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당 류공 묘지명 서문을 아울러 붙이다包堂柳公墓誌銘 幷序
아, 이곳은 나의 벗 포당(包堂) 류공(柳公) 규언(圭彦)의 묘소이다. 아들 석봉(錫鳳)이 그 족조 동수(東銖)가 찬술한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니, 지난 세월을 돌이켜 생각함에 내가 어찌 차마 붓을 잡으며 또한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이에 눈물을 닦으며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기원(基元)이니, 규언(圭彦)은 자, 포당(包堂)은 호이다. 류씨는 고려 말 완산백(完山伯) 휘 습(濕)을 상조로 하고, 이로 인하여 완산을 그대로 본관으로 삼았다. 조선 선조 조에 이르러 휘 복기(復起)가 있으니 호가 기봉(岐峰)이다.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여 관직이 예빈시 정(禮賓寺正), 증 이조 참판(吏曹參判)이고 처음 수곡(水谷)에 거주하였다.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 아들 휘 수잠(守潛)이 곧 공의 분파조이다. 10여 대를 전해 내려오면서 유학을 이었는데 공이 그 주손이다. 증조의 휘는 호영(浩永), 조부의 휘는 도식(道植), 부친의 휘는 태희(泰熙)이다. 모친은 흥해 배씨(興海裵氏)이니 선술(善述)의 따님이다.
고종 갑오년(1894) 12월 7일에 공은 원파(遠坡)의 선대로부터 살던 집에서 태어났다. 눈과 눈썹이 맑고 깨끗하며 재주가 빼어나니 어른들이 크게 기대하고 의지하였다. 족조 금하(琴下) 공 회식(晦植)의 문하에 나아가 배워 일찍이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문장과 필법이 찬란하게 조리를 이루어 명성이 한 지방에 자자하였는데 갑자기 경술년(1910) 나라의 변고를 당하였다. 그때 17세였으니 총명한 남아로서 두뇌와 근력이 예민하여 비분강개하였다. 족조 동산(東山) 옹 인식(寅植)을 따라 배워 시대에 맞는 의리를 흡족히 듣고 씻은 듯이 유신사상(維新思想)을 가져, 드디어 옛 모습을 바꾸고 협동학교(協同學校)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마치고 지구의 대세를 대략 깨닫고 새로운 조류의 공기를 호흡하였다. 나가서 멀리 해외에 유학하여 사회의 선구자들과 함께 광복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양친을 섬기고 처자를 기르는 책임이 한 몸에 모였고 양친의 뜻이 또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곧바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답답한 마음으로 궁벽한 곳에 살면서 때로 옛 학업을 익히고 새로운 책을 두루 보아 장구(章句)와 훈고(訓詁), 의식이나 규칙의 말단에 얽매이지 않고 충신과 열사의 행적을 애독했으며 《반계수록(磻溪隧錄)》《성호사설(星湖僿說)》《연암전집(燕巖全集)》 같은 것은 더욱 깊이 좋아하여 음미하였다. 그리하여 그 범위가 크고 구상함이 넓은 것은 옹색한 선비의 고루한 무리는 아니었다. 변고를 겪음이 더욱 오래됨에 지키는 바가 더욱 견고하여 곤궁함이 또한 심했으나, 적에게 아첨하여 녹을 구하는 것과 불의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비록 얼어 죽고 굶어 죽더라도 하지 않았다. 더불어 기쁜 마음으로 교제를 한 바는 반드시 우국지사였고, 고독한 가슴속의 울림은 언어와 문자의 사이에 절로 나타났다. 저술한 〈주인무신론(周人戊申論)〉과 〈의사전(義士傳)〉 같은 것은 동산 선생의 〈차야한십절시(此夜寒十絶詩)〉 등의 글을 이을 수 있으니 대략 알 만하다.
캄캄한 긴 밤에 다만 끝없는 근심만 품고 있었는데, 을유년(1945) 8월에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진 것이 비록 열강의 승전에 기인하였으나 우리나라 안에 하나의 일본 종자도 없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온 민족이 단결하여 융성한 세상을 이루어야 되었건만, 남은 재앙이 다 소멸하지 않아 강토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당론은 좌우로 대치되어 곧 수라장을 만들어 경인년(1950) 병란이 있기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이 해 6월에 공이 이에 잡혀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하니, 해를 당한 날이 어느 날 어느 곳인지 알 수 없고 또한 무슨 연유로 여기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다. 이 사람이 이에 이르렀으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가히 비통하여 한심한 것이 있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찌 이리 불행한가! 공의 57년 기간은 유사 이래 일찍이 없었던 혼란한 시기였다. 신정(新亭)의 눈물이 마를 때가 없었으나, 을유년(1945) 이후에는 진실로 천재일우의 때였으니 재주를 펼 수 있었고 뜻을 펼 수 있었는데도, 결국 마지막에 이와 같이 된 것은 이 누구의 책임인가? 원통하고 슬프다.
대개 효우(孝友)는 천성에 근본 하였고, 문장은 오당(吾黨) 중에 으뜸이었다. 그 나머지 소소한 행실과 간소한 예절은 남들이 미치기 어려운 바가 많은 것이 행장 중에 갖추어 실려 있으니 한 집안 내에서 뜻을 알아주는 이의 말은 믿어 징험할 만하고, 또한 모두 내가 평소에 몸소 보고 마음으로 감복한 것이니 누가 흠잡을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동산 옹을 따라 배운 사람들이 참으로 한때의 영민하고 준수한 이가 많았으나 신학과 구학을 겸비하고 시종 뜻이 변하지 않았음은 공과 같은 이가 없다.
내가 공에 대해 청춘 시절부터 백발이 분분하도록 마음을 기울이고 형체를 잊어 세한(歲寒)의 맹약이 스스로 얕지 않았는데 덧없는 세월이 문득 변하여 나는 오히려 산 사람으로 남아있다. 지금 곧 공을 위하여 찬술을 하자니 다만 문장이 서투르고 정신이 흐릿할 뿐만 아니라 상궁(傷弓)의 나머지에 아직도 두렵고 조심스러워 능히 드러내놓고 말하여 구천의 깊은 답답함을 풀어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문이 바야흐로 세상에 전하니 태평한 세상이 오면 반드시 그 글을 읽고 그 사람을 알아서 그 세대를 논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공의 배위는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니 주환(周煥)의 따님이다. 공보다 2년 먼저 태어나고 12년 뒤에 돌아갔다. 묘소는 경곡(徑谷) 재사 앞 모향(某向) 등성이이니 공의 무덤과 합장하여 함께 제사를 지낸다.
3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석영(錫濚)·석봉(錫鳳)·석인(錫寅)이고, 딸은 김용구(金容球)·김만영(金萬榮)·이병순(李炳純)의 처이다. 석영의 아들은 준혁(浚爀)·준철(浚喆)·준신(浚兟)이고, 딸은 권오식(權五殖)의 처이다. 석봉의 아들은 승일(承一)이고, 딸은 김동렬(金東烈)의 처이다.석인의 아들은 준영(浚暎)·준덕(浚德)이고, 딸은 조경선(曺景善)의 처이다. 김만영의 아들은 광두(光斗), 광준(光俊), 광태(光台), 광오(光午)이다. 이병순의 아들은 인기(仁基), 성기(成基), 혁준(赫俊)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명(銘)을 붙인다.
맑고 깨끗한 자질이고 氷玉之質
구름무늬 비단결 같은 문장이었네 雲錦之文
마침 이러한 때를 만나서 適丁此辰
웅장한 뜻 펴지 못했네 壯志輪囷
한 밤중에 슬프게 노래하니 中夜悲歌
화훈(華勛)의 시대 아득하네 邈矣華勛
청황(靑黃)이 재앙이 되고 靑黃爲災
곤겁(昆劫)에 모두 타버렸네 昆劫俱焚
도도한 이 세상에 滔滔者世
경위를 누가 분별할 것인가 涇渭孰分
한마디 말로 하자면 蔽一言
오당의 재앙이고 시운의 험난함일세 吾黨之厄而時運之屯也歟
동산(東山) 옹 인식(寅植) : 류인식(柳寅植, 1865∼1928)을 말한다. 자는 성래(聖來), 호는 동산(東山),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 1841∼1924)의 아들이다. 서구의 근대 사상과 학문을 접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대한협회를 발기하고 안동에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하였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12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 이상재(李商在) 유진태(兪鎭泰) 등과 조선교육협회의 주동적 발기인이 되어 활동하고, 1927년 신간회 안동지회를 설립하고 지회장이 되었다. 저서로는 《동산문고(東山文稿)》, 《대동사(大東史)》, 《대동시사(大東詩史)》 등이 있다.
협동학교(協同學校) : 경상북도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 기관이다. 1907년 류인식, 김후병, 하중환의 발의로 가산서당 자리에 3년제 중등교육기관으로 개교하여 계몽운동 차원의 구국교육운동기관으로서 계몽교육을 확산시키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1917년 폐교되었다.
차야한십절시(此夜寒十絶詩) : 류인식이 지은 10수의 7언 절구이다. 3·1운동 이후 억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지은 것이다. 매 수마다 “밤이 차다[此夜寒]”는 말을 반복하면서 애국청년, 해외동포, 노동자 등의 삶의 고난을 그리는 한편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신정(新亭) : 진(晉)나라가 오호(五胡)의 난을 만나 국가가 쇠약하여 강남(江南)으로 쫓겨 가자, 진나라의 명사들이 신정(新亭)에 모여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다. 주의(周顗)는 탄식하면서 “풍경(風景)은 예와 다름이 없는데, 산하(山河)는 옛 산하가 아니네.”라고 하니 모두들 쳐다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 왕도(王導)는 낯빛을 바꾸고 “마땅히 함께 왕실을 위하여 중원을 수복할 것을 힘써야 하거늘 어찌 초(楚)나라 포로처럼 마주 대하여 눈물만 흘리겠는가?”라고 하였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세한(歲寒) : 변함없는 지조나 우정을 말한다. 공자의 말 가운데 “한 해가 지나 추워진 뒤에 송백이 뒤에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子罕》
상궁(傷弓) : 어떤 사물에 한번 놀란 사람은 비슷한 사물만 보아도 겁을 낸다는 말이다. “화살에 상처를 입은 새는 굽은 나무를 보고도 놀란다.[傷弓之鳥, 驚曲木.]”라고 한 말이 있다. 《戰國策 楚策4》
화훈(華勛) : 요순(堯舜)의 성덕을 말한다. 《서경》〈요전(堯典)〉에 사신(史臣)이 순임금의 덕을 ‘중화(重華)’, 요임금의 덕을 ‘방훈(放勳)’이라고 한 것을 합하여 말한 것이다.
청황(靑黃) : 훌륭한 자질을 말한다. 《장자》〈천지(天地)〉에 “백 년 된 나무를 베어서 제기를 만들고 그 위에 청황의 문채로 장식한다.[百年之木, 破爲犧尊, 靑黃而文之.]”라고 한 말에서 유래했는데, 당(唐)나라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의 〈제유자후문(祭柳子厚文)〉에서 이를 인용하여 “무릇 물건이 태어나서는 재목되기를 원치 않는다. 청황으로 칠한 제기는 나무의 재앙이다.[凡物之生, 不願爲材. 犠奠靑皇, 乃木之災.]”라고 한 말이 있다.
곤겁(昆劫) : 전란을 말한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곤명지(昆明池) 밑바닥에서 검은 재가 나오자, 인도 승려 축법란(竺法蘭)이 “바로 그것이 겁화를 당한 재[劫灰]입니다.”라고 답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高僧傳 卷1 竺法蘭》
경위(涇渭) : 중국의 두 물줄기 이름으로 청탁을 비유하는 말이다. 경수(涇水)는 탁하고 위수(渭水)는 맑은데, 이 두 물줄기가 서로 한 곳으로 흘러들어가도 청탁(淸濁)이 섞이지 않고 분명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白渚文集(下), 배동환 저, 김홍영, 남계순 역, 학민문화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