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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묵 교수의 아주 특별한 도전
2006년 여름 이상묵 교수는 야외 지질연구를 위해 서울대 제자들과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사막지대를 달리다 부연 먼지 속에 사고를 당하여 목뼈 중간의 C4척추가 완전히 손상되었다. 당연히 목 아래 몸은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런 장애를 딛고 그는 2007년 1월에 다시 학교에 복귀하여 3월 학기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엄청난 장애를 6개월 만에 극복하고 교단에 복귀하기까지 엄청난 고난의 연속이었다. 단 0,1그램의 희망을 놓지 않고, 비록 휠체어 안의 인생이 되고 말았지만 그의 삶은 조금도 좁아지지 않았다. 버린 삶이 아니라 다시 찾은 삶. 우리는 그의 아주 특별한 도전에 새삼 경외감을 갖게 된다.
이상묵 교수는 전신마비 장애인이다. 목 아래를 전혀 쓸 수 없어,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 한다.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교수인 그는 휠체어를 탄 채 매일 학생들을 가르치고 관련 분야를 연구한다. 그의 손을 대신해 주는 건 입에 무는 마우스다. 한 번 빨면 클릭, 두 번 빨면 더블클릭, 불면 오른쪽 클릭이다. 그런 식으로 그는 세상과 만나고 일을 한다.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 좌절하고 무너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이 교수는 촉망받는 학자였다.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을 졸업하고 MIT-우즈홀 공동박사학위 과정 입학해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우즈홀과 영국 더램대학교의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에는 1998년 들어왔다. 한국해양연구원 선임 및 책임연구원을 지냈고, 첨단 해양탐사선 온누리호의 수석과학자를 역임했다. 2003년에는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로 임용됐다. 그러던 중 비극이 찾아왔다. 2006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공동으로 진행한 미국 야외지질조사 프로젝트. 거기서 그는 조사과정에서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7월 3일이었다.
그는 절망했다. "왜 여기까지 오게 해 놓고 갑자기 무대에서 끌어내리느냐"며 원망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생의 끊을 놓지 않았다. 지난 44년 간 자신이 해를 끼쳤던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반성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했다. 겨우 6개월 만에 그는 복귀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 교수는 현재 장애에 굴하지 않고 과학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장애인의 재활과 독립을 돕는 여러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렇다고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나, 살아 있는 신화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이 교수는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69년 해외근무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와 한강중학교와 성남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진학한 뒤, 어릴 적부터 꿈꾸어 온 해양학자가 되기 위해 해양지질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86년 국비유학생 시험을 통과하는 동시에 MIT 입학 허가를 받았다. 이듬해에 미국으로 건너가 MIT-우즈홀 공동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우즈홀의 연구원과 영국 더램 대학교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세계적인 학자들과 함께 연구 및 탐사 활동을 펼쳤다. 1998년 국내 연구기관장의 강력한 권유로 당시 전 지구적 대양연구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들어와 한국해양연구원 선임 및 책임연구원을 지내면서 한국 해양학의 지평을 넓히기 시작했다. 첨단 해양탐사선 온누리호의 수석과학자로서 대양연구를 진두지휘하며 많은 연구 업적을 쌓았고, 과학 외교에도 앞장섰다. 1년에 평균 3개월 이상을 바다에서 지내며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극해 등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2003년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로 임용되어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학문에 대한 열정과 도전의식을 심어 주는 것이 가장 큰 가르침이라는 생각으로 교육에 힘썼다. 2006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텍)과 공동으로 진행한 미국 야외지질조사 프로젝트 역시 학생들에게 과학자의 자세를 가르치기 위해 그가 추진한 사업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이 연구조사 과정에서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비록 전동휠체어에 갇혔지만 자신의 세계가 조금도 좁아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는 현재 교수로서, 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장애인의 재활과 독립을 돕는 여러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상묵 교수는 다치고 난 뒤 알았다. 건강하게 5대양을 항해하며 연구했던 삶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이젠 ‘리사이클’ 되어 덤으로 사는 제2막 인생이라고 한다. 이상묵 교수는 장애인이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단지 그 전에는 학자로서, 과학자로서 삶을 살았다면 앞으로는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는 삶이 하나 더 추가됐을 뿐이다.
그의 삶은 이 순간, 조용하면서도 쉼 없이, 희망을 향해 계속된다.
"목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오대양을 누비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쳤던 나의 삶은 전동 휠체어 안에 갇히고 말았지만 늘 그래왔듯, 이 역시 나는 새로운 도전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이겨낼 것이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뇌를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연구도 계속할 수 있고, 강단에도 다시 섰으니까요”
연구할 수 있는 뇌와 심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상묵 교수! 좌절과 포기를 모르는 그에게서 발견한 진정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강인식 기자가 이상묵 교수 육필로 쓴 그의 책 ‘0.1그림의 희망’ 에필로그를 인용해 본다.
그는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아주 큰 행운으로 여긴다. 횡경막의 움직임만을 조율할 수 있는 이상묵 교수는 정상인에 비하여 폐활량이 이주 적다. 하지만 그는 하늘이 자신의 신체 기능을 대부분 뺏어갔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남겨놓았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그것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사고자체는 불행했지만 그 이후에 일어안 일들을 보면 너무나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자주 생각한다. 44년간 정상인으로 살아왔으니 나머지 인생을 좀 다르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란다. 제2의 인생을 선물 받은 그는 앞으로 얼마를 더 살 수 있는지를 보고 계획을 세우는 것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농담으로 그는 만약 자신이 일 년밖에 못 산다면 가족과 부둥켜안고 남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한다. 만약 오 년밖에 살 수 없다면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어 국가에서 지원하는 아홉 명의 건장한 보좌관들을 거느리고 다니겠다고 한다. 하지만 십 년 이상을 산다면 학자로서의 꿈을 저버릴 수가 없다고 한다.
휠체어 위의 과학자, 이상묵 교수, 그는 장애를 가진 뒤 자신의 세계가 오히려 더 넓어졌다고 말한다. 오대양을 누비며 지구의 비밀을 캐고자 했던 어릴 적 그의 꿈. 제2의 인생을 맞은 지금, 그의 아주 특별한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2014.7.1.)
세상을 바꾸는시간 15분, 이상묵 교수 강연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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