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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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색 벤츠승용차 한 대가 북한강을 낀 363번 지방도로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길을 걸치고 대각선으로 세워진 벤츠는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으로 주차시킨 것 같지 않았다. 승용차의 지붕은 진작부터 내린 눈으로 이미 하얗게 덮였다.
부는 바람이 제법 드센데도 지붕을 덮은 눈이 좀처럼 흩날리지 않는 걸로 보아 차가 멈춰선지 꽤나 지난 것처럼 보였다. 은빛 화살의 로고에 묻은 눈은 얼음알갱이처럼 들러붙고 말았다. 창문마다 짙게 선팅이 되어 있어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고는 차안에 누가 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엔가 놀라 쫓겨 온 듯 잔뜩 겁먹은 얼굴의 두 여자가 서종면 제2파출소에 허겁지겁 뛰어 들어온 건 그로부터 1시간 쯤 전이었다.
파출소 문을 열어젖힌 두 여자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부터 터뜨렸다. 핏기를 잃어 낯빛이 창백했고, 겁에 질린 표정이 역력했다. 눈을 맞아 긴 머리가 축축하게 젖었고 메이크업이 지워지기는 했지만 한눈에도 두 여자 모두 상당한 미인들임을 알 수 있었다. 파출소 문의 맞은편에서 별 할 일 없이 자리를 지키던 김호성 경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달려 나가 두 여자를 부축했다. 김 경장은 두 미인을 거의 동시에 일으켜 소파에 앉히고는 후다닥 주전자에서 따뜻한 보리차 두 잔을 따라 한 잔씩 건넸다. 누런 플라스틱 잔이 지저분해 보였지만 여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재미딱지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야간근무시간이었다. 그럴 때 방문한 두 명의 미인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구급약상자를 꺼내오면서도 김 경장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두 미인을 번갈아 살폈다. 무스탕점퍼를 입은 생머리의 여자는 입술이 찢어져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두 여자의 신고를 받고 세 명의 경관이 그녀들을 태우고 출동했다. 룸미러에 비친 두 여자의 낯빛이 아직도 창백하다고 생각하며 김호성 경장은 핸들을 오른쪽으로 깊게 틀었다. 좁고 얼어붙은 길이지만 노면의 상태까지 가늠할 만큼 익숙한 길이다.
검정색 벤츠는 그녀들이 말한 현장에 그대로 삐딱하게 세워져 있었다. 마치 빙판길에 미끄러진 것처럼 보였다. 어지간히 큰 차라면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좁은 도로에 반 이상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양수리에서 청평방면으로 이어지는 한적한 길가에 최고급의 메르세데스 벤츠는 그렇게 버려진 차처럼 놓여 있었다.
먼저 내린 김호성 경장이 벤츠 주위의 이곳저곳에 랜턴을 비춘다. 차 상태는 깨끗했다. 차체에 충격이 가해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눈물을 흘려서 뺨에 얼룩이 진 흰색 파카차림의 여자는 방울이 달린 털모자를 눌러 쓰고 짙은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었다.
랜턴을 들고 반대편 조수석으로 걷는 김호성 경장의 뒤를 흰색파카의 여자가 바짝 붙어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선글라스가 작은 얼굴을 온통 가렸다고 생각한 최태훈 순경이 답답하게 느꼈는지 힐끔힐끔 그녀를 눈여겨본다. 두툼한 옷차림이었지만 금세라도 날아갈 것처럼 가냘픈 몸매임을 느낄 수 있었다. 랜턴불빛에 스친 그녀의 작은 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최 순경이 벤츠의 타이어를 툭 차고는 운전석 쪽으로 느릿하게 걸었다. 다시 차 내부로 랜턴을 들이댄 김 경장이 멈칫했다. 잔뜩 겁먹은 채 김 경장의 어깨 너머로 차 안을 들여다본 흰색파카가 까무러칠 듯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오히려 김 경장이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흰색파카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밤색무스탕을 입은 또 한 명의 여자도 흰 파카 못지않게 놀란 모습으로 입을 가렸다. 그래도 그녀는 흰 파카의 여자보다 일찌감치 냉정을 찾은 듯이 보였다. 밤색무스탕이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는 쓰러진 흰색파카를 부축한다.
차 내에서 고개를 돌린 김호성 경장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김 경장은 안절부절 엉켜진 두 여자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조수석으로 시선을 박았다. 조수석문을 열고는 운전석 쪽으로 기울여진 피투성이 중년사내의 손목을 짚었다. 그가 다시 몸을 빼내 최태훈 순경을 보고 고개를 가로 젓는다. 최 순경은 바로 무전기를 열고 소속파출소로 상황을 알렸다.
그때, 차체를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트렁크 안에서 나는 소리다. 김 경장은 트렁크를 쏘아보더니 허겁지겁 차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버튼을 눌러 트렁크를 열리게 했다. 칼바람에 웅크려진 몸이 더욱 수축되는 느낌이다.
김 경장에게는 그녀들이 나타났을 때처럼 흥미로움을 느낄 여유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트렁크에는 청색테이프로 입이 틀어 막히고 손목이 뒤로 묶인 또 다른 사내가 눕혀져 있었다. 역시 흙빛이 된 사내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트렁크에서 꺼내어진 사내의 어깨 부분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사내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떠는 바람에 단단하게 동여맨 테이프를 푸는 게 더뎌졌다. 간신히 테이프를 풀자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밤색무스탕의 여자가 사내에게 안기며 흐느낀다. 엉거주춤 일어난 흰색파카의 여자가 그때까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더니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낸다.
상황보고를 마친 최 순경은 얼굴이 드러난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입을 벌린 채 눈을 반짝거린 최 순경은 “현소영씨 아닙니까? 맞죠?”라며 반색을 하더니 김 경장을 향해 “김 경장님! 현소영씨입니다, 영화배우 현소영씨요.”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김 경장 역시 놀라기는 했지만 최 순경처럼 수선을 피우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눈짓을 보내 행동을 자제시켰다.
두 시간가량이 더 지나 새벽 1시쯤 되었을 때는 이미 주변에 많은 차들이 몰려있었다. 양평경찰서 소속 형사들이 벤츠의 주변과 내부를 샅샅이 채취하는 중이었다.
필터 가까이 타들어간 담배를 엄지와 검지로 말아 쥐고 빨간 불꽃이 보이도록 빨아대던 이규태 형사는 신경질적으로 꽁초를 뱉어냈다. 무언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벤츠주변을 서성이다가 차 내부로 고개를 들이밀어 남현태의 목덜미를 살핀다.
양평경찰서의 몇몇 형사들이 의아해 하면서도 그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행동으로 보아 어디 소속인지는 모르지만 형사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이규태 형사는 죽은 자의 목덜미와 가슴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직도 흥건한 핏물이 채 마르지 않은 걸로 보아 신고자의 말 그대로 신고 직전에 살해된 것 같았다. 찔린 부위는 목덜미와 가슴뿐이 아니었다. 하복부 옆구리부분에서도 선지 같은 핏덩이가 엉켜져 있다. 그러니까 범인은 약 네 시간 전에 예리한 흉기로 남현태 교수를 찔러 살해하고 도주해 버렸다.
건장한 체구의 두 사내가 박정민 사장에게 먼저 테러를 가한 뒤 트렁크에 처넣고는 남현태 교수를 해코지하려 들자 남 교수가 반항하며 몸싸움이 일어났다고 한다. 긴 생머리에 무스탕점퍼를 입은 여자, 오수연이라고 했던가. 그녀가 맨 먼저 출동한 서종 2파출소의 근무자한테 초도진술한 내용이다.
이규태 형사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뿌연 연기가 잽싸게 자취를 감춘다.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었지만 눈은 더 내릴 것 같지 않아 보인다.
- 니미럴, 비번인 날까지 불러내서 출동시키고 지랄이야.
이규태 형사가 구시렁거렸다. 이규태의 고향은 용문산자락에 위치한 양평의 용문면이다. 형님내외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자주 오기는 어렵지만 가끔 근무가 없는 날을 택해 들르고는 했다. 그러나 갈 때마다 어머니와 형한테 “장가 안 갈 거냐.”는 성화에 시달리다 돌아오기 일쑤다. 오늘도 그런 소리 외에는 달리 화젯거리가 없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김계현 팀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남현태 교수가 피살되었다면서 서울로 오는 길에 현장을 둘러보라는 것이었다. 남현태 교수의 주소지가 청담동이기도 했거니와 그와 강남 경찰서와의 관계상 사건을 이첩移牒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이유였다.
이규태는 간간이 호통을 쳐대며 수사를 지휘하는 양평경찰서의 형사계장 김현석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아반떼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었다. 더 길게 현장을 살필 필요는 없어보였다. 살펴본 바로는 강도사건임이 분명한데 놈들은 지문조차 남기지 않은 것 같다. 현장에는 범인들이 타고 온 자동차의 타이어흔적마저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즉시 도주하지 않았다. 증거로 남을만한 것들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유유자적 사건현장을 떴다. 용의주도한 놈들이다.
끼이익, 얼음판이나 다름없는 미끄러운 땅을 회전한 아반떼가 요란하게 출발하자 현장을 살피던 양평서의 형사들이 상을 찌푸렸다. 이규태가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좁은 도로를 빠져나갔다. 눈은 그쳤지만 길은 더욱 미끄러워 보였다. 나 죽기 전에 며느리는 볼 수 있는 거냐? 어머니의 잔소리는 갈수록 심했다. 전들 혼자 살고 싶겠어요. 그만 좀 하세요. 다른 때에 비해 더욱 유난스러운 어머니의 성화나 피해자들까지 만나보고 오라는 김 팀장의 지시나 오늘은 마냥 성가시기만 하다. 심한 거부감이 들자 운전까지 거칠어진다.
- 사람을 죽여 놓고 토막까지 내다니. 그런 놈은 인권이고 나발이고 권총을 꺼내 쏴죽이고 싶다니까.
변심한 애인을 죽이고 토막을 내서 유기한 사건 때문이다. 관할사건은 아니지만 어제 수원에서 발생한 사건의 개요를 듣고 이규태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형사답지 않게 묘한 징크스에 시달리고 있다. 어디에서건 토막살인 사건만 터졌다 하면 이규태는 생리 중인 히스테리처녀처럼 유별스럽게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
- 그런 놈들에 비하면 사람을 찌르고 도망친 놈들은 양반 축에 속하는 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