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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4 /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발제자 김선미
육체의 고백 제1장 새로운 경험의 출현
2. 세례의 힘든 과정
앞의 절 마지막 부분에 악의 용소, 진실의 표명, 자기에 대한 발견, 그런 것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맺어지는가를 드러내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2절 세례의 힘든 과정은 그런 과정 또는 관리술의 하나라고 봅니다.
* 세례(그리스도교에서 행해지는 하나의 중요한 의식이다. 그리스어 baptism은 씻음, 인증 등을 의미하는 말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물에 담그거나, 머리에 물을 뿌리는 예식이다)
-2세기까지 잘못에 대해 용서를 약속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교회 활동이었다.
-씻고, 지우고, 정화한다. 물속에 몸을 담그는 행위는 더러운 얼룩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세례의 물은 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증하는 징표이다.
-세례 받는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몸을 바친 존재가 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속과 약속의 징표를 마음속에 새겨 둔다.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첫 번째 탄생과는 달리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면서 또한 자유로은 선택과 앎의 차원에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영적 재생은 죽음을 초월한 삶에 이른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세례는 계시를 주는 것이다. 세례는 우리의 영혼 속에 하느님이 보낸 계시의 빛을 뿌려서 빛으로 가득 차게 하는 의식이다. 어둠은 사라지고, 동시에 영혼은 빛에 감싸여 빛 속으로 들어간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세례의 용서는 진실에의 접근과 연결된다.
-세례의 효과는 용서의 메커니즘이고 동시에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회개와 참회는 세례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세례에 필요한 속죄의 고행(헤르마스)
회개는 처음부터 잘 만들어지고 잘 정리된 속죄의 관습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헤르마스의 한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속죄하고 고행을 담당하는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잘못을 뉘우치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예지를 주겠다. 뉘우치는 행위가 그 자체로 예지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은 깨달음을 가질 수 있는 이해와 통찰의 의미와 같다. 이러한 이해에는 3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과거에 저지를 행동을 마음의 표면까지 떠오르게 하면서 그 행동이 나쁜 짓이었다는 것 둘째, 악으로부터 멀어지고 오직 선행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함 셋째, 변화를 다짐하고, 죄를 지은 영혼을 겸손하게 만들고 그의 영혼이 새롭게 태어난 지금, 영혼을 시험에 들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진실의 행동은 지식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차원에 있다.
* 테르톨리아누스(2세기와 3세기의 전환기에 세례를 주제로 쓴 텍스트에 대한 이야기)
A. 세례의 준비: 세례를 준비하는 이 시기에 대하여 이전보다 훨씬 높은 가치와 중요성을 부여 함. 정결의 의식이자 동시에 용서인 세례 행위의 주제를 테르톨리아누스는 3가지로 변화시킨다.
첫째, 시간적인 것으로서, 정결의식의 절차가 물속에 몸을 담그는 의식의 용서보다 이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정결의식을 주도하는 주체가 자기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셋째, 도덕적 훈련의 역할이 계시의 힘을 능가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정결의식의 본질에 관한 것으로,
정결의식은 영혼을 빛으로 인도하고 용서를 보장하는 변화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 이전의 선결적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테르톨리아누스는 <성서>에서 영적 가치를 말한 “물의 찬사”를 환기시키면서, 물의 모든 기능을 그대로 재현한다. 물은 치유하고, 양식이 되고 해방시켜주고, 정화시키고, 인간을 개조할 수 있고, 세례받은 사람의 영혼을 하느님의 권좌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물의 기능은 이제 구원의 관리술과 일체가 된다.
테르톨리아누스는 <세례론>의 첫줄부터 세례의 물이 죄를 씻어준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는 성사에 의한 용서의 기본원칙부터 시작하지 않고 이러한 속죄의 절차에 따른 하느님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비한다.
그는 문답식 종교 교육과 도덕적 정결의식으로 진리와 규범에 관한 교육을 두 배로 늘리도록 한다. 또한 그와 반대로 처음부터 회개를 규율화해서 조직적으로 세례를 준비하도록 한다. 하느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벌을 감수해야한다. 또한 인간의 고행은 그것에 합당한 형식과 규범, 방법과 이치에 맞게 표현되는 것이 좋다. 바로 이것이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기 전에 따라야 할 ‘속죄의 규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세례 받기 전에 해야 할 속죄의 규율을 상세하게 서술하지는 않았다. 그중에서 부적적의미의 규정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너무 빠리 세례를 주지 않도록 한다.
-누구에게나 세례를 주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이나 미혼인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지 말아야한다.
*속죄
속죄는 우리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준비-힘을 연마하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하는 일이다.
세례의 첫 번째 준비과정부터 속죄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기독교인의 모든 생활로 연장되는 자기에 대한 자기의 훈련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속죄는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처럼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속죄는 代贖대속(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만인의 죄를 대신 속죄하였음을 의미)의 대가라는 것이다.
속죄라는 말은 그러므로 두 가지를 나타내는데, 하나는 영혼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변화를 입증할 수 있는 행동을 통해 변화를 보여 주는 일이다. 속죄는 자기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영혼의 고유한 진실이란, 테르톨리아누스의 은유를 빌려 말하면 최종적으로 영혼을 가득 채우게 될 빛에 도달하는 대가로 영혼이 치러야 할 특별한 의미의 가치라는 것, 이것이 세례의 원칙에서 형성된 제도적 측면이다.
*히폴리투스가 쓴 <사도전승>
이 책은 세례 받는 사람이 믿음에 대한 3가지 질문의 대답으로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믿는다는 것을 엄숙하게 표명할 때, 즉 ‘신앙고백’이라는 최종 단계가 있기 전의 몇 가지 절차를 기술한다.
심문조사(지원자의 신분 직업 등등)
마귀 쫓기 의식의 시험, 안수와 얼굴 위에 입김 불어넣기는 한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사로잡은 귀신을 쫓기 위해서 만들어진 오래된 의식이다.(주교가 예비신자에게 안수기도)
죄의 고백,(세례받을 사람들은 열렬히 기원하고, 단식하고, 무릎 꿇고, 밤샘하면서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
고해(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리술)
-고해란 용어는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어의 exomologese, 즉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포괄적 행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기억과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실제로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한 묵상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자신의 증언이고, 자신의 변화에 대한 증명이다.
*성암브로시우스의 <성사론>(115쪽)
이 텍스트는 중요하다. 이 텍스트가 고해라는 말에 내포된 풍부한 의미를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영역은 특정한 잘못을 사실 그대로 고백하는 행위로부터, 인간이라면 자신이 죄인임을 부정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또한 죄로부터 은총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이것이 세례의 본래적 의미인데-어떤 진실의 행위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계속 보여 주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는 정화와 구원의 상관작용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세례와 죽음
세례는 갱생과 제2의 탄생으로 이해되던 때부터 죽음과의 상관성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적어도 죽음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 첫 번째 출생이후 진정한 삶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세례가 죽음과 관련되는 것은 그것이 죽음의 운명을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제 2장 동정에 대하여
3. 동정과 자기 인식
앞 2절에서 동정의 기술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동정의 생활에 대한 지도는 오히려 다른 책들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다.
첫 번째는 <완전한 동정에 관해서> 4세기 초, 안키라 바실리우스의 작품으로 수도원 교육과는 무관한 오리엔트 지역의 것으로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책이다.
두 번째는 <수도원 교육>과 <강연집>에서 카시아누스가 수도원 생활에서 지켜야할 순결 문제과 관련된 부분들에서 적당한 범례를 빌려온 것이다.
이 두 가지 예는 문맥도 다르고 시사하는 내용도 다르지만 4세기에 이루어진 ‘자기테크닉’의 발전과, 동정의 실천에서 자기 테크닉이 갖는 자리의 의미를 증언하고 있다.
1) 안키라 바실리우스의 <완전한 동정에 관해서>
안키라 바실리우스는 이 책을 문학작품이 아닌 실용서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첫줄에서부터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밝히면서 고행의 실천(재산포기, 단식, 땅바닥에 누워 자는 고행)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말한다.
이 책 첫머리부터 제시된 그리스도 배우자의 형상은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 등장한다.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과 결혼에 대한 생각,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녀가 지켜야 할 변함없는 충실성, 그(그리스도)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당연한 욕구, 이러한 내용들이 상세하게 기술된다.
또한 동정의 생활로 영혼은 염결한 상태가 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현세에서 천사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도 보인다.
이 책은 여성들의 생활규범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된다는 것, 실용적인 저작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다른 점은 상세하게 논의된 일련의 많은 의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쓰였다는 것과, 의학적 지식에 의거해서 육체와 영혼의 상관관계와 관련된 테크닉, 실행방식, 행동방식, 존재방식 등을 심사숙고해서 고안해 냈다는 것이다.
옷차림이나 교우관계보다 감각, 욕망, 심상, 추억의 문제들이 이 책의 주된 목표가 된다. 타인에 대한 태도나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취해야 할 행동보다 자기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
즉 모든 몸치장은 보는 사람들뿐 아니라 몸치장을 하는 여자의 영혼 속에 감각, 심상, 욕망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 바실리우스는 동정의 기술을 두 가지 관점으로 제시한다.
첫 번째는 우리가 분리나 단절의 테크놀로지라고 부를 수 있는 내용에 관한 것이다. 우선 자연적 욕망을 중단시키는 일이다.
- 이끌림의 감정 등을 단절이나 쾌락의 억제
- 육체에서 영혼에 이르기까지 쾌락의 출구와 통로를 감시해야 함(동정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
- 청각의 관리술, 시선의 관리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촉각의 관리술, 촉각이야말로 외부적인 것들이 육체를 관통해서 영혼을 진동시키는 출발점
마침내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조언들을 제시한다.
a) 모든 육체의(육체는 접촉의 장소이므로) 영혼과의 접촉을 피해야한다는 것,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야 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자기의 자리, 자기의 서열, 자기의 용도”에 따라서 정해진 위치에 있어야 평화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b) 위의 것(감지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감각의, 세계에 대한 육체의, 육체에 대한 영혼의 분리)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은 영혼 자체의 문제와, 영혼이 자기에 대해 실행해야 할 작업에 관한 것이다. 영혼의 순결 없는 육체의 순결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바실리우스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명한 매우 전통적인 주제이다.
c) 영혼의 정결을 위해서는 육체의 정결에 필요한 모든 금욕과 육체에 대한 정신의 분리 및 단호한 방어 외에도 특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잔상의 문제다. 그것들은 화재를 일으키기 위해 던져진 투창처럼 목표물에 남아서 불이 나게 하거나, 밀랍 위에 뚜렷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러한 영상들이 남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묵상을 통해서 영혼의 밀랍 위에 성상이나 신성함을 상징하는 기호들을 남겨 놓도록 해야 한다.
결국, 동정의 실천은 타인의 권력과의 관계 속에, 그리고 개인의 예속화와 동시에 개인의 내면성의 객관화를 표시하는 시선과의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푸코) 이 책에 주목하는 까닭은 동정의 원칙에서 금지된 성관계를 중심으로 거대한 영역(육체와 영혼, 감각, 심상, 생각들로 이루어진)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성관계의 배제가 성관계의 절제나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신앙의 의미와 상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보고, 동정을 위해서 관련된 영역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동정의 원칙이 육체의 전체이거나 영혼의 전체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한 원칙이 감각에 의한 대상의 포착으로부터 가장 비밀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육체와 영혼을 모두 관통하는 것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2) 영적인 투쟁 : 카시아누스의 <수도원 교육><강연집>
영적인 투쟁은 시련을 감내하고 극복함으로써 포상을 받은 순교자의 주제와 관련되어서 순결서원의 힘든 과정을 특징적으로 보여 준다. 카시아누스에게서 투쟁의 개념은 단순히 참고 가치를 지니는 데 그치지 않고, 분석의 중심 주체가 된다.
<수도원 교육>은 입문 수업의 교과서이다. 이 교과서는 일반적 규칙들을 알려주고 싸워야할 적들의 유형에 따라 어떤 전투태세를 갖춰야 하는지를 명시하며, 또한 끝으로 그러한 전투방법을 특별한 상황과 각자의 능력에 따라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강연집>에서 카시아누스는 금욕과 정절에 대한 이러한 구별을 훨씬 자세하게 재검토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금욕과 정절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금욕이 거부이고 거절이라면 정절은 긍정적은 상승의 힘이고 “자신의 순결성에 따라 획득할 수 있는 환희”의 지속적인 힘이라고 정의한다.(예: 소크라테스는 소년들에 대해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소모하지는 않았지만 정절을 지킨 사람은 아니었다고)
카시아누스는 그의 책 전체를 통해서 육체의 공격에 대항하는 싸움은 결코 완전히 끝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싸움임을 강조한다.
정절은 그러므로 상태라는 말과 전투라는 말로 생각해야 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바애할 수 없는 평온이란, 더 이상 “세속적인 인간의 미덕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의 특권이자 천사들의 특별한 산물인 것 같다”.
카시아누스가 금욕과 정절 사이에 확립한 구별방식에는 실제로 현저히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그 풍경을 지배하는 개념들은 수도생활의 특성을 고려해서 만들어 의미를 갖게 된 ‘마음의 순결’과 ‘영적인 투쟁’ 같은 것들의 지배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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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순결
- 카시아누스는 영혼이 하느님과 합쳐진다는 의미에서 ‘결합’을 말하고, 영혼이 하느님의 품속에 잠기게 된다는 점에서 ‘융합’을 말한다.
- 이러한 결합을 말하기 위해 암묵적이건 명확한 표현을 통해서건, 모델의 역할을 하는 것은 두 사람의 성적 결합이 아니라 시선과 대상과 빛의 관계로 생각되는 인식의 행위이다.
- 하느님과 결합한 영혼은 배우자와 만난 약혼녀가 아니다.
- 하느님과 결합한 영혼은 오히려 시선 집중의 대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더 이상 다른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 상태로 고정되어 있다.
- 카시아누스는 하느님과 일체가 되는 영혼을 말할 때, 영적인 결합에 마음을 빼앗긴 배우자의 모습 대신에 명상의 대상과 일체가 되는 묵상의 행위를 생각한다.
- 영혼 속에 그늘진 구석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주 예수를 환하게 비추는 빛이 영혼 속으로 하강하는 장면에 의존한다.
- 묵상 속에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아름다운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 이외에 다른 양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 이 앎의 관계야말로 하느님과 영혼 사이의 관계를 맺게 하는 기초가 된다.
- 즉 앎의 상태에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선과 빛의 형식에 의해서 앎의 관계를 숙고한다.
- 카시아누스에게 정절은 앎의 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마음의 순결’이나 ‘정신의 순결’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 즉 동정-완전한 순결성-영적인 혼례의 관계를 정절-마음의 순결-묵상의 관계로 대체한다.
2. 영적인 투쟁
카시아누스의 투쟁의 개념은 단순히 참고 가치를 지니는 데 그치지 않고, 분석의 중심 주체가 된다. <공동생활 수도사 교육>의 2부 전체는 마치 영적 투쟁의 개론서처럼 보인다.
수도사의 생활은 무기와 전술의 방법을 깨우쳐야 하는 전투처럼 전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카시아누스가 폭넓게 사용하는 용어들은 결투, 경쟁, 투쟁, 싸움 등 인데 이 용어들은 한쪽은
영적 투쟁을 격투기 선수의 모델과 관련시킨 것이고, 다른 쪽은 군인의 모델에 의존한 것이다.
운동경기로서의 투쟁은 연습, 훈련, 자기극복의 의지, 자기 자신에 대한 극기 훈련, 자기 자신의 체력에 대한 통제와 절도를 전제로 한다.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고행이다.
그러나 적과 싸우는 전쟁으로서의 투쟁은 타자와의 싸움으로 전개된다.
스포츠로서의 전투가 자기 자신과의 관계방식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라면, 호전적인 전투는 환원 불가능한 이타성의 한 요소와의 관계인 것이다.
유혹에 대한 개념의 본질적 역할
실제로 기독교 윤리의 형성단계에서 기독교가 영혼의 테크놀로지 혹은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발전시킨 것은 확장되거나, 내면화되거나 간에 죄의 범주와 관련되어서가 아니라, 유혹의 개념과 관련되어서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유혹의 개념은 자기와 외부세계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역동적인 단위이자, 동시에 후퇴나 거부, 발생과 추방의 단위이고, 또한 자기에 대한 자기의 성찰을 통해 타자와 타자의 존재를 은폐하는 내면의 형상에 대한 인식을 요구하는 분석단위이다.
정절의 주제는 그러므로 두 가지 원칙에 의해 지탱된다. 하나는 하느님에 대한 명상의 목표와 연결되고 동시에 앎의 의무와 연결되는 그러한 마음의 순결성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유혹의 개념을 통해서 영혼의 내밀한 곳에 숨어 있는 타자를 판독해야 할 의무와 연결되는 영적 투쟁의 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