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인과의 원리로 굴러간다. 원인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인간의 사고와 이성을 지배해 온 규칙이었다. 예술이 인본주의를 장착하고 당연하다 믿어 왔던 규칙에 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선형적인 진행과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 너무 신뢰를 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음악, 문학, 미술에서는 오랫동안 품어왔다. 이 해묵은 논의는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영화라는 장르의 예술에게 일임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진행되는 선형적 흐름이나, 인물의 고정된 역을 연기하면 관객은 시간순으로 따라가거나 인물이 벌이는 사건을 재구성해 따라간다.
데이빗 린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통해 지금까지 영화가 하지 못해던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만일 한 인물의 외양을 의도적으로 둘로 나누거나 두 인물의 모습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는다면, 그 인물의 외양을 등대삼아 따라가던 관객은 전혀 다른 캬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에 당황할 것이다. 데이빗 린치는 우리가 겉으로 보이는 것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고 그것이 얼마나 허상으로 가득한 것인지 보여준다.
이 영화는 크게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의 7할을 차지하는 전반부와 나머지 3할의 후반부로 나뉜다. 전후반부에 주인공은 같은 배우지만 이름이 다르다. 전반부에 베티는 후반부에 다이아나가 되고 리타는 카밀라가 된다.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듯 호응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혹자는 이를 다이아나가 카밀라를 애증 하는 후반부에 대응하는 꿈으로써 전반부에 베티와 리타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따라가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얼굴이다. 같은 배우가 다른 이름을 가지고 다른 배역을 연기함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동일하다는 이유로 두 이야기를 꿈과 현실로 구분 지어 연결하려 한다. 즉 어떤 것이 꿈이고 현실이냐를 구분 짓는 관성적인 관람법에 이것은 영화 자체가 꾸는 꿈이라 강변하는 것 같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란 지역은 LA가 내려다 보이는 할리우드 접경에 있다. 리타는 사고 후 기억을 잃고 그곳에서 도심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그 자체로 메타 영화적 요소를 지닌다. 리타의 사건 현장에 온 형사 들은 말한다. 단서는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그 말은 곧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어딘가로 섭입해 들어가나 그곳이 어느 곳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들린다. 기억을 잃은 리타는 자신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 거울 속에 비친 리타 헤이우드를 보고 자신의 이름을 리타라고 해버린다. 이후 기억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이 다이아나 셀윈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이름이 적힌 주소를 가보지만 놀랍게도 부패한 여인의 시신을 발견한다. 리타인지, 다이아나인지 모를 미스터리한 여인은 머리를 자르고 금발 행세를 한다. 잠이든 리타는 잠꼬대로 ‘실렌시오’ ‘노 아이 반다’를 외친다. 깨어난 그녀는 베티를 깨워 갈 곳이 있다고 말한다. 금발의 가발을 쓰고 도착한 클럽 셀렌시오, 무대 진행자는 계속 ‘노 아이 반다’( 밴드 없음)을 외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은 녹음이고, 여가수가 노래를 하다 졸도하기도 한다. 이것은 일종에 영화 자체를 암시하는 메타포다. 허구의 세계에 발을 들였으나 금발로 자신을 감춰야 하고 무엇이 현실이고 가상인지 구분이 안 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복잡한 이야기 구조에 비해 화면에 비치는 인물과 장면 구성은 지나치게 평이하다. 마치 입체감을 최대한 거세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 소품에는 강렬한 원색의 이미지를 써서 도드라지게 했다. 이는 특정 인물에 감정을 몰입하며 집중하지 않게 함과 동시에 무작위로 나오는듯한 캐릭터들의 연결을 통해 이야기의 무의식으로 이어나간다.
인간은 상상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에 경계에 선다. 거기서 우리는 비로소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법을 배운다. 이 영화는 수많은 함의로 가득하다. 비좁은 시야로 그 깊이를 다 헤아리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좋은 영화는 취향을 타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 말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첫댓글 이 작품은 어렵다해서 보기를 포기했었던 기억이 나네요.ㅎ
잘 읽었습니다. 역시 어려울거 같다는 생각이.. ㅎㅎㅎ
예전에 영화관에서 봤지만 뭘 봤는지 모르겠어요 ㅠ.ㅠ 제 머리 속에선 💄립스틱의 빨간 색이 연관 검색어가 되어 데이비드 호크니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그림 이미지로 남았어요. 혼란스럽다 정도로. 이동진이 다른 영화에서 쓴 '의미와 상징의 매설이 깊지 않다'라는 문장이 기억나는데 이영화는 지나치게 깊거나 산발적으로 뭍혀서 포기해버리게 되는 영화에요 ㅠ.ㅠ 아무튼 반가운 글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