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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영천군(榮川郡)
樂民 장달수
경상도(慶尙道) 영천군(榮川郡)
동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7리, 예안현(禮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51리, 남으로 안동부 경계에 이르기까지 41리, 서로 풍기군(豐基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북으로 풍기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3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내이군(奈已郡)이다 내(奈)는 날(捺)로 된 것도 있다. 신라(新羅) 파사왕(婆娑王)이 취했고, 경덕왕(景德王)이 내령군(奈靈郡)이라 고쳤다.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강주단련사(剛州團練使)라 고쳤고, 현종(顯宗)은 길주(吉州)에 귀속시켰더니, 인종(仁宗)이 순안현령(順安縣令)이라 고치고, 고종(高宗)이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이 살고 있는 시골이라 하여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다.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세조(世祖) 3년에 순흥(順興)을 없애버리고, 마아령(馬兒嶺) 아래 물 동편 땅인 부석(浮石)ㆍ무짐이[水息]ㆍ관천(串川)ㆍ파문단(破文丹) 4리(里)를 끊어서 이 군에다 귀속시켰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내이(奈已)ㆍ내령(奈靈)ㆍ강주(剛州)ㆍ순안(順安)ㆍ영주(榮州)ㆍ귀성(龜城)
【성씨】 본군 민(閔)ㆍ우(禹)ㆍ애(艾)ㆍ팽(彭)ㆍ동(董), 고(高) 내성(來姓)이다. 연(延) 촌성(村姓)이다. 정(鄭) 봉화(奉化) 김(金) 영월(寧越) 전(全) 정선(旌善).
【풍속】 풍속은 검소하고 진솔함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 인물은 번성하고 많았다 문헌(文獻)의 제민루기(濟民樓記).
【산천】 철탄산(鐵呑山) 군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귀산(龜山) 군의 서남 1리에 있으며, 군의 옛 이름 귀성(龜城)이 이에 말미암았다. 학가산(鶴駕山) 군 남쪽 40리에 있다. 봉황산(鳳凰山) 군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순흥에 속하였다가 이제 이 군에 귀속되었다. 마아령(馬兒嶺) 군 북쪽 36리에 있는데, 길이 심히 험하였으며, 충청도 영춘현(永春縣)으로 가는 길이다. 관적령(串赤嶺) 군 북쪽 33리에 있다. 방하수(防河藪) 군 서쪽 2리에 있다. 덕산수(德山藪) 군 남쪽 3리에 있다. ○ 이 고을은 본래 수재를 근심하였는데, 하륜(河崙)이 군수가 되었을 때, 흙을 쌓고 나무를 심어 이 두 수(藪)를 만들었다. 그 뒤에 백성들이 그 이익을 힘입었다. 임천(臨川) 군 서쪽 3리에 있다. 풍기군의 남북쪽 냇물과 옛 순흥(順興) 동쪽 냇물의 하류로, 귀산 밑을 지나 남으로 흘러서 사천(沙川)에 이르러 합하여 예천군(禮泉郡)의 사천(沙川)이 되었다. 사천(沙川) 군의 동쪽 15리에 있으며, 봉화현(奉化縣) 물야계(勿也溪) 하류이다.『신증』 봉산(烽山) 군 동쪽 15리에있다. 연화산(蓮花山) 군 남쪽 15리에 있으며, 백병산(白屛山) 군 북쪽 50리에 있다. 풍락산(豐樂山) 군 동쪽 56리에 있다. 담보산(韂甫山) 군 북쪽 5리에 있다. 백령(白嶺) 군 남쪽 15리에 있다. 병령(竝嶺) 군 동쪽 20리에 있다. 장암천(藏巖川) 군의 남쪽 12리에 있다. 초수정(椒水井) 군 북쪽 42리에 있다.
【토산】 종이[紙]ㆍ잣[海松子]ㆍ인삼(人蔘)ㆍ송이[松蕈]ㆍ꿀[蜂蜜]ㆍ옻[漆]ㆍ은어[銀口魚]ㆍ지황(地黃)ㆍ복령(茯苓)ㆍ왕골[莞草]ㆍ석이버섯[石蕈].
【성곽】 귀산성(龜山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2백 81척이요, 높이가 9척이며, 그 안에는 우물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성내산(城內山) 봉수 군 북쪽 14리에 있다. 동으로는 안동부(安東府) 내성현(奈城縣) 당북산(堂北山) 봉수에 응하고, 서로는 풍기군(豐基郡) 망전산(望前山) 봉수에 응한다.
【누정】 자민루(字民樓)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선덕(宣德) 정미년에 군수 권상(權詳)이 세웠다. 제민루(濟民樓) 귀산(龜山) 남쪽에 있다. 선덕 계축년에 군수 반저(潘渚)가 세웠으니, 곧 의학루(醫學樓)이다. 교수관(敎授官) 문헌(文獻)이 기(記)를 지었다. 소루(小樓) 객사 남쪽에 있다. 천순(天順) 년간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세웠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記)에, “죽령(竹嶺) 남쪽에 자리잡은 고을 중에 영천이 제이(第二)가 된다. 그 산천은 밝고 빼어났으며, 그 고을 터는 상쾌하고, 그 백성의 풍속은 검소하고 순박하였다. 이 고을에 원으로[製錦] 오는 이가 가끔 군자(君子)가 많았으나 그 중 남의 이목에 표표히 뛰어난 이는 하호정(河浩亭)ㆍ정습인(鄭習仁)ㆍ최원부(崔元傅) 세 사람뿐이었는데, 지금의 수령 오천(烏川) 정 선생(鄭先生)도 역시 그들과 같이 칠 수 있는 이었다. 그는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대부(臺府)를 사직하고 이 고을을 맡았다. 무릇 그의 시설한 것은 마치 현보(縣譜)를 가진 듯하거니와, 공경으로써 윗사람을 받들고 따사로움으로써 백성을 사랑하고, 정직함으로써 간사한 자를 다스리었다. 넉넉한 자질로 다스리기 쉬운 백성을 교화하니, 비유하건대, 소백정[庖丁]이 날선 칼날로 소뼈 사이를 쳐서 소를 잘 잡듯 하였으니, 어찌 어긋날 걱정이 있겠는가. 1년이 되지 않아 경치가 잘 되고 백성이 화락하였다. 한가한 날 자민루(字民樓)에 올라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 고을은 사신ㆍ빈객이 죽령을 넘어 왕래하는 요충이다. 사신이 있으면 반드시 빈좌(賓佐)가 있다. 매양 뜨거운 여름을 당하면 집이 찌는 듯 답답하여, 마음을 맑은 바람에 씻어 번민함을 버리려고 생각할 적에, 사신은 이 누(樓)가 있지만 빈좌들은 어디에 거처할 것인가. 이것이 어찌 하나의 결함이 아니겠는가.’ 하고 드디어 사방을 둘러보다가 동남쪽 구석에서 쓸모없는 집 한 채를 얻었으므로 이에 이를 개척하여 새롭게 하되, 그 기둥을 약간 높이고 곁에는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아래에는 땅을 파서 못을 만들어 두어 말[斗]의 고기를 넣고, 못 안에 있는 섬에는 참대[苦竹] 여덟 아홉 그루를 심고 잡꽃을 그 사이에 간간히 심었더니, 난초는 그 기슭을 덮고 부용은 그 물결을 가렸다. 벽을 바를 적에 내가 가서 올라보니, 소나무는 죽죽 벌였고 울타리는 한가했으며, 푸른 이랑 누런 두렁은 수를 놓은 듯 엇갈리어 준조(尊俎)에 빛났다. 뽕나무밭을 매는 자와 농사짓는 이들이 그늘에서 쉬지는 못하지만 소장(訴狀)을 가진 이는 장애될 근심 없어, 산업을 권면하고 농사를 처리하는 정치에 도움됨이 적지 않았다. 이에 잔을 들어 주인에게 축하하며 말하기를, ‘세상의 수령(守令) 가운데, 게으른 이는 남을 의지할 뿐 스스로 진작하지 못하니, 비록 관청이 퇴락해도 받치고 붙들어 그냥 세월만 보낼 뿐 손 하나 감히 놀리지 못하오. 그리고 강한 이는 그 지혜를 뽐내어 백성의 힘을 가벼이 동원하매 번거롭게 명령을 내리면서 영선(營繕)이 그치지 않으니, 많은 백성들이 매맞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오. 선생이 한 것은 이들과 같지 않으니, 여력(餘力)에서 나온 것이며, 옛것을 새로이 한 것이며, 어두운 것을 밝게 한 것으로 터럭만치도 백성을 수고시키지 않았고 재물을 소비하지 않았소. 그래서 비록 군청에 있으면서도 이 역사가 있은 줄 몰랐고, 지나가는 길손이 비와 이슬을 피할 수 있으며, 쉴 자리를 염려하지 않게 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어진 사람의 행동이라 이르는 것이요. 아, 선생의 뒤를 이어 일을 하는 이가 선생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현명한 수령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했다. ○ 옛 사람의 시(詩)에, “반마(班馬)로 오르니 억지로 스스로 넓히며, 잔춘(殘春)의 마음은 바로 근심의 실마릴세. 울 밑에서 잔을 드니 붉은꽃 싫도록 보고, 처마 아래에 발을 거니 푸른 산 받아들이네. 기다란 휘파람은 능히 원별(遠別)을 위로하고, 흩어진 놀이는 잠시 환관(環觀)을 다하네. 오천(烏川)의 풍경은 모두 시의 재료, 읊으면서 한가로움을 얻게 해주네.” 하였다.『신증』 쌍청당(雙淸堂)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으니, 군수 김세훈(金世勳)이 지었으며, 좌우에 쌍으로 연못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군의 동쪽 1리에 있으니 하륜(河崙)이 지주(知州)로 있을 때 세웠다.
【역원】 창보역(昌保驛) 군 서쪽 9리에 있다. 평은역(平恩驛) 군 동쪽 26리에 있다. 효대원(孝大院) 군 동쪽 7리에 있다. 문수원(文殊院) 군 남쪽 11리에 있다. 금림원(金林院) 군 동쪽 36리에 있다. 승리원(乘利院) 군 서쪽 10리에 있다. 가이원(加耳院) 군 북쪽 20리에 있다. 장금원(長金院) 군 서쪽 23리에 있다. 덕산원(德山院) 군 남쪽 3리에 있다. 철겸원(鐵鉗院) 군 서쪽 3리에 있다.
【불우】 행의사(行衣寺) 군 서쪽 20리에 있다. 흑석사(黑石寺) 군 남쪽 15리에 있다. 응석사(凝石寺)ㆍ정불사(淨佛寺)ㆍ부석사(浮石寺) 모두 봉황산(鳳凰山)에 있다. ○ 궁예(弓裔)가 일찍이 이 절에 이르러 벽화(壁畫)에 그려진 신라왕의 상(像)을 보고 칼을 뽑아 쳤는데, 고려(高麗) 때에 와서도 그 흔적이 그냥 있었다. 이것은 생시에 버림을 당했던 것을 원망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 《보한재집(補閑齋集)》에 “고려 사천감(司天監) 이인보(李寅甫)는 경주도(慶州道) 제고사(祭告使)로서 산천(山川)을 돌며 제사지냈는데, 일이 끝나 장차 돌아가려던 저녁에 부석사(浮石寺)에 닿았다. 객우(客宇)가 조용하고 좌우에 사람이 없었는데, 홀연히 한 여인이 언뜻 마루 사이로 보이더니 좀 뒤에 춤추듯 마당을 돌아와서 절을 했다. 절을 마친 뒤에 섬돌을 올라 방에 들어와 앉았다. 사천감은 비록 괴이하게 생각했지만 자색(姿色)이 뛰어났으므로 차마 거절치 못했다. 여인이 말하기를, ‘제가 사는 곳은 여기서 멀지 않아요. 높으신 뜻을 혼자 사모해서 왔습니다.’ 하고, 그 응대(應對)함이 총민하였다. 사흘 묵고 떠나서 우정(郵亭)에 숙박했는데, 여인이 하느적하느적 따라왔다. 사천감이 말하기를, ‘왜 또 왔소.’ 하였더니, 여인이 말하기를, ‘뱃속에 당신의 애기가 있어요. 다시 하나를 더하고자 해서 온 것이어요.’ 하였다. 새벽이 되자 작별을 고하고 흥주(興州)로 들어갔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여인이 또 왔다. 사천감은 후환이 될까 해서, 여인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상대하지 않았더니 여인은 발끈 골을 내면서 방문을 나가는데, 회오리 바람이 땅을 말아올려 집의 문짝 하나를 부서뜨리고 나뭇가지를 꺾어놓고는 갔다.” 하였다. 『신증』 당 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 의봉(義鳳) 1년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스님 의상(義相)에게 하명하여 이 절을 창건하고 부석(浮石)이라 이름지었다. 동쪽에는 선묘정(善妙井)이, 서쪽에는 식사룡정(食沙龍井)이 있는데, 가물 때 기도드리면 감응이 있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새 울고 꽃 져서 꽃다운 나이 이우는데, 나그네 길 시간은 빨리도 가네. 어느 날 마셔보리, 용정(龍井) 물 차맛을, 마루에 가득한 솔과 달 인연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 북쪽 7리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선곡현(善谷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고구려의 가곡현(賈谷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치고 내령군(奈靈郡)에 귀속시켰다.” 하였다.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무신탑(無信塔) 군(郡)에 무신(無信)이란 탑이 있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습인(鄭習仁)이 지군(知郡)으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이상하도다. 악목(惡木)에서는 쉬지 않고 도천(盜泉)은 마시지 않는다 하니, 이는 그 이름이 나쁘기 때문이다. 탑은 고을에서 쳐다볼 수 있게 우뚝 서 있는 것인데, 어찌 무신(無信)을 표방한단 말인가” 하고서, 쪼아 없애게 하고는 그 벽돌로 빈관(賓館)을 지었다. 신돈(辛旽)이 이를 듣고 노해서 계림옥(鷄林獄)에 구속하고 다시 전법(典法)으로 얽어 사지(死地)에 처치하려고 했다. 정신(廷臣)들이 가련히 여겨 이를 구원해 주었으나 서인(庶人)으로 폐했다. 시사기(市肆基) 신라 임금이 이곳에 오랫동안 주필(駐蹕)하다가 돌아갔다. 시사(市肆)의 터는 지금 군 서쪽 2리에 있다. 날이군(捺已郡)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이 군에 행행(行幸)했다. 고을 사람 파로(波路)에게 벽화(碧花)란 16세 된 딸이 있었는데, 예쁘고도 고왔다. 그 아비가 이를 잘 꾸며서 가마에 태우고 빛깔 고운 비단으로 휘장을 두르고서 임금께 바쳤다. 임금이 찬물(饌物)이라고 여기고 열어보니 미녀였다. 그 뒤로는 여러 번 그 집으로 미행(微行)했다. 중도에 고타군(古陁郡)이 있는데, 하루는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묻기를, “나랏사람들은 임금을 어떻다고 하오.” 하니 노파가 말하기를, “모두들 성인(聖人)이라고들 하지만, 저만은 이 말을 의심스럽게 여깁니다. 듣건대, 임금께서 날이(捺已)의 계집에게 가노라고 누차 미복(微服)으로 다닌다고 합니다. 무릇 용(龍)이 고기의 옷을 입고 있으면 어부에게 제어당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임금께서는 만승(萬乘)의 존엄으로써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를 성인(聖人)이라 한다면 성인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러이 여기고, 남몰래 그 계집을 데려다 궁중에 숨겨 두었다. 벌지부곡(伐只部曲) 군 동쪽 15리에 있다. 마구부곡(馬駒部曲) 군 북쪽 60리에 있다. 용산부곡(龍山部曲) 군 서쪽 20리에 있다. 임지도부곡(林只刀部曲) 군 동쪽 15리에 있다. 성을량부곡(省乙良部曲) 군 동쪽 15리에 있다. 오등부곡(烏等部曲) 군 북쪽 30리에 있다. 유수부곡(楡水部曲) 군 북쪽 30리에 있다. 답곡부곡(沓谷部曲) 군 북쪽 30리에 있다. 이곡부곡(泥谷部曲)ㆍ내소리부곡(奈小里部曲) 정종소(鄭從韶)가 수령으로 있을 때, 군지(郡誌)를 지으면서, “이곡(泥谷)은 바로 지금의 며전리(㫆田里)이니 군 서쪽 25리에 있고, 내소리(奈小里)는 바로 지금의 사내리(沙奈里)이니 군 동쪽 1리에 있다.” 하였다. 그러나 두 부곡(部曲)은 예와 이제의 명칭이 같지 않으니 어디서 고증하여 이런 말을 하였는지 모르겠다.『신증』 장군곡(藏軍谷) 군 동쪽 8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나라를 통합할 때 오천(吾川) 사람들이 불복하므로 이곳에 병사를 숨겨두었다가 이를 격파했다.” 한다.
【명환】 고려 정습인(鄭習仁) 공민왕(恭愍王) 때, 전교령(典校令)으로 지주(知州)로 나갔다. 시무(視務)하려 할 제, 아전이 고사(故事)에 따라 소재도(消災圖)를 찾아가 향을 사를 것을 청하였다. 습인이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불륜(不倫)한 일을 하지 않거늘 재앙이 어떻게 생긴단 말인가. 무망(無妄)하기보다는 순수(順受)할 뿐이다.” 하고서 아전에게 명하여 철거시켰다.본조 하륜(河崙) 지주(知州)였다.
【인물】 본조 김증(金曾) 과거에 두 번 급제했다. 벼슬은 금산 군수(金山郡守)에 이르렀다. 김담(金淡) 증의 아우이다. 두 번 급제했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다.
【효자】 고려 문재도(文載道) 홍무(洪武) 임술년(壬戌年) 봄에 왜적(倭賊) 수천 명이 본군(本郡)에 침략해 와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 재도는 그 아버지를 업고 산골에 들어가 숨었는데, 왜적이 찾아와 그 아버지를 쏘아 맞혔다. 재도가 살촉을 뽑고 칼을 휘둘러 왜적을 베었더니 왜적들이 굴복했으므로 부자가 목숨을 온전히 했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벼슬은 평해군사(平海郡事)에 이르렀다.본조 김이음(金爾音)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은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일찍이 어버이를 위해 3년간 여묘(廬墓)했으므로, 태조(太祖) 때 정려하였다. 우제(禹濟) 벼슬은 감정(監正)에 이르렀다. 효자(孝子)로써 정려하였다.『신증』 안수철(安壽鐵) 그 아버지가 광질(狂疾)에 걸렸으므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에 섞어 먹였더니 병이 나았다.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하었다.
【제영】 휴가초초과귀성(携家草草過龜城)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가족을 데리고 허둥지둥 귀성을 넘는데, 나그넷길이라 아무도 성명을 모르노라. 신세가 기구하여 살쩍머리 셋거늘, 내일 아침에는 또한 영마루를 넘어 갈까나.” 하였다. 일수영회포고성(一水縈廻抱古城) 김효정(金孝貞)의 시에, “한 줄기 물은 휘돌아 옛 성을 안아 흐르나니, 산의 형세는 곧 바로 거북의 이름 얻었다.” 하였다. 계분연미음변인(溪分燕尾吟邊咽) 윤자영(尹子濚)의 시에, “시내는 제비꼬리처럼 갈려 읊음 속에 흐느끼고, 산은 까치 머리되어 그림 가운데 모여든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산이(山伊) 동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봉향(奉香)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망궐(望闕) 끝은 10리이다. 사흥(司興) 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두전(豆田)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권선(權先) 위와 같다. 호문(好文)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신혈(辰穴) 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적포(赤布)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어화(於火)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천상(川上) 동남쪽으로 처음은 27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말산(末山)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임지(林只) 동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60리인데, 봉화(奉化) 남쪽 경계와 안동 재산면(才山面) 서쪽 경계를 넘어 있다. 북면(北面)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인데, 소천촌(韶川村)은 순흥(順興) 이부석면(二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으며, 답곡촌(沓谷村)은 동부(同府) 일부석면(一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고, 교각촌(校各村)은 동부 동원면(東元面)의 경계를 넘어 있다. 우측 두 촌의 북쪽은 영춘(永春)과 접해 있다. 오록(梧鹿) 동북쪽으로 50리이며, 순흥(順興) 삼부석면(三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고, 북쪽은 영춘과 접해 있다. ○ 벌지부곡(伐只部曲)은 동쪽으로 15리이며, 용산부곡(龍山部曲)은 서쪽으로 20리이고, 마륜부곡(馬輪部曲)은 북쪽으로 60리이다. 임지력부곡(林只力部曲)은 즉 임지면이며, 성을량부곡(省乙良部曲)은 동쪽으로 15리이다. 오등부곡(烏等部曲)ㆍ유수부곡(楡水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이다. 답곡부곡(沓谷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인데, 즉 답곡이며 이곡부곡(泥谷部曲)은 지금의 미전리(彌田里)이고 서쪽으로 25리이다. 내소리부곡(奈小里部曲)은 지금의 사내리(沙奈里)이며, 동쪽으로 1리이다.
【봉수】 창팔래산(昌八來山) 동쪽으로 30리이다.
【방면】 읍창(邑倉)ㆍ동창(東倉) 동쪽으로 30리이다. 북창(北倉) 오록면(梧鹿面)에 있다.
【토산】 닥종이[楮].
【누정】 영훈정(迎薰亭) 남쪽으로 3리이다.
【사원】 이산서원(伊山書院) 선조(宣祖) 계유년에 건립하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文廟) 조에 있다.
榮川郡
東至安東府界二十七里,至禮安縣界五十一里。南至安東府界四十一里。西至豐基郡界十二里。北至同郡界十四里。距京都四百三十三里。
建置沿革
本高句麗奈巳郡。奈,一作“捺”。新羅婆娑王取之,景德王改奈靈郡。高麗成宗改剛州團練使,顯宗屬吉州,仁宗改順安縣令。高宗以衛社功臣金仁俊之鄕,陞知榮州事。本朝
太宗十三年,例改今名。世祖三年,省順興,以馬兒嶺下水東之地浮石、水息、串川、破文丹四里,割屬于郡。
官員 郡守,訓導。各一人。
郡名
奈己,奈靈,剛州,順安,榮州,龜城。
姓氏
本郡 閔,禹,艾,彭,董。高。來。延。村。鄭。奉化。金。寧越。全。旌善。
風俗
俗尙儉率。觀風案。
人物富庶。文獻《濟民樓記》。
山川
鐵呑山。在郡北一里。鎭山。
龜山。在郡西南一里。郡之舊號龜城,以此。
鶴駕山。在郡南四十里。
鳳凰山。在郡北二十里。舊爲順興之地,今屬于郡。
馬兒嶺。在郡北三十六里。道甚險阻,指忠淸道永春縣之路。
串赤嶺。在郡北三十三里。
防河藪,在郡西二里。德山藪。在郡南三里。○郡素患水災,河崙知郡時,築土植木,成此二藪。自是民賴其利。
臨川。在郡西三里。豐基郡南、北川及古順興東川之下流。過龜山下南流,合于沙川,爲醴泉郡沙川。
沙川。在郡東十五里。奉化縣勿也溪下流。
〔新增〕 烽山。在郡東十五里。
蓮花山。在郡南十五里。
白屛山。在郡
北五十里。
豐樂山。在郡東五十六里。
韂甫山。在郡北五里。
白嶺。在郡南十五里。
竝嶺。在郡東二十里。
藏巖川。在郡南十二里。
椒水井。在郡北四十二里。
土産
紙,海松子,人參,松蕈,蜂蜜,漆,銀口魚,地黃,茯苓,莞草,石蕈。
城郭
龜山城。石築。周一千二百八十一尺,高九尺。內有井,又有軍倉。
烽燧
城內山烽燧。在郡北十四里。東應安東府奈城縣堂北山,西應豐基郡
望前山。
樓亭
字民樓。在客館北。宣德丁未,知郡權詳建。
濟民樓。在龜山南。宣德癸丑,知郡潘渚建,乃醫學樓也。敎授官文獻爲記。
小樓。在客館南。天順中,郡守鄭從韶建。〔新增〕 金宗直記:“邑于竹嶺之陽,榮爲第二。其山川明秀,其邑居爽塏,其民俗儉易。往往製錦于是者,類多君子人,而其表表在人耳目,惟河浩亭曁鄭公習仁、崔公元傅三人而已。今守烏川鄭先生,亦其齊驅者也,以親故辭臺府,出爲是郡。凡所施設,似若有縣譜,諄諄以奉上,煦煦以愛民,侃侃以嫉邪。用有裕之資,化易治之民,比如庖丁之以無厚入有間,夫焉有扞格之患哉!不期年而政通人和。暇日登字民樓,喟然曰:‘郡爲使華、賓客踰嶺往來之衝,有使華,必有賓佐。每當畏景,窓櫳蒸鬱,思欲濯淸風而去瞀忞。使華則是
樓在焉,賓佐何居?斯無奈一欠乎?’ 遂環視觀宇,於東南隅得宂舍一區,乃拓而新之,稍崇其柱,傍繞以檻。其下闕隙地爲池,種魚數斗,池中有島,植以苦竹八九科,間以雜花,蘭芷被其岸,芙蓉冒其波。方塗墍之,始予過而登焉,蒼松伍伍,籬落閑閑,綠疇黃壟,如繡相錯,映帶尊俎。以至桑耘者不得休于蔭,牒訴者無患阻于障,有助於勸督剖決之政,爲不少。於是執爵而慶於主人曰:‘世之守令,懶者爲人所持,不克自振,雖官府頹頓,撑扶以了歲月,而莫敢一搖手;强者矜其智巧,輕用民力,諉以承稟,營繕不休,至使千室如被搒撻。先生之爲則不然,出於餘力,卽舊而新,因闇而廓,一毫不以勞於民、費於帑,雖在郡朝,亦不自知有是役也。而過客得避溽濕,無憂於救暍,玆其所謂仁人之擧也哉。噫!踵先生而至有所作爲者,動以先生爲法,則庶乎爲賢守令矣。’” ○前人詩:“班馬登臨强自寬,殘春心緖卽憂端。墻頭把酒看紅膩,簷角鉤簾
納碧巑。長嘯可堪勞遠別,浪遊聊欲盡瑰觀。烏川物色供詩料,贏得吟哦賭一閑。”
〔新增〕 雙淸堂。在客館東。郡守金世勳構。左右有雙蓮池。
學校
鄕校。在郡東一里。河崙知州時建。
驛院
昌保驛。在郡西九里。
平恩驛。在郡東二十六里。
孝大院。在郡東十七里。
文殊院。在郡南十一里。
金林院。在郡東三十六里。
乘利院。在郡西十里。
加耳院。在郡北二十里。
長金院。在郡西二十三里。
德山院。在郡南三里。
鐵鉗院。在郡西三里。
佛宇
行衣寺。在郡西二十里。
黑石寺。在郡南十五里。
凝石寺,
淨佛寺,浮石寺。俱在鳳凰山。○弓裔嘗至此寺,見壁畫新羅王像,拔劍擊之,至高麗時,其刃跡猶在。蓋怨生時見棄也。○《補閑齋集》:“高麗司天監李寅甫以慶州道祭告使,歷祀山川,旣畢將還,暮抵浮石寺。客宇蕭然無左右,忽有女乍見廊廡間,少選蹁躚來庭下拜之。拜訖,升自階往就室居焉。監雖怪之,以姿色絶代,不忍拒也。女曰:‘妾所居,去此不遠。竊慕高義以來。’ 其應對惠利。爲留三日而出,止郵亭宿焉,女苒苒來。監曰:‘何復來爲?’ 女曰:‘腹有君之息一矣。乞復添一,所以至耳。’ 比曉告別,行入興州。將宿,女復來,監恐爲後患,遂面之而不省。女怫然作色,卽出戶,回風卷地,擊毁廳事間一扉,截樹杪而去。” 〔新增〕 唐高宗儀鳳元年,新羅文武王命僧義相刱是寺,名曰浮石。東有善妙井,西有食沙龍井,旱則禱雨,有應。○朴孝修詩:“鳥啼花落減芳年,客路光陰去忽然。何日試茶龍井水?滿軒松月共夤緣。”
祠廟
社稷壇。在郡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郡北七里。
厲壇。在郡北。
古跡
善谷縣。金富軾云:“本高句麗買谷縣。新羅景德王改名,屬奈靈郡。今未詳。”
無信塔。郡有塔,名曰無信。恭愍朝,鄭習仁爲知郡,曰:“異哉!惡木不息,盜泉不飮,惡其名也。烏有巍然其形,爲一邑所瞻視,而以無信表之者?” 命刻日夷之,用其甎修賓館。辛旽聞而怒,繫鷄林獄,移繫典法,欲置死地。廷臣憐之,營救得免,廢爲庶人。
市肆基。新羅王駐蹕于玆,久而乃返。市肆之基,在今郡西二里。
捺已郡。新羅炤智王幸此郡,郡人波路有女碧花,年十六,美而艶。其父盛飾之,置輿中,羃以色綃獻之。王以爲饌物,開視卽美女也。其後屢微行至其第。幸之路經古陀郡,宿於一老
嫗家,問曰:“國人以王爲何如?” 主嫗曰:“衆以爲聖人,妾獨疑之。竊聞王幸捺已女,屢微服而來。夫龍變魚服,爲漁者所制。今王以萬乘之尊,不自愼重,此以爲聖,孰非聖乎?” 王聞之大慙,潛逆其女,置於宮中。
伐只部曲。在郡東十五里。
馬駒部曲。在郡北六十里。
龍山部曲。在郡西二十里。
林只刀部曲。在郡東十五里。
省乙良部曲。在郡東十五里。
烏等部曲。在郡北三十里。
楡水部曲。在郡北三十里。
沓谷部曲。在郡北三十里。
泥谷部曲,奈小里部曲。鄭從韶爲郡時,作郡誌云:“泥谷卽今旀田里,則在郡西二十五里;奈小里卽今沙奈里,則在郡東一里。” 然二部曲,古今稱號不同,未知何所考而爲是說也。
〔新增〕 藏軍谷。
名宦
高麗 鄭習仁。恭愍朝以典校令出知州。將視事,吏以故事,請詣消災圖焚香。習仁曰:“人臣不蹈非彝,災何由生?若其無妄,順受而已。” 命吏撤去。
本朝 河崙。知州。
人物
本朝 金曾。再中科第,官至金山郡守。
金淡。曾之弟。再登第,官至吏曹判書。諡文節。
孝子
高麗 文載道。洪武壬戌春,倭賊數千寇本郡,殺人甚衆。載道負其父,避匿山谷,賊尋至,射中其父。載道拔鏃,奮劍斬賊,賊徒披靡,父子得全。事聞旌閭。後官至平海郡事。
本朝 金爾音。登第,官至觀察使。嘗爲親廬墓三年,太祖朝旌門。
禹濟。官至監正。以孝子旌門。
〔新增〕 安壽鐵。其父得狂疾,自斷手指,和藥而進,病愈。事聞旌閭。
題詠
携家草草過龜城。鄭夢周詩:“云云,逆旅無人識姓名。身世嶮巇雙鬢改,明朝又試嶺頭行。”
一水縈迴抱古城。金孝貞詩:“云云,山形端合得龜名。”
溪分燕尾吟邊咽。尹子濙詩:“云云,山作鴉鬟畫裏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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