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제국 쇠망약사' - 이남호

[섬]

문자제국의 쇠망과 전자제국의 번성이라는 관점으로 전자문화와 문학, 책, 독서, 내면성, 월드컵에 대해 고찰한 책. 화려한 영상과 사운드의 범람 속에 놓여있는 문자와 문학의 운명을 예측하고, 문자의 위상과 그 쓰임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전자시대의 문학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전자문화적 관점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하며, 압도적인 기세로 몰려오고 있는 영상과 전자의 시대에 문자가 흘러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문자시대는 쇠망했다"  ㅣ 이봉석기자 (anfour@yna.co.kr) ㅣ 2004-08-04 ㅣ [연합뉴스]
 
 평론집 '녹색을 위한 문학', 민담집 '상상력의 보물창고' 등을 지은 이남호 고려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는 "문자의 들판에서 문학이라는 곡식을 먹고 성장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 교수는 1990년대 이후 문자의 들판에 이상한 초목들이 자라나기 시작함을 보게 된다. 이성에 대한 불신, 영상매체의 대두, 사이버 공간의 확대, 서사의 와해 등이 바로 그것.

처음엔 이같은 이성과 서사의 퇴보가 근대적 이성의 전횡에 대한 사람들의 지나친 거부감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던 그는 '전자시대의 예언자' 마셜 맥루한의 사상을 접하면서 이런 현상들이 다른 큰 흐름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이 교수는 최근 펴낸 '문자제국 쇠망약사'(생각의나무刊)를 통해 맥루한을 접한 뒤 전자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문자시대가 물러가고 전자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전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월드컵 신드롬은 전자문화의 세상이 도래했음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월드컵의 거리 응원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아닌 대형 전광판, 인터넷, 휴대전화라는 전자문화 시대의 '삼총사'였음이 그 예라는 것.

길거리 응원에서 유행했던 태극기 패션과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표어 역시 문자시대가 몰락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 한국팀이 월드컵 첫 승을 거둔 2002년 6월4일 공교롭게 국내 서점의 대명사인 종로서적이 최종 부도가 났다는 사실도 저자의 눈에는 예사로이 비치지 않는다.

저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현대문학 작품으로 옮겨간다. 저자는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 등을 예로 들며 문학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내면성'이 현대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점점 약화돼가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내면성의 약화 역시 문자문화의 쇠퇴와 전자문화의 확산이라는 문명사적 전환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나아가 최근 나온 문학작품들의 내용을 뜯어보면 문자를 생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력함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저자는 또 "최근 들어 문자문화로서 책이 아니라 전자문화로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면서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텔레비전 프로 속의 책 소개 코너는 청암 마님(소설 '혼불'에 나오는, 홀로 대갓집을 의젓하게 이끌어가는 인물)에게 비키니를 입혀서 TV에 출연시키는 꼴"이라고 꼬집는다.

저자는 "거대한 괴물(전자문화)의 정체와 힘을 알고 나서 희망은 사라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편해진 것같다"며 "전자문화는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배할 것이고, 나 또한 쓰러져가는 문학의 고목 아래서 서성거리며 전자제국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이다"라고 읊조린다.
 

지은이 이남호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0년 평론으로 등단하여 평론집으로 『한심한 영혼아』『문학의 위족』『녹색을 위한 문학』을 냈고, 지은 책으로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느림보다 더 느린 빠름』『상상력의 보물창고』『혼자만의 시간』『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