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열차를 탔습니다. 서울은 아직 바람 속에 겨울 끝자락이 남아 있어서 홑것을 허락하지 않으나 남녘에는 이미 꽃불이 놓아졌다는 기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유혹한 친구의 엽서 사연은 이러하였습니다
'점심상에 올라온 냉이무침에 밥을 비벼 먹고 볕 잘 드는 우리 집 툇마루에 앉아 있자니 졸음이 몰려오더구나. 봄날 볕은 살찐 암쥐가 고양이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고 지가가도 고양이 눈을 감기게 한다고 하지 않더냐. 그렇게 잠시고개 두서너 번 끄덕였을 것이다. 수탉이 홰를 치며 우는 통에 눈을 떴더니 우리 외양간 곁의 그 매화나무에서 하얀 꽃망울이 벙글고 있지 뭐냐.'
그 매화나무란, 친구와 내가 어린 시절에 곧잘 오르내리며 매실을 따론 했던 나무입니다. 풋것일 때는 시어서 온 통 두 눈을 내리감고서 먹던 열매입니다.
그런데 친구의 엽서를 읽고 났을 때에는 눈발처럼 매화 꽃잎이 날리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아!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서 새로 맞춘 까만 대바지 교복에 중학교 단추며 배지를 달고서였습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담장을 타고서 외양간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에 우리는 키대로 누워서 새로 시작할 중학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햇살과 매화 꽃잎에 눈이 부셔서 웃옷을 벗어 덮고 누었는데 어느 사이인지 잠이 들어버렸더군요. 우리가 잠이 깨었을 때는 석양 무렵이었습니다. 우리 옷에는 물론 외양간 지붕에도, 소 여물통에도, 두엄더미에도,
그러나 이제 다시 찾아간 고향은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려지는 풍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를 눈치챈 친구가 말하였지요.
"꽃은 아직 그대로야. 꽃대궐이나 찾아가자.
백운산 자락의 백계동. 도선 국사가 이무지를 쫓아 내고 숯으로 못을 메워 절터(옥룡사)로 삼았다는 이곳의 7헥타나 되는 숲은 순전히 동백림이지요. 겨울부터 꽃불이 나기 시작하여 봄날에는 온통 빨간 숯불덩이 같은 동백꽃 천지 입니다
동백은 피어 있는 모습보다도 숭숭 송이째 져 있는 낙화의 모습이 더 장관이라고 감히 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흡사 땅이 꽃을 내놓은듯 하니까요.
지상을 더러는 고통받는 곳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리고 땅을 연옥으로, 땅 밑을 지옥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상에 꽃이 있고 향기가 흐르고 있는 한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이 있어서 고통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통 못지않은 아름다움도 있다고요.
땅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 땅 만큼 정직한 이가 또 어디 있습니까. 동백을 심으면 동백을 내놓고 매화를 심으면 매활를 내 놓고 벼와 보리를 파종하면 한 알씩을 잘 썩혀서 백배 천배의 수확을 거두게 하는 저 땅이 왜 단련을 주는 연옥이어야 합니까?
어느날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서(예를 들면 화산 같은)땅 밑이 지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땅 밑으로 지하수가 흐르고 있는데 어찌 그 물로 생명을 이어가는 우리가 불모의 지옥이라고 할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저 동백꽃이, 아니 다른 꽃잎들도 하늘로 흘러가버리지 않고 땅을 덮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땅을 위로하는 아룸다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 저기 아름드리 동벽나무에 다람쥐 한마리가 눈망울을 휘둥그레 뜨고서 올라가고 있군요. 저 동백나무에는 먹을것도 없는데 올라가는 것은 향기를 데리러 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문득 오규원 시인의 시가 생각 납니다
철쭉의 봉오리가
톡톡
터질 때마다
산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다.
산속의
골짝물도
산에 사는
다람쥐의
볼도
조금씩 붉어지고 있다.
구경 다니는
다람쥐 때문에
숲속에는
길이
자꾸 생기고
*봄날의 산
다람쥐의볼이 얼마만큼 붉어져 있나 보았으면 해서 손짓을 했더니 저 겁 많은 녀석은 도망가버리고.... 저와 친구는 동백 숲 그늘이 푸르게 드리워져 있는 골짝물 가에서 도시락을 풀었습니다.
하얀 쌀밥에 팥물처럼 번져 있는 붉은 기운. 그것은 바로 동백꽃 그림자인 것을 도시락을 비우고서야 깨달았습니다. 빈 도시락을 싸는 하얀 수건에도 붉은 얼룩이 앉았으니까요.
우리는 일어나서 돌아갑니다. 하지만 아쉬워서 동백꽃 숲을 다시 한 바퀴 돕니다. 향기가 좀더 많이 묻혀 들었으면 합니다.
꽃길을 걸어 나오니 나비가 옷에 묻은 향기를 좇아 나폴나폴 나폴폴 따라 오더라는 옛 시인의 시가 있는데, 우리도 오늘 이곳 백계동의 향기를 데리고 가면 그렇게 따라올 그 뉘가 없을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