한 예비적 작업을 동시에 수행했다. 이 글은 주로 권환의 전기 확정을 위한 예비 작업과 권환 시의 한 단면을 통해 그가 우리의 민족문학사에서 어떤 위상에 놓여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2. 순결한 민족시인
1
시인 권환은 카프의 이념성과 투쟁성의 한 켠에서 오롯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해방직후 수많은 좌익인사들이 월북을 단행할 때, 권환은 마산에 은거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 의문으로 남아있는 일이지만, 그보다는 우선 우리가 시인 권환을 너무 오랫동안 문학사에서 방치한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1988년 월북문인 해금조치 이후 권환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있어 왔으며, 실제로 상당한 연구 성과를 거두고 있다. 최근에 권환 시전집을 발간한 이후 새로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금까지 권환에 대한 연구는 대개가 작품론의 일부에 그치고 있으며, 작가 연구는 거의 없다. 이 글은 권환에 대한 작가 연구의 미비함에 아쉬움을 표하면서, 보다 실증적인 작가 연구를 위해 시작하려고 한다. 필자는 권환 시전집을 묶었다는 책임감으로 늘 권환의 삶에 관심을 기울여 왔고, 권환의 생애를 반추할 제보자를 찾아다녔다. 지금까지 필자가 만난 제보자는 오랫동안 권환의 주위에서 함께 생활했던 오촌 당숙 권오엽 옹과 권환의 셋째 동생 권경범 옹과 기타 친척들이다. 이들의 제보와 함께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를 통해서 권환의 작가 연구에 접근하려고 한다. 또한, 지금까지 알려진 권환 사진 자료도 아울러 공개하고자 한다. 이번의 이 작가 연구를 통해서 권환이 백석, 이용악 못지 않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을 기대한다.
2
시인 권환(權煥)은 경남(慶南) 창원군(昌原郡) 진전면(鎭田面) 오서리(五西里) 565번지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은 1903년 음력 1월 6일이다. 권환은 아버지 권오봉(權五鳳)과 어머니 김혜경(金惠卿)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다. 권환의 아버지 권오봉(權五鳳)이 장남이고, 권환 또한 장남이었기 때문에 조부의 사랑은 극진했으리라 짐작한다. 여기서 아버지 권오봉을 잠깐 서술할 필요가 있다. 권오봉은 오서리의 3백석지기 중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7세때부터 명문장으로 이름이 날만큼 명민했고, 1898년(당년 20세)에 단신으로 상경하여 사립흥화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전국순회강연을 하면서 계몽의식을 고취시킨다. 1910년 10월 고향 오서리에 권씨 가문의 문중서당에 사립경행학교를 세우고, 18년간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권오봉은 생전에 직접 쓴 방대한 분량의『성재일기』(21권)를 남기고 있다. 이 일기는 권환의 부인 조성남 여사가 보관하고 있었다. 이 자료를 검토하면, 권환의 생애를 상당 부분 추적할 수 있으리라 짐작된다. 호적에 등재된 권환의 가계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권환의 가계 도표>
조부모 권영국(權寧國)
황효정(黃孝貞)
부모 권오봉(權五奉, 1879)
김혜경(金惠卿, 1877)
삼촌 권오란(權五鸞)
이외분(李外扮)
본인 권경완
(權景完, 1903)
조성남
(趙聖南, 1901)
弟 권경태
(權景兌, 1910)
이점선
(李点善, 1913)
妹 권조희
(權祖喜, 1913)
허 담
(許淡, 김 해)
弟 권경범
(權景範, 1916)
김용의
(金容宜, 1925)
이 가계 도표를 참조하면서 권환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하자. 호적에 등재된 권환의 본명은 권경완(權景完)이고, 할아버지는 권영국(權寧國)이며, 할머니는 황효정(黃孝貞)이다. 아버지 권오봉은 1879년 11월 26일생이고, 어머니 김혜경은 1877년 1월 25일생이다. 권환이 태어난 1903년은 아버지 권오봉이 25세 때의 일이고, 이 때는 할아버지도 생존해 있었고, 장남으로 태어난 권환은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했던 것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권환의 서울휘문중학 진학은 권경범 옹의 진술이 타당할 것 같다.
1922년경(20세) 권환은 휘문중학 5년제를 4년만에 수료한다. 1921년 아버지 권오봉은 안희제와 함께 백산상회 자금 5만원으로 합천군 삼가면에 500석 규모의 땅을 개간하였으나, 이듬해 대홍수로 큰 손해를 입고 만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1922년경 권환은 일본 야마가타 고교에 진학한다. 이 시기의 어려움은 앞의 권오익의 회상에서 '조선(祖先) 전래의 가산을 탕진하였고, 노부는 일생의 채노(債奴)로 전락'하였다는 진술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1925년경(23세) 권환은 야마가타 고교 3년을 수료하고, 쿄오토오(京都) 제대 독문학과에 입학한다. 이것은 집안의 경사였던 것 같다. 권경범 옹의 제보에 따르면, '형님이 경도제대 입학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께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것은 권환에 대한 할아버지의 남다른 정을 느끼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간에 독립운동을 하면서 기울어가는 가세에 권환의 쿄오토오제대 입학은 하나의 힘이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환은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사회주의 민족운동을 전개한다. 대학 재학시절 사상범으로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조선프로레타리아 동경 지부에 자주 드나들었으며, 이들과 일정한 교우관계를 형성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권오엽 옹의 진술에 따르면, 대학시절 아나키스트인 독문과 교수의 이름을 자주 거론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권환은 1925년경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것 같다.
1927년(25세)에 권환은 재일본 유학생 잡지인『학조(學潮)』에 소설「앓고 있는 영(靈)」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1929년경『학조』필화 사건으로 구속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 경향은 '당의 문학'이라는 조선프로예술동맹의 노선에 부합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권환의 최초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929년(27세) 권환은 쿄오토오제대 독문과를 졸업한다. 그해 5월에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 동경지부에 가입하였다. 또한, 동년에『학조』필화 사건으로 구속되지만, 곧 풀려난다. 이 시기에 대해서 최근에 공개한 권영민 교수의 자료를 살펴보기로 하자.
피고 권경완은 소화 4년(1929년) 5월경 동경시 스기나미구[杉竝區] 고원사 이북만 자택에서 동인(이북만-필자 주)의 권유로 인해 위 동맹의 목적을 알고 여기에 가입하고 그후 귀선하고 소화 5년(1930년) 5월 중 우 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에 뽑혀서 동년 12월 및 소화 6년(1931년) 3월 우 동맹 위원회에 출석하고 위 결사의 볼세비키화를 강화할 것을 결의하고 계속 가맹하고 있었으며,
이 부분은 1929년 이후 약 5년간의 행적을 추적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권환은 1929년 쿄오토오제대를 졸업할 무렵, 동경에서 이북만의 권유로 프로예술동맹원으로 가입한다. 그리고 1929년(27세) 권환은 귀국하여 11월 26일 함안군 죽남면 하림리 출신의 조성남과 결혼한다. 결혼 후 이들은 서울로 신접 살림을 차리고, 이듬해 4월 권환은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동맹 중앙집행위원회에 선임된다. 1929년경 중외일보 기자를 지낸다. 1930년(28세) 4월 10일 권환을 그렇게 아끼던 할아버지 권영국이 사망하였다.
1931년(29세) 권환은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의 중심인물로 활약한다.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은 프로문학의 대중화에 대한 극좌파의 안티테제에서 찾을 수 있는데, '전위의 눈으로 사물을 보라', '당의 문학'으로 요약되는 극좌파의 동경 유학생 안막, 김남천, 임화, 권환이 중심이었다. 이 시기 권환은 예술운동의 볼세비키화를 위해서 10가지 항목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1931년(29세) 3월 카프 기관지『전선(戰線)』을 발행하고자 했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금지당했다. 그해 '제1차 카프 사건'으로 검거되어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사회주의 평론과 리얼리즘 시들을 집중적으로 발표한다. 1931년부터 1934년경까지 권환의 창작 열기가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그리고 약 3년간 중외일보, 서울시보 기자를 지냈다. 대략 이 시기부터 권환의 지병인 폐결핵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다.
1934년(32세) 권환은 '신건설 사건'에 연루되어 약 2년간 옥고를 치른다. 신건설(新建設)은 1932년 결성된 단체로 카프의 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본격적인 프로극단이었다. 권환은 송영과 함께 신건설 문예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신건설의 공연작품은 독일 레마르크의 장편소설『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일본인 무라야마가 각색한 것이었다. 1934년 봄, 신건설이 전주 지방 공연을 계획하던 중 전단 문구의 불온성을 빌미로 공연을 중단시키고, 카프의 조직원 전체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카프의 제2차 검거이고, 이 사건은 1934년 여름부터 1936년 2월 최종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약 2년간 끌었다. 공판 당시의 권환에 대한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다.
본적 경상남도 창원읍 진전면 오서리 565번지
주거 경성부 안국동 중앙인서관
서울시보 기자
권환, 권경완 당 32년
1934년(32세) 권환은 서울시보 기자로 근무하였고, 거주지는 안국동 중앙인서관이었다. 카프의 제2차 검거 당시 권환은 박영희, 윤기정 등과 함께 전향을 서약하고, 3년 기간 각각 형의 집행을 유예하고 풀려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권오엽 옹에 따르면, 아버지 권오봉이 아들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는 사실과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전향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갈 것이다. 권환의 폐결핵 증세 발발 시기에 대해 권오익의 회고를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군이 이립(而立-공자의 말, 30세, 필자 주)의 고개를 넘기기도 전에 군의 몸을 침범한 원한의 악성병마와 한결같이 싸워온 쓰라린 과거를 회고하면 군이 면요(免夭 : 쉰 살을 겨우 넘기고 죽는 것 - 필자 주)의 기록을 남긴 것도 오히려 기적이라 하겠으나
1934년경까지 권환은 폐결핵과 투병생활을 거듭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였던 것이다. 1936년경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조선의학강습소(경성여의전 전신) 강사를 지내고, 잠시 조선일보,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지만, 지병으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것 같다. 그 사이에 둘째 경태(1932년), 여동생 조희(1935년) 등의 혼인이 있었다. 이 때 그의 집안은 두 자녀의 혼사와 큰아들 석방 문제 등으로 어수선했으리라 짐작된다. 석방된 후, 권환은 지병인 폐결핵으로 심하게 고생을 하고 있었다. 1939년(37세)『조선문학』6월호에 발표된 다음 시는 병마에 시달리는 권환의 고통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내 가슴 위에 귀를 기울여보아다고
심장의 고동이 부서진 기계와 같이
쉬고 있지 않은지
내 몸뚱이에서 썩은 냄새가
무럭무럭 나지 않은지
내 폐장(肺臟) 속에서 구더기가
버글버글 기어 나오지 않은지
나는 시일(時日)로 내 육체를
만져보고 살펴본다
-「나의 육체」부분
1936년경 카프 제2차 검거 때 전향 서약을 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약 3년간 그는 극도로 약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는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일제 치하 대다수 문인들이 겪었던 사회적 여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시기는 카프 진영의 사회주의 문인들의 대다수가 친일로 전향하는 불행한 시기와 맞물린다. 이와 더불어 호적에 권환의 성씨가 권전(權田)으로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창씨개명의 흔적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권환은 일제말기의 폭압적 상황에서도 친일적 경향의 글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1940년경(38세)부터 1941년까지 약 2년간은『조선일보』,『조광』 등지에서 시와 평론이 간혹 실리곤 했는데, 1942년경 이후부터는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볼 때, 1942년경(40세)부터 폐결핵 증세가 악화되어 향리에 칩거하면서, 시작 활동에만 전념했던 것 같다.
1943년(41세) 권환은 첫시집『자화상(自畵像』을 발표한다. 이 시집에 실린 소재들은 주로 시골의 한적한 풍경과 도시의 외곽 풍경이 지배적이다. 그리고「병상단상(病狀斷想)」,「한역」등의 시제들에서 병마와 싸우면서 은둔한 모습을 역력히 읽을 수 있다.
1944년(42세) 두 번째 시집『윤리(倫理)』를 발표한다. 이 시집에서도 첫 시집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서정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주목을 요하는 부분은, 시집의 끝부분에 실린 작가 약력 소개 부분이다. 이것은 문헌상으로 볼 때, 권환에 대한 최초의 약력 기록이다. 이 기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경남 창원 출생. 야마가타고교를 거쳐 쿄오토오제국대학 독문과 졸업. 중외일보사 기자. 조선여자의학 강습소(경성여의전 전신) 강사. 근간에는 김해 농장원.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기자 등을 거쳐서, 현재 경성제대 부속 도서관 사서로 근무 중임. 기간(旣刊)에 자화상이 있음
1942년 근간에 권환은 김해 농장원으로 있었는데, 이곳은 아마 손아래 처남인 허담의 집인 듯하다. 여기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고 하기보다는 요양을 하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 시집에서 관심을 모으는 것은, 시집 끝의 저자가 권전환(權田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창씨개명의 흔적인 것 같다. 이 두 권의 시집에는 권환의 내면 문제와 현실에 대한 반성이 주정조를 이룬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병마와 싸우면서 겪은 고독감과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의 좌절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1944년경(42세) 권환은 잠시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촉탁위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권경범 옹의 진술에 따르면, 이것은 임시직이었고, 정규직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45년(43세) 해방을 맞이하자 권환은 조선프로레타리아 문학동맹의 위원으로 참가한다. 주지하다시피, 조선프로레타리아 문학동맹은 조선문학건설본부의 인민적 신문화 건설론에 반대하면서, 카프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취지에서 결성되었다. 1945년 9월 17일 권환은 이기영을 앞세우고, 윤기정, 한효, 한설야, 이동규, 윤규섭, 송영, 홍구, 김승구 등과 함께 조선프로레타리아 문학동맹을 결성한다. 이 단체를 결성한 후, 권환은 여러 곳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면서, 1930년대 카프 결성 때와 같은 왕성한 문학활동을 한다. 1945년 12월 3일 권환과 홍구의 협력으로 문학건설본부와 문학동맹의 합동위원회를 연후, 12월 6일 문학건설본부와 문학동맹이 통합하게 된다. 12월 13일 통합 결성식에서 전국문학자대회의 개최를 결정하고, 준비에 착수하게 된다. 이러한 통합과 준비과정에서 권환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46년(44세) 2월 8일과 9일에 권환은 전국문학자대회의 준비위원으로 제반 준비사항을 진행했다. 이 대회는 초청 임석자가 804명, 출석문인이 약 100명으로 해방 후 가장 규모 큰 대회였다. 권환은 이 대회에서 개회선언을 하였고, '농민문학의 방향'이라는 보고연설을 하였다. 또한, 이 대회에서 권환은 전국문학가동맹의 서기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8월에 시집『동결(凍結)』을 발표하는데, 이 시집을 발행한 건설출판사는 월북작가 조벽암이 맡고 있었다. 조벽암은「이용악 시집」, 오장환의「헌사」,「정지용시집」등을 발간한 후, 곧장 권환의 시집을 묶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권환의 대중적 지지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시집 『동결』은 해방 전에 발표된 두 권의 시집에서 선정된 작품을 실었다.
1947년경(45세) 권환은 시「고궁에 보내는 글」(1947. 3. 20)을 끝으로 문학활동을 중단한다. 이후에 발표된 작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1946년 홍명희가 월북하고, 1947년 임화, 이태준 등이 월북하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문학가 동맹의 핵심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남한을 선택하면서 마산으로 칩거한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으로 남한은 단독 정부를 수립하였고, 1948년 9월 9일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948년(46세) 3월 8일 향리에서 아버지 권오봉이 사망한다. 그가 월북을 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사망은 월북의 시기를 놓치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 같다. 또한, 권오엽 옹에 따르면, '그분은 원래 사회주의 혁명적 투쟁 의식과는 관계없이 단지 농민과 노동자의 삶 자체를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굳이 남·북이라는 지역에 연연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1950년(48세) 권오엽 옹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권환은 '진주의 친구 집에 은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동사무소에서 만난 한 제보자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오서리는 좌, 우익으로 나누어진 채 살육의 현장을 치렀다고 한다. 이 분쟁의 한 가운데 있었던, 권환은 더 이상 고향 오서리에 머물러 있지 못했던 것 같다. 가세는 이미 기울고, 부친마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권환은 외롭게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1951년경(49세) 권환은 마산시 합포구 완월동 오두막집에서 기거하였다. 이 집은 권환이 마산 결핵요양원으로 치료를 다니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던 곳이고, 그의 삶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1951년경 이후 지병인 폐결핵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권환의 부인은 병간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권오엽 옹의 회고에 따르면, '함지박에 잡화를 이고 버스 정류장에서 행상까지 하면서 남편의 약값을 마련하기도 했으며, 남편이 각혈을 해서 위독하면 들쳐업고 가파른 완월동 내리막길을 걸어서 병원을 향해 오르내리며 병간호를 했다'고 한다.
1952년(50세) 권환은 마산공립중학교(현재, 마산 고등학교)에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독일어 강사를 했다. 이 시기의 우울한 심정을 조선문학가동맹 아동문학부 위원인 이주홍에게 전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약 2년 동안 마산에서 문학활동을 하던 문인들과 교류가 잦았다고 한다. 마산 중학교에 함께 있었던 이석 시인도 이 당시 권환과 상당한 교분을 맺었다고 한다. 또한, 권환은 마산에서 교사 모임을 할 때도 종종 자리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권환은 마산의 저명 문인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1954년(52세) 6월 29일 권환은 마산시 합포구 완월동 101-14번지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권환은 폐결핵의 병세가 깊어져서 서울대병원과 마산요양원 등지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란만장한 세상을 마쳤다. 이 부분에 대해서 권오익의 회고를 좀더 참고하기로 하자.
오늘 군의 2기상일(朞祥日)에 즈음하여 과학을 신봉하는 종숙으로서 어찌 그대 앎이 있을 것을 기대하랴마는 그래도 하늘에 사무친 애도의 정을 참지 못하여 부질없이 한 줄기 향불 연기로서 잠든 혼을 불러 일으켜 애타는 몇 마디를 토설(吐洩)한다. (…중략…) 인생의 영종(永終)에 어찌 눈물이 없으랴마는 군이 일생에 품은 포부와 경륜이 장차 실현되려는 이 때에 그 거룩한 순간을 군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차마 떠날 수 없는 군의 걸음걸이었기 때문에 범상한 눈물로 대할 수 없으며 '오불사(吾不死)'를 외치는 백발노친과 '아하생(我何生)'을 부르짖는 무의고처(無倚孤妻)를 군의 뒤에 남겨 두었기 때문에 단장의 애수가 한층 더하는 것이다. 1956. 6. 29. 경완종질대상일(景完從姪大祥日)
이 부분에서 '오불사(吾不死)'를 외치는 '백발노친'은 권환의 어머님인데, 실제 호적에 따르면, 모친 사망일은 1951년 6월 24일이다. 이것은 권오익의 회고가 정확한 것 같은데, 호적 처리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지만, 추측하건데, 아들을 먼저 보내는 불행을 감추기 위한 호적 정리인 것 같다.
권환의 묘는 진전면 사무소에서 북쪽으로 약 1km 지점의 진전중학교 옆 야산 중턱에 있다. 1991년 권환의 부인은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91세였다. 권환의 초상화 아래에 시「원망」이라는 작품을 자필로 쓴 채 보관하고 있었다고 하니, 부인의 권환에 대한 원망과 한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권환은 생전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권환은 시「접동새」에서 접동새의 울음을 '계집 죽고 자식 죽고'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시를 읽으면 그가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 의미심장함이 느껴질 것이다. 부인의 묘는 진전면 오서리 권환의 묘 옆에 있다.
3
지금까지 막연한 자료로 일관되어온 권환의 생애를 이 글을 통해서 어느 정도 실제적 접근이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아직 검토해야할 자료가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권환 작가 연구의 일단을 공개하는 것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뜻에서 시작된 것이다. 앞으로 권오봉의『성재일기』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밝혀질 권환의 삶과 또다른 제보자를 확보하여 이번 작가 연보에 첨가시켜야 하는 것은 과제로 남겨져 있다. 또한, 국내의 휘문고보 학적부, 일본의 야마가타고교, 경도제대 학적부 등은 추후 반드시 검토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민족시인 권환은 이념의 격변기에 순결한 죽음을 하였다. 그러한 혼란의 상황에서도 그는 박꽃같이 깨끗하게 살려고 하였다. 권환을 기억하는 제보자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작은 체구에 항상 농민의 문제를 걱정하고 염려한 민족주의자로 알고 있었다. 그만큼 권환은 겸손하고 순결한 민족시인으로 대중들에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 문학사는 권환을 의도적으로 죽이고 있었으며, 이것은 백석이나 이용악의 시를 죽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문학사의 기억 저편에 있는 권환의 생애와 작품의 통하여, 그 위상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선행될 때, 시인 권환은 우리 문학사의 반열에 우뚝서서 새로운 민족시인으로 조명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부기 1. 시집『동결』을 보관하고 있던 종제 경현의 간략한 약력이 인상깊다. 이 글을 통해서 권환의 친척들이 얼마나 권환을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일부분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4진사 8문장의 명문이요 위대한 시대의 선구자요 고결한 애국자요 고명한 남국의 문장가의 장남으로 재질이 탁월하였고, 서울 휘문고보, 일본 야마가다고등학교, 경도제대 독문과를 졸업,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전주 및 서울 감방에서 투옥 고문과 갖은 옥고에도 굴복하지 아니하였으며, 해방을 맞이하자 여기에서 몸은 혹독한 서리를 맞았고, 병마는 골수에 뿌리깊이 침투하여 밤과 낮을 모르시고, 피의 활약을 전개한지 수삭이 못되여 서울대병원, 마산요양원 등에서 투병하시다가 끝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습니다. 해방 후 저술한 이 책은 종숙부님(오익박사)께서 사변, 혼란, 미국 거주까지 하시면서 이 원본을 보존하고 계시다가 이번에 경범형님께 주시기에 우리들은 증보하여 대대 보존키로 하였습니다. 해방 전에 저술한『자화상』,『윤리』등 기타 많은 문헌 등을 보존 못하고 보니 더욱 아쉽기만 합니다.
- 1984년 12월 25일(크리스마스) 신흥건축설계사 종제 경현 삼가 씀
부기 2. 권환의 생가와 묘소를 찾아가는 길을 안내하기로 한다. 창원군 진전면은 마산에서 고성·진주간 2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약 30-40km 정도 되는 곳에 진전휴게소가 있다. 이곳은 고성과 진주로 갈라지는 분기점인데, 여기에서 왼쪽으로 14번 국도 고성 방면으로 약 5분 정도 내려와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장 진전면 소재지에 닿는다. 이곳이 진전면 오서리 일대이다. 오서리는 진전면 사무소를 중심으로 나누어진 도로의 동쪽은 동대로 부르고, 서쪽은 서대라 부른다. 오서리는 진전천을 따라 넓은 농경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농촌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전면 사무소에서 오서리로 향하는 곳에 '안동 권씨 세거지(安東權氏世居地)'라는 입석이 있다. 이 입석의 맞은 편에 사립경행학교가 있고, 반대편 골목길을 찾아가면 권환의 생가터가 있다. 권환의 묘는 오서리에서 진전중학교 방향으로 도보로 약 15분 정도 걸리며, 진전중학교 옆 야산 자락에 위치해있다.
3. 작품 연구
⑴ 기존 연구의 성과
권환은 일제 치하 카프의 맹장으로 노동자와 농민 계층의 의식을 반영하는 시를 발표하면서 일제에 항거하였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이라는 테제를 내걸고 '환희'에 찬 민족 문학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의 시는 대개 두 가지 세계관을 이루고 있다. 하나는 30년대 초 카프 문학이 정점에 이른 시기와 해방 직후에 발표하는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투적 투쟁성이고, 다른 하나는 카프 해산 이후 칩거 기간 동안 발표하는 반성적 자기 성찰의 세계이다. 전자는 주로《카프시인집》(1931)으로부터 카프의 해산 시기까지 발표하는 시와 해방 직후 좌우익 논쟁이 격렬한 시기에 발표하는 시들이고, 후자는 일제 치하에 카프가 해산되고, 일제의 침략 정책이 극을 달하는 시기에 묶어내는 두 권의 시집,《자화상》(1943)과《윤리》(1944)에 나오는 시들이다. 이 두 세계관은 그의 시가 갖는 중심 축이며, 그의 시는 이 두 세계 사이를 오고가면서 고뇌한 흔적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내용상으로 볼 때, 권환은 임화와 비슷한 시기에 서술화 경향의 '단편 서사시'를 발표하는데, 이것은 우리 리얼리즘 시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갖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권환 시의 기본적 의미구조를 개략적으로 소개하는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권환 시를 이해하는 기본적 단초를 제공하는데 주력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권환에 대한 연구는 해금 이후에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다. 개별 작가론은 물론이고, 작품에 대한 전반적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해금 이후 최근까지의 권환에 대한 연구는 시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시의 경향을 선보인 글들이 확인되고 있다. 해금 이전의 권환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인 연구라기 보다는 대개의 일반론과 단평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또한, 1945년 이전에 발표된 글은, 신유인(申唯人), 임화, 박승극(朴勝極) 등의 글이 있고, 김팔봉(金八峰), 윤곤강 등이 시집《자화상》에 대해 개괄적인 평을 한 글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권환의 작가론이나, 작품론으로 삼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것들이다. 권환의 문학 활동은 다양하고도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다. 처음 작품을 발표하는 1930년부터 해방의 후 1947년까지의 공식적인 문학 활동 기간만도 약17년에 이른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시와 소설, 평론을 발표하였고, 비록 초기의 습작기이기는 하지만, 희곡도 두 편이나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다양한 문학 작품 발표 이외에도, 그는 1930년 카프에 가입하여 카프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46년 조선 문학가동맹의 후임 서기장을 역임하는 등 왕성한 문학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문학적 편력과는 무관하게 우리 현대 문학사는 그를 철저히 소외시켜 왔다.
1980년대 후반기 이후 해방기 문학사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권환의 작품 세계와 그의 문학적 위치에 대한 의의를 올바로 자리 매김해야 하리라 본다. 이것은 현대문학사의 정확한 재구성을 위하여 선행되어야 할 일이며, 넓게는 통일 시대를 대비하여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⑵ 작품 분석
권환의 시는 몇가지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로, 비록 30년대 시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검열을 많이 받은 흔적이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 활동을 한 작가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권환의 시는 지나치게 검열의 흔적이 많이 나타나 있다. 이는 사회주의 작가이면서도 좀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권환의 시가 여타의 '경향시'들 보다 더 격렬한 선전 선동 문구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약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에서《학조》필화 사건 등에 연루된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귀국한 후 발표하는 30년대 카프 중앙집행위원 당시의 시들은 격렬한 투쟁성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로, 권환의 시는 대부분 서정시이지만, 특징적인 몇 편의 산문시와 단편 서사시가 보인다. 이를 다시 내용상으로 나누면, 일정한 이야기 구조를 갖춘 '서사시'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서술시'로 나눌 수 있다. '서사시'는 민중적 삶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고 있으며, '서술시'는 주로 화자의 내면 의식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셋째로, 권환의 시는 화자의 가족을 소재로 한 시가 많다. 어느 시인에게나 가족은 중요한 시적 소재가 되지만, 권환을 둘러싼 가족은 치열한 현실과 맞서 싸우는 시인의 부끄러움이 절절히 배여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특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나타난 작품, 어머니, 아내,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 있다. 이들 시는 권환 가족이 몰락해가는 과정과 일정한 상관성을 갖고 있다. 넷째로, 권환 시의 표현상 특징을 들 수 있다. 그의 시는 흰색과 푸른색 등 색채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들 색채 이미지는 주로 화자가 추구하는 이상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 이를테면, <청당>,<설경>,<청대콩>,<눈>등에서 보이는 푸른색, 흰색은 화자가 추구하는 평화와 순수 세계의 지향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평화와 순수 세계의 지향은 현실의 척박함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권환 시의 몇 가지 특징은 우리 시 문학사에서 새롭게 조망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권환의 작품 활동은 1926년 쿄오토오제대 독문과 재학 시절 일본 유학생 잡지인《학조》제2호에 소설<앓고 있는 영>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본격적인 문학 활동이라기 보다는 습작기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로서는 이 작품의 내용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학조》 필화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피검될 정도의 작품이었다고 한다면, 극단적인 아니키즘이나, 혁명적 사상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쿄오토오제대 시절부터 그의 문학은 계급문학에 깊이 침윤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권환의 문학 활동은 1930년 7월 카프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면서 시작된다. 1930년 카프 가입 이후 그는 평론과 시를 발표하면서 일정한 문학적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에 중심되는 문학적 대응은 주로 '예술대중화론'이었는데, 권환의 평론과 시들에는 노동자, 농민계급 의식을 드러내는 글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권환의 볼세비키적 '예술대중화론'은 '전위의 눈으로 세계를 보라', 그리고 '당의 문학에 헌신하라' 등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극단적 계급 의식은 주로 30년대 카프의 운동노선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계급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은, 1930년대 초기와 1945년 해방 직후에 발표되었다. 1930년대의 작품은<가려거든 가거라>,<정지한 기계>,<소년공(少年工)의 노래>,<기계>등이다. 해방 직후의 작품은<어서 가거라>,<사자같은 양>,<쇠사슬>등이다. 이들 작품이 지향하는 세계는 카프의 '노동자의 현실'과 부합하는 계급성과 당파성에 근거하고 있다. 다음 시는 이러한 경향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소부르주아지들아
못나고 비겁한 소부르주아지들아
어서 가거라 너희들 나라로
환멸의 나라로 몰락의 나라로
소부르주아지들아
부르주아의 서자식(庶子息) 프롤레타리아의 적인 소부르주아지들아
어서 가거라 너 갈 데로 가거라
홍등(紅燈)이 달린 카페로
따뜻한 너희 집 안방 구석에로
부드러운 보금자리 여편네 무릎 위로
그래서 환멸의 나라 속에서
달고 단 낮잠이나 자거라
가거라 가 가 어서
적은 새앙쥐 같은 소부르주아지들아
늙은 여우 같은 소부르주아지들아
너의 가면 너의 야욕 너의 모든 지식의 껍질을 짊어지고 - <가려거든 가거라> 전문
이 작품은 '우리 진영 안에 있는 소부르주아지에게 주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시이다. 이 시는 격렬하고 첨예한 계급적 의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다분히 선동적이고, 구호적이다. 이 시에 특징적으로 보이는 반복법은, 구호를 위해 적절한 기법이다. 이 시는 화자와 대립하는 '소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환멸을 시화하고 있다. 화자가 대립하는 현실은 '프로레타리아/소부르주아'의 이원적 대립이다. 이 대립에서 부르주아는 '환멸의 나라', '몰락의 나라'의 가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이 시의 특징적 어조인 '-어라/-아라'의 명령형 어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화자의 세계에 대한 단정적이고, 과격한 의식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 의식은 권환 시의 한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정지한 기계>, <우리를 가난한 집 여자이라고>, <머리를 땅까지 숙일 때까지> 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들의 공통점은 노동자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나, 민중들의 고통을 통해서 당대 사회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이른바 문학이 당의 '선전 선동의 도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카프의 혁명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향시'들이다. 이러한 '경향시'들은 대개 집단의 이념과 개인의 혁명적 인식을 토대로 창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들은 당시의 우울한 식민지 현실과 우리 민족의 처지를 반영하는 리얼리즘 시라는 점에서 일정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시들은 자칫 노동자, 농민의 선전 선동의 도구로 전락한 시라는 점에서 시적 의미망을 상실하고 있다. 이것은 카프의 급진적인 정치성에 부합하는 이념적 색채를 전혀 무시할 수 없고, 카프의 정치적인 선동성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시라는 점에서 다분히 목적성을 갖고 있다. 권환의 초기시는 창작 태도에 있어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계급성을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권환이 진정한 당의 이념에 부합하는 이념의 문학에 일정한 회의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카프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서 살필 수 있다. 이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론'의 비판은 그의 시작 방법에 대한 회의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그의 '경향시'는 카프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비판적 회의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창작방법론'에 대한 비판의 한 부분이다.
"그러면 우리는 '유물변증법적창작방법'의 오류가 과연 어떠한 점에 있는가를 먼저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오류점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A. 세계관과 현실과의 본말전도 B. 세계관과 방법과의 혼동시 C. 세계관의 과대 평가"
권환의 변증법적 창작 원리에 대한 비판은, '세계관과 현실'의 관계, 이를 드러내는 '방법의 문제', '세계관의 인식' 등에 초점이 놓여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은 리얼리즘 시의 창작 방법이다. 이는 세계와 자아의 대립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인의 의식이 세계에 대립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유물변증법적창작방법'의 초점은 카프의 창작 방법론과 결부된 것이다.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에서 구속되었던 그는 카프의 2차 방향 전환에서 논의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비판적 인식 전환이 일어난다. 그는 작품 자체의 변모는 물론이거니와, 장르에 있어서도 평론보다는 시 창작 쪽으로 변모하고 있다. 구체적 작품 연보를 따져보더라도, 두 권의 시집이 1943년과 1944년에 발표되고, 평론 활동은 주로 단평에 머무르고 있다. 이는 창작 방법에 대한 의식의 전환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궁극적으로 자기 반성과 현실에 대한 갈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주로 초기시와 평론에서 보여준 예술의 대중화 논의와 현실에 대한 첨예한 대립적 시각이 그의 시집 전편에서 거의 사라지고, 농촌의 서정을 미래 지향적이고, 아름다운 심상으로 시화하고 있다. 1943년에 발표한 시집《자화상》에 실려 있는 일련의 시들은 현실과의 첨예한 대결 의지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거나 현실에 대한 극복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우선 시집 《자화상》에 대한 팔봉의 단평을 살펴보기로 하자.
'결론에서부터 먼저 말해 버린다면 소박(素朴)하고 순진(純眞)하고 단순(單純)하고 굴강(屈强)하지 않은 대신 허약(虛弱)하고 격동적(激動的)이 아니오, 반대로 항정적(沆靜的)이며, 감정의 활동이 입체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평면적이라고 할 수 있으니, 여상(如上)의 의미에서 그는 옛날의 순박하고 순수(純粹)한 평민 시인의 전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팔봉 김기진은 권환과 함께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했던 적이 있다. 팔봉은 그의 시를 '소박하고 순진하다'고 전제하고, '옛날의 평민 시인의 전형'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것은 권환의 시 세계를 압축하는 말이다. 권환의 시는 기층 민중의 세계를 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집《자화상》은 기층 민중들이 지향하는 미래에 대한 전망과 소박하고 맑은 서정의 세계를 아름답게 시화하고 있다. 다음 두 시는 시집《자화상》의 두 축을 잘 시화하고 있다.
⑴ 명일이 만일 없다면
나는 저 한없이 높고 깜깜한 창공을 대담하게 바라보지 못할 게다
그러나 저 수억만 개의 진주 같은 별들은
나를 내려다보고 모두 생긋생긋 웃지 않나
그리구 나를 향해 분명히 속삭어린다
'명일이 있다'고 '명일이 온다'고.
오 창공이여 대지여
명일이 있다 멀지 않어 명일이 온다 환희의 명일이
그래서 우리는 차고 캄캄한 이 밤을 극히 사랑한다
밝고 따뜻한 낮과 같이
그래서 진주알처럼 적은 이 별들을 한없이 사랑한다.
커다란 태양같이.
명일이 있다
그래서 나는 한껏 웃고 한껏 울련다. - <명일(明日)> 부분
⑵ 바다 같은 속으로
박쥐처럼 사라지다
기차는 향수를 싣고
납 같은 눈이 소리 없이
외로운 역을 덮다
무덤같이 고요한 대합실
벤치 위에 혼자 앉아
조을고 있는 늙은 할머니
왜 그리도 내 어머니와 같은지
귤껍질 같은 두 볼이
젊은 역부(驛夫)의 외투 자락에서
툭툭 떨어지는 흰 눈
한 송이 두 송이 식은 난로 위에
그림을 그리고 사라진다 - <한역(寒驛)> 전문
시 ⑴은 시집《자화상》의 서시에 해당하는 시이다. 이 시는 시적 화자의 미래지향적 의지를 시화하고 있다. 화자가 내일에 대해 거는 희망과 그 희망을 갈구하는 태도는 차라리 처절하다. 이 시의 전반부는 내일이 없다는 것을 '가정이라도 상상이라도' 하기 싫은 현실의 처절한 상태가 시화되어 있다. 그래서 화자는 마지막 연에 이르러, '내일이 온다'고 위안의 확신을 한다. 이와같이 어둠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이 희망에 대한 기대가 시 ⑴의 압권이다. 화자가 기다리는 내일은 희망이고, 이 희망은 '커다란 태양' 같이 떠오르고, 그것은 '진주알'처럼 영롱한 희망이다. 이러한 희망이 때론 그리운 얼굴로 제시되기도 하고(<달>), 평등과 차별이 없는 증표로 나타나기도 한다(<설경>). 그리고 현실에 대한 고발과 소외된 계층에 대한 자조적인 미소로 형상화되기도 한다(<청대콩>,<미소>등).
시 ⑵는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늙은 할머니가 졸고 있는 역의 한가로움은 일제 식민지라는 현실을 훌쩍 뛰어넘는 평화의 세계를 시화하고 있다. 이 한 폭의 그림같은 시를 통하여 우리는 권환이 지향한 순수의 서정 세계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은 계급 해방의 대중적 창작방법론이 자기의 내면 문제로 귀착하였고, 시적 태도가 현실에 대해 허무적이고, 자조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변모 양상이 현실 극복 의지의 내면적 승화라는 긍정적 측면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할지라도,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은 소극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집《자화상》에 나오는 47편의 시를 내용별로 묶어 보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 미래에 대한 기대와 갈망, 내일에 대한 희망 등이 압축된다. 여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비관적 태도이다. 이것은 시<고향>,<희망>,<눈>,<청당>등에서 보여주는 밝고 건강한 세계의 저변에는 현실적으로 비관하거나 안주하는 한계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 말기에 카프의 맹원들이 해산하면서 나타난 현실 대응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제와 타협하여 친일 행각을 벌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외면한 채 은둔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대응 방법 속에서 권환은 카프 해산 후, 현실에 대해 절망하고 비관하는 은둔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제 말기에 기자 활동을 하면서 두 권의 시집을 내기도 한다. 이는 권환이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현실과 타협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신상의 이유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 발표하는 두 권의 시집에서 집요하게 흐르는 은둔적 태도는 비판의 의지가 있다. 다음 시<자화상>은 자기의 은둔적 삶을 반성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거울을 무서워하는 나는
아침마다 하얀 벽 바닥에
얼굴을 대보았다
그러나 얼굴은 영영 안 보였다
하얀 벽에는
하얀 벽뿐이었다
하얀 벽뿐이었다
어떤 꿈 많은 시인은
제2의 나가 따라다녔더란다
단 둘이 얼마나 심심하였으랴
나는 그러나 제3의 나………제9의 나………제00의 나까지
언제나 깊은 밤이면
둘러싸고 들볶는다 -<자화상>전문
이 시에서 화자가 봉착한 현실은 막힌 '하얀 벽'이다. '하얀 벽'으로 막힌 현실에 대해서 자아는 '제3의 나……… 제9의 나……… 제00의 나까지' 분열되고 있다. 이 시는 자아의 분열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화자가 부닥친 것은 현실과 이상, 밝음과 어두움, 미래와 현실의 대립에서 좌절한 자아의 분열상과 갈등이라 할 수 있다. 시집《자화상》은 현실에 저항하던 시인의 패배가 자기 반성과 현실에 대한 고뇌로 변모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시<목내이(木乃伊)>,<전신주>,<여군대작1>,<투시>등은 죽음과 절망의 세계이고, 시<봄>,<가등>,<희망>,<하몽>등은 동경과 희망의 세계이다. 시집《자화상》은 현실과 이상, 화자와 세계의 대립이 반성의 자세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화자가 지향하는 세계가 현실에 대한 자기 반성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정신 세계가 궁극적으로 어디에 놓여 있는가는 좀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자기 반성이 현실 극복을 향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 대해 좌절한 것인가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시인의 시적 세계관을 규정짓는 중요한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시집《윤리》는 미래 지향적인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를 시화하고 있다. 시<집>,<추억>등은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을 시화하였고, 서사시<아리랑 고개>는 전래의 민담적인 요소를 시 속에 삽입하여 자본주의화로 붕괴되어가는 고향, 혹은, 전통 사회에 대한 향수를 통해서 아름다움의 세계를 시화하였다. 시집《윤리》의 정서는 대체로 담담하고 차분하다. 시인의 현실에 대한 시적 변모 양상을 중심으로 볼 때, 시집《윤리》는 현실의 문제에서 농촌의 현실로 회귀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시인의 의식 세계가 자기 내면 문제로 돌아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시의 내용은 주로 민중적 삶의 애환에 초점이 놓여 있고, 그들의 고통을 시화하는데 무게 중심이 있다. 이는 화자의 의식 세계를 끊임없이 지배하고 있는 정서가 척박한 당대 현실의 문제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권환의 시는 단순한 자기의 내면적 문제에 대한 갈등을 넘어서서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려는 민중의 시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권환의 민중 의식을 반영하는 작품이다. 좀 길긴 하지만, 권환의 단편서사시와 민중 의식을 살필 수 있는 시이기 때문에 전반부를 인용하기로 한다.
아리랑 고개는 항용 열두 고개라 한다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받아 그러나 이 때까지 넘겨달라는 사람은 있어도 넘어보았다는 사람은 일찍 보지 못하였다 그 너머에는 따라서 푸른 호수가 있는지 넓은 사막이 있는지 툰드라가 있는지 극락이 있는지 지옥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넘겨달라는 지도 그들밖에는 아는 이가 없었다
그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어떤 고개에는 자동(刺桐)같은 큰 가시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고, 또 어떤 고개에는 표범, 독사, 고릴라 같은 사나운 짐승들이 야단을 치고, 또 어떤 고개에는 대가리 둘 붙은 귀신 뿔난 도깨비들이 한낮에 푸른 불을 반짝인다 하였으니까
방랑객, 탐험객, 순례자들은 그러므로 열두 고개를 한숨에 넘을 듯이 올라갔다. 한 고개도 채 넘어보지 못하고 심장 약한 것만 한탄하여 되돌아 온 이가 얼마나 많았는가
그것은 눈보라가 바다 물결처럼 내려 때리는 캄캄한 밤이었다 감발을 칭칭 감고 남바위를 눈 밑까지 눌러쓴 막을동(莫乙童) 청년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숨을 헐떡이며 척설(尺雪)이 쌓여 어슴푸레하나 골인지 길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고개를 혼자 올라갔다
그러나 닭이 세 홰나 운 뒤에 퉁퉁 부운 발을 끄을며 고개 밑으로 되돌아왔다 고개 밑 외따로 불이 반짝이는 주막집 젊은 여자는 부글부글 끓는 동태국과 뿌연 막걸리 한 잔을 따라주며
'몇 고개나 넘다왔어요?'
'꼭 넘기가 사랑 끊기보다 더 힘드는데요'
'내가 이 집 와서 낳은 아이가 지금 일곱 살 먹는데 아직 이 고개 다 넘어간 사람은 못보았으니까요.'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어
아리랑 고개다 날 넘겨주소
아리랑 고개는 열두 고개
임 만나는 고개는 한 고개네 - <아리랑고개> 부분
우리 민족의 '한'이 절절히 배여 있는 '아리랑 고개'는 '이상/현실'의 갈등을 단적으로 제시하는 소재이다. 이 작품은 민요 '아리랑'을 서사적 구조로 짜맞춘 이야기 시이다. 여기에 나오는 '푸른 호수'가 있는 세계는 시적 화자가 갈망하는 이상향의 세계이다. 그러면서도 이 시를 읽는 독자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앞에서 접한 시집《자화상》의 자기 반성적 정신세계가 어두운 현실에 봉착하여 절망하고 있는 모습을 역력히 읽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시는 화자가 지향하는 미래가 어둡고 우울하다는 하소연을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하는 이미지가 단순히 화자의 어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삶의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화자가 그리워하는 고향은 당대 우리 민중이 처한 '한'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화자가 바라보는 어둠의 세계는 소박하고 깨끗한 아름다움의 세계와 공존하는 이항 대립의 세계이다. 아름다운 이상의 세계는 어둠의 세계와 대립항으로 존재하고, 이 두 세계는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두 공간에 나란하게 자리잡고 있다. 권환의 시 세계는 '어둠/밝음'의 이원적 공존 상태로 존재한다. 시집《윤리》는 민중적 고통의 세계와 맑고 순정한 이상향의 세계가 함께 공존한다. 이와같은 정서는 시<윤리>에 보이는 순정한 이미지에서 충분히 살필 수 있다. 시집《윤리》의 표제가 되는 시<윤리>는 어둠의 세계 다음에 오는 맑고 순정한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
박꽃 같이 아름답게 살련다
흰 눈 같이 깨끗하게 살련다
가을 호수같이 맑게 살련다
손톱 발톱 밑에 검은 때 하나 없이
갓 탕건에 먼지 훨훨 털어버리고
축대 뜰에 티끌 살살 쓸어버리고
살련다 박꽃 같이 가을 호수 같이
봄에는 종달새
가을에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
천천히 들어가며
살련다 박꽃 같이 가을 호수 같이 - <윤리> 부분
이 시의 화자는 맑고 순정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척박한 현실에 대해 순박하고 맑은 자세로 살려는 시인의 의지는 시집《자화상》보다 시집《윤리》에 이르면 더욱 심화되고 있다. 물론 시집《자화상》과 시집《윤리》는 그 발표 기간이 채 1년도 안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유사할 것이다. 그런데도 시집《윤리》는 전체적으로《자화상》의 분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시집《윤리》는 농촌에서 소재를 취한 것이 대부분인데, 그것은 현실에 대한 투쟁적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기 반성의 세계가 역력하게 나타난다. 시집《윤리》는 화자가 지향하는 따뜻한 미래의 공간이다. 시집《자화상》과《윤리》의 공간은 현실 고뇌의 연속이 아니라, 현실의 반성을 통한 미래의 따뜻한 서정적 공간이다. 이것은 자기 반성과 척박한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화자의 의식 세계를 드러내는 본질적 공간이기도 하다. 적어도 초기의《카프시인집》에서 보여주던 세계에 대한 부단한 대립 현상은 시집《윤리》에 이르면서 현실보다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기대와 전망 쪽으로 시화되고 있다.
이것이 개인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현실과 일정하게 타협하였다고 하더라도, 폭압적인 일제의 파시즘 체제에 의해 좌절된 화자의 처지를 읽을 수 있다. 이 좌절은 내일의 희망을 향한 그리움이었고, 미래의 세계에 대한 자기 확신이기도 했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권환의 문학 활동이 다시금 폭발적으로 확대된다는 점에서 권환의 좌절은 희망을 내포한 것이었다. 권환의 시는 초기에는 계급주의 관점의 혁명성을 드러냈고, 카프 해산 이후에는 시대적 현실에 대한 고뇌와 좌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래에 대한 환상적 기대와 전망의 공간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어둠의 시대를 극복하는 권환 시의 응집력이라 할 수 있다.
4. 권환 시의 성과 - 결론을 대신하여
권환은 평론과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 있어서 창작 의욕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시를 중심으로 현실에 대한 문학의 대응 구조를 살펴보았다. 권환은 주로 카프의 해산 이후에 시작 활동을 하였으며, 시집은 주로 일제의 말기 및 해방 시기에 나온다. 이러한 시대적 고뇌가 좌절과 절망으로 나타나며, 암담한 현실에 대한 자기 반성의 기회를 거치게 만들었다. 이것은 개인의 문학적 변모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가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남아서 병마와 싸운 사실에서도 한 개인의 온갖 갈등과 처절한 내면적 고투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 글은 주로 시집《자화상》과《윤리》,《동결》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시집《동결》은《자화상》과《윤리》에 나오는 시를 간추려 발표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중점적 관찰에서 배제되었다. 사실 권환의 작품 세계를 시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그래서 좀더 심도 있는 권환의 작품론은 전집 발간 이후 텍스트를 토대로 해서, 평론과 소설 등을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권환의 초기 시는 격렬한 혁명 의지를 드러내고 있으며, 카프 해산 이후에는 현실에 대한 고뇌와 좌절의 심정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현실에 대한 반성적 자세를 통해서 밝은 미래상과 그 전망을 제시하고 있었다. 권환의 시는 현실의 고뇌, 바로 그 중심에 서서 미래의 이상 세계를 따뜻한 서정 공간으로 감싸안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 다른 시인들의 작품과는 구별되는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카프의 현실 대응 전략과 관련하여 권환은 현실에 대한 미래 전망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이 점에서 권환은 남달리 눈여겨볼 만한 시인이다. 리얼리즘 문학에 있어서 이른바 '골육(骨肉)의 예술'을 그토록 강조하던 한 시인을 우리 민족 문학사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이 분의 시는 50여편 가지고 있습니다
어마 정말요 그럼 좀 올려 주시지요 우연히 만난 글인데 좋아서 올렸네요 고운 하루 보내세요
먼저 고맙습니다 넉넉히 읽을 시간이 부족해 복사부터 합니다 출퇴근길에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봐서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