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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답사기
아침 5시에 일어났다. 오늘은 일정이 여유로운 날이라, 좀 늦게 일어나도 되는 날이다. 호텔이 불편한 것도 아닌데, 여전이 답사 기간 중에는 자꾸 일찍 일어나게 된다. 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4월 22일 중국 기상청 예보자료를 보니, 5월 5일 오전에 심양에 비가 온다고 예보했었다. 그래서 이번 답사에 우산을 챙겨올 것을 공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진짜 비가 왔다. 오늘 비가 와서 정말 다행이다. 오늘은 산에 오를 일이 없고, 요녕성박물관만 관람하고 오후에는 심양에서 대련까지 버스로 이동하면 된다. 비야 더 내려 심양의 탁한 공기나 씻어 내려라! 하면서 여유를 부렸다.
식사 시간 전까지 우실하교수가 내게 선물해준 『요하문명과 한반도』 책을 다시금 읽었다. 요녕성박물관 고대요령관에서 요하문명 관련 유물들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작년에도 이곳에 와서 해설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었지만 짧은 시간에 말해야 할 요점을 생각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호텔 3층에 있는 뷔페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장미호텔 식당에서 가장 기억나는 음식은 자판기에서 내려먹는 따뜻한 오렌지주스다. 감귤차는 분명 아니다. 노수한 선생이 신기하다고 이야기해준 바람에 먹게 되었는데, 은근 중독되었다. 차가운 오렌지주스만 먹다가, 따뜻한 것을 먹으니 이것도 좋았다. 가이드말로는 중국인들은 차를 따뜻하게 먹는 습관이 있어서, 맥주도 차갑게 먹지 않으며 식당에 얼음물을 내놓은 경우도 거의 없다고 한다. 첫날 식당에 찬물이 없어서, 내가 류가이드에게 다음날부터 식당에 미리 연락해 찬물과 찬 맥주를 준비해달라고 했었다. 찬물이 익숙한 나였지만, 따뜻한 오렌지주스는 계속 먹게 되었다. 2일 연속 오렌지주스를 여러 잔 마셨다.
8시 버스에 올라탔다. 박물관으로 가는 도중, 버스 안에서 중국의 민족문제와 역사인식, 요하문명론에 대해 강의했다. 손문의 오족공화제(五族共和制)부터 시작된 중화민족 이라는 만들어진 민족과 그로부터 파생된 과거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종족들의 역사를 모두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역사인식을 이야기했다. 특히 중국 역사의 본류인 황화문명보다 더 오래된 요하문명의 발견으로 인해, 중국의 고대사 인식이 전환되는 이야기를 했다. 중국 고고학계의 원로 곽대순 선생이 제창한 요하문명이 황제의 족속이 만든 것이라는 논리가 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가를 설명했다.
황제가 유웅씨(有熊氏)라는 기록에 착안하여, 요하문명에서 등장하는 곰 토템을 모두 황제족의 것으로 보게 되면, 웅녀는 물론 단군도 황제의 자손이 되고, 그러면 우리민족은 모두 중국인의 후손이 되는 셈이 된다. 이러한 논리는 우리나라 학계는 지금 대단치 않게 생각하고, 요하문명을 우리와 별 관련 없다고 보지만, 장차 이러한 논리가 가져올 파장을 고려한다면, 그냥 무시할 수는 없음을 이야기했다.
여기까지만, 더 깊은 이야기는 오래 하면 안 된다. 버스 안에서 일단 요하문명에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하는 이유만 설명했다.
아직 차는 심양 도심을 흐르는 심하(深河) 북쪽을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심양시내를 보았다. 비가 여전히 내려서, 차가 빨리 달리지는 못한다. 강을 건널 때 차량 접촉사고가 있었던 모양이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가장 신기하게 생각되는 것은, 중국 운전자들이나 보행자들이 교통질서를 잘 지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통사고가 흔하지 않다는 점이다. 몇 년 만에 교통사고를 보았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를 운전하는 쉐이(隋)따거도 가끔 역주행도 하고, 교통신호도 잘 지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안전운행하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
9시 무렵 요녕성 박물관에 도착했다. 9시 10분부터 예고한 것처럼 일행을 A팀과 B팀을 나누어 각기 50분 정도 3층 전시실 고대요녕관 15, 16관을 해설했다. 박상근님이 찍은 영상을 나중에 볼 기회가 있었는데, 석경을 해설하면서 동아시아 최초의 악기라고 과장해서 말한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하다니, 이런 실수가. 지금부터 약 4천년에 나온 아주 오래된 제례용 악기는 맞지만, 최초는 아니다. 북과 같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발달된 타악기가 이렇게 오래 전에 등장했다는 점만을 강조했어야 했다. 이건 잘못이다.
- 동아시아 최고의 여신상 - 우하량 유적지 출토 -
- 금와왕을 생각나게 만드는 개구리형 버클 -
나머지 해설-은 다시 봐도 그럭저럭 무리는 없었다. B팀은 추가 요청이 있어서, 고구려 시대까지 조금 더 해설했다. 작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15, 16관은 충분히 사진도 찍고 보았기 때문에, 해설에만 열중했다. 시간이 어느덧 11시가 넘었다. 12시 40분에 집합하기로 했다.
시간이 없다. 이제부터 나만의 시간이다.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맨 먼저 달려간 곳은 요, 금, 명, 청 시대 요녕성 지역 유물이 전시된 18, 19관이었다. 발해 유민으로 금나라 최고 명군인 세종(1161~1189)의 어머니인 발해인의 후손 이원홍에 대해 따로 따라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웠다. 금나라 황후 20인 가운데 여진족 14명, 한족 2명, 발해인이 4명이다. 발해인은 금나라에서 여진족 다음으로 우대받았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 출가했는데, 그녀가 머문 조월사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비문은 이번 답사에서 찍지 못했다.
또 전시관에는 고려청자가 전시되어 있었다. 고려청자가 요령성 일대에서 많이 출토되었는데, 요, 금과 고려의 활발한 문화교류의 산물로 설명하는 내용이 보았다. 고려 청자를 보니 반가웠다.
올해 2~4월에 만주족과 조선, 명과 조선, 청과 조선 강의를 준비하면서 만주족과 명청 시대사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 그 때문에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이 너무도 쉽게 이해가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사진 찍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한참 사진을 찍다가 보니 어느덧 12시 반쯤 되었다. 앗! 정신을 놓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2층 만주족 민속전시관과 1층 중국고대비지(碑誌)전시관에 가야하는데, 겨우 10분만 남다니. 선택해야 했다. 1층으로 빨리 뛰어갔다. 무조건 셔터를 눌렀다. 비문을 세세히 읽는 것을 포기하고 무조건 당나라 시대까지 묘지문은 모두 다 찍었다. 관구검 묘지를 비롯해 내가 익히 아는 것도 꽤 있었다. 특히 가장 마지막에 691년에 죽은 고구려 유민 고영숙 묘지명을 찍었다. 고영숙은 북연의 건국자 고운의 후손인데,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북중국에서 집단을 이끌며 대수령의 직위를 갖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들이 북중국에 별도의 독자적인 세력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비문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그녀의 남편은 벼슬명만 나오고 이름도 안 적혀 있고, 시댁쪽 가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없다. 그래서 주목되는 유민이다. 밤에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글자를 다 읽을 수 있게 잘 찍었다. 그래 그거면 된다.
12시 47분 버스에 탔다. 약속보다 늦었지만 내가 늦었다고 탓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했다. 점심 식사는 심양에 있는 한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서탑거리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곳이기는 하지만, 다시 시내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날 김수연님이 생일이었다. 김수연님과 함께 온 부산팀에서 맥주를 돌렸다. 함께 축하를 해주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올라탔다. 이제부터 대련까지 오래도록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마이크를 류가이드가 잡았다. 류가이드는 교포 3세다. 중국인의 북한 여행 가이드를 여러번 해서, 평양 등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날은 평양 답사 이야기 했다. 2007년 평양에 4박 5일 다녀온 후, 아직까지 다시 가보지 못한 내게 평양 이야기는 늘 흥미로운 이야기다. 평양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가볼 수가 없으니 갑갑하다. 12년 전 평양을 방문했던 그 때 일을 잠시 회상해보았다. 잠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렸다.
버스 안에서 류가이드가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팔았다. 답사를 하면서 한 번도 쇼핑센터를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버스 안에서 물건이라도 팔지 않으면 가이드는 돈 벌 기회가 없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냥 팔게 놔둔다. 작년까지 3번 함께 했던 허금봉가이드는 물건 파는 것에 그리 익숙하지 못해 별 재미를 보지 못해 가이드를 그만둔 것 같다. 답사를 다녀온 후, 허가이드와 카톡으로 연락을 했다. 언젠가 중국이나 한국에서 다시 볼 날이 있기를 바라며 안부를 전했다. 류가이드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면서 건을 팔 줄 알았다. 1회용으로 만든 보이차를 2일 연속 우리 일행들에게 드셔보시라고 주더니, 오늘은 보이차 90알을 300위안에 팔았다. 뿐만 아니라 들쭉술, 블루베리, 목이버섯, 송이버섯, 말린 대추,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은이버섯까지 7종류 상품을 모두 다 팔았다. 게다가 추가 주문까지 받았다. 헉 대단하다.
대련시에 속한 보란점시쯤 왔을 때 두번째 삼십리보 휴게소에 들렀다. 중국 휴게소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물건도 가장 많았다. 이곳에서 콜라 1.25리터 2병을 11원에 구입했다. 중국의 콜라 가격만큼은 20년 전이나 차이가 없다.
대련시내로 들어오니 차가 좀 막혔다. 어느덧 7시였다. 4시간 반 만에 대련에 도착한 셈이다. 마지막 저녁 식사는 여행사에서 본래 삼겹살을 제공하기로 했는데, 연락이 잘못되었는지 현지식당이었다. 그래도 저녁 식사는 매우 먹을 만했다. 가이드가 김수연님 생일케잌을 사왔다. 가이드 센스가 보통이 아니다.
다시금 생일 축하를 하고, 식당에서 아주 가까이 있는 홀리데인 익스프레스에 투숙했다. 오늘 밤이 이번 답사에 마지막이다.
버스에서 많이 잠을 자지 못했고, 긴장이 풀어져서 인지, 호텔에 들어와 씻고 오늘 찍은 사진을 노트북으로 보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좀 나가볼까 했더니, 내방으로 5분이 찾아오셨다. 술을 마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나는 오늘도 콜라를 마시면서 술을 피했다. 맥주라면 모를까, 소주를 먹으면 내일이 부담스럽다. 이번 답사에서 내가 가장 아쉬운 점은 많은 분들과 밤에 더 다양한 술자리를 하지 못한 점이다. 서울에서 끝내지 못한 일들을 가져온 탓이 크다. 그래도 밤에 내 방을 찾아주신 분들 덕분에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2시간 쯤 이야기를 나누니 밤 12시다. 마저 읽어야 할 글들을 읽고, 자료를 정리하다가 잠을 청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0.02.25 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