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사뮈엘 베케트 (Samuel Barclay Beckett, 1906~1989)가 쓴 희곡이다. 작가는 2차 대전 중 나치의 非 점령지에 은둔하여 본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1952년에 파리에서 첫 출간하고, 이듬해 바빌론 소극장에서 초연 하였다. 그리고, 1969년 본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나, 수상식 참가를 비롯해 일체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한다.
내가 이해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렇다.
(정신이 살짝 온전치 못한 狂人, 혹은 기차역 대합실의 浮浪者 같은) 두 주인공, ‘블라드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은 서로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도 모르지만, 시골길에서 그저 그렇게 만나서 대화를 한다. 1막과 2막에 걸쳐서. 그 대화에는 목적이 없다. 그저 말한다. 그 사이에 잠시의 pause 버튼이 있을 뿐 쉴 새 없이 얘기한다. 대화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만약 있다 해도 알기 어렵다. 그리고, 서로 울고, 웃는다, 감싸 안는다. 언쟁하고, 짜증낸다. 뭔가 더 이상 할 말이 없거나, 답답하고 떠나야 할 시간이라 생각되면 주위를 환기 시키듯 서로 되새김질 한다. 자신들은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그래서, 떠나지 못한다. 그 사이 ‘포조’와 ‘럭키’라는 인물들이 뜬금없이 등장한다. 포조는 마치 중세의 어리석은 성주 같은 태도를 보인다. 노예인 럭키를 동물처럼 대하고 명령한다. 럭키는 마치 아무 생각 없는 무뇌의 상징처럼 명령에 따르다가, 포조의 “생각해!”라는 명령에, 알 수 없는 말들을 거침없이 뱉어내기도 한다. 1막이 끝날 즈음 또한 뜬금없이 ‘소년’이 나타나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고도는 오늘 밤에 못 오고 내일 꼭 온다”라는 말을 전하고 떠난다. 2막도 별 다를 게 없다.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등장하여 다시 대화를 이어간다. 아니, 이어간다기 보다는 그저 지속한다. 그리고, 포조와 럭키도 다시 등장한다. 한 가지 변화라면 포조가 장님이 되었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었다. 왜냐고 설명은 없다. 어제처럼 날이 저물어 갈 때 다시 소년은 나타난다.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소년을 보고 직감적(?)으로 고도가 오늘 밤에도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다시금 대화한다. 그리고 떠나려 한다. 하지만, 떠나지 못하고 제자리다.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
작품에 대한 선입견 없이 자유롭게 읽기 위해 서평이나 해설을 보지 않고 먼저 글을 읽는다. 하지만, 본 작품을 읽기 시작해서 주인공들의 알 수 없는 대화에 둥둥 떠다니다 그저 그렇게 끝이 나 버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나, 별 나아진 것 없이 그저 그렇게 끝이 날 뿐이다. 주인공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고도>를 나도 함께 鶴首苦待 하다가 결국 보지 못하고 막이 내렸다. 황당하고 허무하다. 요즘 시쳇말로 완전 낚인(?) 기분이다. 뭔가 있겠지 하고 열심히 읽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 작품을 난해하다고 해야 할지, 해석을 못해내는 나의 지적 소양 부족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기가 짝이 없다. 작품 해설을 읽어 보아도 그닥 와 닿지가 않는다. 왜 이 작품이 그렇게 평가를 받는 것인지.
주인공들의 거대한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에 기초한 대화 속에 담겨진 철학적 묘미(?)와 <고도>와의 연관성 등을 내가 읽어 내지 못한 것인가??? 아니다. 그것보단, 내 생각엔, 솔직히, 버스나 지하철, 驛 대합실, 길거리에서 자주 봤던 부랑자들이 쏟아내는 욕구 불만의 의미 없는 자아의 표현들과 언쟁들, 아니면 자아도취에 빠진 인간들의 주절거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거란 생각! 더군다나, 작가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 <고도>에 대해 신이냐, 자유냐, 빵이냐 해설을 쏟아 내는 것 자체가 작가에게 낚인 것(?) 아닌가!! 그래서 작가도 뭐 딱히 할 말이 있을 리 없었을 게고, 그래서 인터뷰도 거절하고, 잠적한 게 아닌가 말이지. 그런데 이유야 어떻든, 이 작품이 노벨상도 받고 많은 나라에서 연극의 베스트셀러로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작품의 예술성을 억지로라도 인정해야 할 판인데. 그게 뭔가 도대체?? 어렵다. 나의 無知의 所致를 탓할 수 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의적으로 해석해 본다. 누구나 맘속엔 뭔지 모르지만 꼭 올 것이라고 믿는 자기만의 그 무언가, 즉 <고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나름 정의해 본다. ‘고도(희망)에 대한 기다림의 미학’. 그것이 내가 읽은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시지프스가 수 백번을 되풀이하며 무거운 돌 덩어리를 언덕 위로 끌어 올리고, 떨어지면 다시 끌어올려야 했던 것처럼. 부조리로 점철된 우리네 삶 속에서, 그래도 <고도>는 올 것이라고 믿으며, 수 백번, 수 천번, 수 만번을 저 마다의 돌 덩이를 짊어 지고 언덕 위를 오르고 있다, 우리는.
아! 한가지.. 이것은 희곡이다. 그래서 배우들이 직접 나와서 이 대사를 읽어 나가는 것을 직접 본다면 또 다른 느낌과 재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가 된다. 그래서, 한번 더 낚임을 당할 수 밖에… 공연장에서 <고도(희망)>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終)
출처: 책을 좋아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