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몽골과의 관계
1. 몽골과의 접촉
가. 몽골의 성장
거란과 금나라에 예속되었던 몽골은 징기스칸(Genghis Khan, 成吉思汗, 鐵木眞, 테무친, 위 1206∼1227)의 등장으로 1206년 건국하여 제국을 건설했다. 몽골은 1227년 서하, 1234년 금, 1279년 남송을 멸망시켰다.
나. 여몽의 거란 격퇴(강동의 역)
1219년 몽골군에 쫓겨 내려온 거란을 고려, 몽골 및 동진국이 연합하여 강동성에서 격퇴시켰고 몽골은 이후 고려에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2. 몽골의 침입
가. 원인
몽골은 고려의 은인을 자처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여 고려와 사이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몽고 사신 제구유(저고여, 著古與)는 수달피 10만장, 비단 3천필, 모시 2천필, 종이 10만장을 강요하고 귀국 도중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고려에 9차에 걸쳐 침입하였다.
나. 경과
몽고의 침입(대몽항쟁)
구분 | 연대 | 장수 | 구실 | 경과 |
1차 | 고종 18년 1231.8~1232.3 | 살리타이(撒禮塔) | 고종 12년 1255년 著古與(저고여, 제구유) 피살사건 | 서북면 마산 동산역 및 관악산 초적 활동 72명 다루가치(達魯花赤, 단사관) |
서북면병마사 朴犀 삭주분도장군 金仲溫 정주분도장군 金慶孫 자주성 성주 崔椿命 |
2차 | 1232.8~12 | 살리타이(撒禮塔), 반장 홍복원(洪福源) | 1232년 6월 16일 강화천도(참지정사 유승단, 야별초 지휘관 김세충(처형) 반대) | 처인부곡 白峴院(자현원) 승려 金允侯살리타이(撒禮塔) 살해. 용인현으로 승격돠고 김윤후 (상장군→攝郞將) 임명. 부인사 초조대장경 소실. 다루가치 축출 |
승병 金允侯 |
3차 | 1235.7~1239.3 | 탕쿠(唐古, tanggu, 당올(唐兀), 당올태(唐兀台), 당올대(唐兀臺)), 반장 홍복원(洪福源) | 출룍환도 | 전주, 경주까지 칩입. 황용사9층목탑 소실 |
죽주성 방호별감 송문주(宋文胄) |
4차 | 1247.7 | 阿母侃(아무간), 반장 홍복원(洪福源) | 출륙과 국왕친조 | 价州・竹州에서 몽고군 대파 |
충주산성 方壺別監 김윤후 |
5차 | 1253 | 지라타이(車羅大) | | 충주노예 활약. 김윤후 攝上將軍 승진. 충주 國原京 승격 |
김윤후 |
6차 | 1254.7~1255.2 | 지라타이(車羅大) | | 충부부근의 다인철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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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 1255.8~1256.10 | 지라타이(車羅大)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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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 | 1257.5・10 | 지라타이(車羅大)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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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차 | 1258.6~1259.3 | 지라타이(車羅大)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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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순(洪大純)-홍복원(洪福源)-홍다구(洪茶丘)
원간섭기(1270∼1351)
4한국(汗國)과 원
몽골(1206~1271)
한국 | 설립자 | 위치 | 별망 |
킵차크한국(金帳汗國, 1243∼1502) | 바투((拔都) 주치[求赤:拙赤]아들) | 남러시아 | 크림한국(1441년 ~ 1783년) | 1783년 4월 8일에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별망 |
카잔한국(1448~1552) | 1552년 10월 2일에 이반 4세에게 멸망 |
아스트라한 한국(1466년 ~ 1556년) | 1556년 이반 4세에게 멸망 |
시비르한국(1490년 ~ 1598년) | 1598년 러시아에 멸망 |
오고타이한국(1218~1310) | 오고타이 | 외몽골・내몽골,북중국 | 1310년 차가타이에 병합됨 | 동차가타이한국(( 모굴리스탄 한국 )에선 부카1360~1706) | ~1706 준가르에 멸망 |
차가타이한국(1227∼1360) | 차가타이 | 중앙아시아 | 서차가타이한국(1360~1369) | Timur제국(1369) |
일한국(1256∼1411) | 훌라구 | 페르시아 | 1411년 티무르(帖木兒)에게 멸망 |
원(1271~1368) | 쿠빌리아 | 남중국 | 1368년(북원 1696년 청나라 강희제 중국 복속) |
3. 개경 환도와 강화
가. 최씨 정권의 몰락
온건파인 김준(金俊)과 류경(柳璥)이 최의(崔竩)를 타도하고(무오정변, 戊政變) 몽골과의 강화를 추진했다.
나. 무신정권의 최후
김준(金俊) 임연(林衍) 임유무(林惟茂)로 이어지는 무신정권은 원종이 이분성(李汾成)을 보내 회유당한 근위대 삼별초와 어사중승(御史中承) 홍문계(洪文系((임연의 사위 임유무의 매형)), 문하성직사(門下省直事) 송송례(宋松禮) 등이 임유무를 살해하여 무신정권의 막이 내렸다.다. 개경 환도
원종 11년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39년간의 강화도 시대가 막을 내렸다.
4. 삼별초(三別抄)의 저항(1270~1273년)
가. 배경
삼별초(三別抄)는 도방(都房)과 더불어 최씨정권의 군사적 배경을 이루었다. 삼별초의 시초는 최우가 무인들의 일당인 악소(惡少)의 무리들의 행패를 막기 위하여 설치한 야별초(夜別抄)가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어지고 다시 몽고와의 항쟁에서 포로로 되었다가 도망쳐 온 신의군(神義軍)을 합하여 삼별초라고 한다. 삼별초(三別抄)는 무신정권의 전위부대이며 대몽항쟁의 중심부대였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붕괴와 몽골과의 강화에 불만을 품었다.
나. 과정
삼별초는 무인정권이 타도되고 몽고와 강화가 성립된데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개경환도가 발표되자 즉시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지유(指諭) 노영희(盧永喜)가 반란을 일으켜 강화도와 육지와의 교통을 끊고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개경정부와 대립하는 항몽정부를 수립하였다.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로 강화(1270.6~8월)에서 진도(1270.8.19~1271.5월. 용장산성과 남도석성)로 배중손이 죽은 후에는 김통정(金通精)이 다시 진도에서 제주도(1271.5~1273.4.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로 가서 항쟁하였으나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제주가 함락하여 항쟁은 끝났다.
다. 의의
고려 무인의 대몽고 항쟁의식을 잘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