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는 지난 30년동안은 과거와 비교해서 가장 전쟁이 적은 시기이다. 더불어 1인당 GDP로 계산했을 때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커지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세계적인 최상위 계층 1%나 0.1%의 경우 그가 갖는 부의 정도는 이제는 몇 개 나라의 재정을 합친 것 보다 많은 부를 갖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수 없이 많은 하위층은 새로운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내몰리며 평화와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전지구화 되면서 개인들이 갖는 공적 실존의 영역으로서의 정치공간을 박탈함으로서 자유와 평등이 제약되는 그런 역설에 직면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불만은 혐오와 폭력의 형태로 사회적 약자들을 서로 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아랜트는 4가지 차원의 정치 철학을 이야기 했다.
개인 차원에서 내면과 외면 또는 둘로 나뉜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서 출발해서 마을이라든가 최소 공동체 단위에서의 자기 연합 또는 자치 공동체의 추구, 그리고 이런 자치 공동체의 엽합으로서의 공화국, 그리고 이 공화국들의 연방으로서의 세계 공화국 연방까지, 개인(공화국의 시민)-마을(기초 공화국)-국가(공화국) 세 개의 피라미드 단위는 단위대로 자율적이며 독립적이면서도 그 사이를 연결하는 웅대한 정치철학을 구축하고 있다.
이상을 추구하다보면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폭력성도 비례하여 커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이율배반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막스 베버는 '정치라는 것은 악마의 힘과의 계약이다.', 악마와의 거래이다라는 점을 서 너번 강조한다.
테러리즘, 난민, 시위, 극우주의, 인종주의, 각종 장벽 쌓기등이 벌어지고 있다.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것의 위험성. 정치적 통합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의 폭력성
세계인권선언이나 천부인권은 사실 국가 정치 공동체 안에서만 유효하다. 이를 박탈당한 사람을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고 명명한다.
정치와 전쟁을 연결시킨 아랜트
아랜트 이전에는 전쟁과 평화를 연결지었다면 아랜트는 전쟁과 정치를 대립항으로 구분지으면서 정치라는 공적 영역을 확보함으로써 평화가 가능해 진다는 매개적 개념으로 정치를 위치지운다.
정치가 공동체의 공공성을 통해서 안전이나 최소 생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라면 이 안전은 주위의 폭력과 정치 공동체를 안전하게 수호하기 위한 폭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인권으로 나아가려면 폭력으로부터 멀어질 수록 정치 공동체가 독자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 대화, 자유, 평등, 생명,
헤라클레이토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이고 만물의 왕이다." 이는 전쟁을 통해서 여러가지 제도가 정비되고 인간에 관한 많은 것들이 배열되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전쟁이 없었다면 인류는 얼마나 미개했을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쟁의 긍정성.
하지만 아렌트는 폭력을 정치 이전 단계로 인간을 후퇴시킨다고 보았다.
자살, 저출산, 남녀 임금격차, 비정규직 비율, 직계존속 살인, 직계비속 살인, 인간 좀엄 지표가 최악인, 기술과 인간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특수한 문제는 특수한 해답을 요구한다. 구체적인 문제는 구체적인 해답을 요구한다.
전체를 이루는 개체 속에 보편이 존재하는 것이지, 전체 속에 보편이 존재하느냐 하면 아니라는 거죠.
신성은 모든 사람들, "고통 받는 인류 한 덩어리가 아닌 개별적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에게 개별적인 존재로의 동덩을 가지는" 그것이 예수의 신성성이다. 이는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신적 폭력을 거부하는 아주 확고한 근거이다.
아렌트는 정치를 공공성과 공공성이 실현되는 공간으로서의 공론장의 시작으로 보았다. 이 공간은 자유가 출현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공공성은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데 자유는 스스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우리는 경제적으로 불평등하지만 공적 공간으로 나왔을 때 서로 평등하게 만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공적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공적 공간이 무저질 때 사적 공간도 함께 무너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개인의 사적 안녕이 위협받는 상황을 겪고 있지만 이는 사적 공간을 지탱시켜 줄 수 있는 공적 공간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일상의 고통 즉, 헬조선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이가 그러하듯이 세계는 사람들을 맺어주기도 하고 동시에 분리시키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 , 인간의 조건, 한길사, 105쪽)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도 불평등하게 태어나며 경제적으로도 불평등하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들이 공적 공간으로 나왔을 때에 평등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유는 평등의 조건이고 평등은 자유의 조건이 된다.
타자를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그 만큼 공적 영역의 확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타인이 부재하면 마치 그것을 독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는 마틴 뮐러 목사의 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Martin Niemöller
개인은 사회를 거치지 않으면 시민이 될 수 없다.
아렌트는 정치의 출발을 개인에서 시작하고 있으며 나아가 '마을 공화정'으로 확장된다.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자치 공동체 안에서 토론, 심의, 결정을 내리는 공적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 권력이나 정치적 정책의 근원을 외부의 사상 또는 실체, 이념이나 표준이 아니고 인간의 속성 그 자체로부터 끌어낸다는 점이 특별하다. 더불어 이러한 기초 공화정 속에서 시민들은 자기 지배라는 자율성과 책무성을 동시에 부여 받는다.
아렌트는 공익과 사익의 경계가 무너진 사회를 '어두운시대'라고 한다. 우리는 현재 어두운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어두움은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없게 만들며 볼 수 없다는 무명은 우리가 어둠에 있다는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존재의 구속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역설에 빠지게 한다.
거짓말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정치적 발화이다. 하지만 거짓말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또다른 거짓말을 만들어 냄으로써 결국은 공적영역을 파괴해 버린다.
아렌트의 핵심 개념은 '정치적 사유'이다. 이는 특정한 정치적 경험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질문하고 그에 답변하는 정신 활동을 정치적 사유라 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정치적 사유'를 설명한다.
1) 개념적 사유 : 활동적 삶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노동, 작업, 행위이다. 더불어 정신적 삶을 사유, 의지, 판단으로 구분한다. 활동의 영역을 사적 영역, 사회 영역, 공공영역으로 규정한다.
2) 이야기하기(스토리텔링) : 아렌트는 역사를 보는 관점을 조금 달리한다. 즉 시간 개념을 달리한다.
결국 아렌트는 개념적 사유와 이야기하기로 집필하기 때문에 그의 저작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The freedom is not free'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쟁참전비에 쓰여 있는 문구로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관계를 보여주는 문구이다. 결국 자유는 적극적인 정치적 행위와 관련된다. 책임을 진다는 것도 적극적 행위의 개념으로 정치적이다. 용서 또한 적극적 행위의 개념으로 정치적 행위이다. 더불어 이러한 행위는 새로운 시작으로 자유로운 존재의 공적 활동의 연쇄를 촉발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철학에서는 정치적인 삶과 관조적인 삶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서는 관조적 삶을 더 수준 높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헤겔에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아렌트는 이 두가지 삶은 상호 공존하며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문구는 "말하려는 사람은 사유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으면 사유하려는 사람은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라는 것이다. 말은 활동적 삶에 해당하고 사유는 정신적 삶에 해당되어서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사유와 행위가 같이 연계되엉 있다는 것이다.
정치철학에서는 존재와 현상을 구분한다. 그리고 존재는 상위에 있고 현상은 밑에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아렌트는 인간 사회에서 존재와 현상은 동일하다고 해서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탈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존재와 현상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존재는 마음의 눈에만 보인다. 그리고 현상은 신체의 눈에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존재를 규정할 때 존재는 노출되는 것이고 현상은 노출되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현상은 드러나기도 하고 노출되기도하고 노출되지 않기도 한다. 태양은 낮에는 현상으로 노출하지만 밤이 되면 노출하지 않는 즉, 존재할 것이라는 가상의 세계로 넘어간다. 마찬가지로 공공 영역도 사람이 모이면 가시적인 형태를 유지하다가 흩어지게 되면 흔적도 사라짐으로써 가상의 세계로 넘어간다.
형이상학적 편건 : 형이상학자의 삶의 방식을 정치에 부과하는 것이 형이상학적 편견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활동적 삶보다는 관조적 삶에 우위성을 부여한다는 것과 둘째로 행위와 저작, 즉 작업 개념을 동일시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더불어 정치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도 형이상학적 편견에 해당한다.
형이상학적 오류는 예를 들어 세계를 둘로 나누는 것이다. 현상 세계와 이상세계, 신의 도성과 인간의 세계로 나누는 이원적 세계론, 다음으로 진리와 의미를 동일시하는 것도 형이상학적 오류이다. 사유를 통해서는 의미를 탐구하지만 인지를 통해서는 기본적으로 진리를 도출하기 때문에 인지와 사유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동일시 하는 것이다.
플라톤 이후 현상 세계와 이념의 세계에서 전자를 우위에 놓고 보았지만 근대에 이르러서는 이 두 세계를 뒤집어 버린다. 이는 니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전복해 버린 니체 또한 현상과 이상이라는 이항 대립 구조 내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여전히 플라톤이 구축해 놓은 전통 속에서 그의 사유를 변주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2차 대전은 인간이 인간 존재로서도 부정되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면서 기존의 모든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아포리아에 봉착하게 된다. 이에 아렌트는 기존의 지적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유를 제시해야 했으면 이러한 사황을
아렌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