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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사는 법을 알려준 스승님, 살림팀
21년도 살림팀을 들어갔다. 처음부터 살림팀에 들어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세령언니가 한다길래 궁금해서 따라서 지원했다. 말 그대로 친구 따라 강남 간 것이었다. 무엇을 배우겠다 마음을 먹지 않고 들어가니 힘들었다. 일처럼 느껴졌고 힘이 빠졌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일을 또다시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계속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여느 때와 같이 설거지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하는 나를 알아차렸다. 집중 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살림팀을 통해 지금을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기적인 게 이타적임을 알게 해주신 스승님, 강경수
삼무곡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어느 날 현곡이 학교는 문을 닫았다며 갈 사람은 가고 있을 사람은 있으라고 하셨다. 모임이 끝나고 나는 어리둥절하며 짐을 쌌다. 그러다 문득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졌다. 본관에 가니 여럿이 모여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로 어떻게 할지, 어떻게 배우고 있는지 이야기 하고 있었다.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윤이가 말한 한 문장이 기억난다.
‘이기적인 게 이타적이다.’
이 문장이 계속 기억 속에 남아 있었지만 정작 그 뜻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참 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이미 몇 번의 새 학기를 맞이했지만 매번 설렜다. 때마침 내 또래 여자친구가 입학했다. 매일 방에 놀러 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내가 물었다.
“요즘 호감 가는 사람 있어?”
그 친구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나 땡땡이! 너는?”
순간 온갖 생각을 했다. 호감 가는 사람이 겹쳤던 것이다. 나는 친구를 잃기 싫었다. 생각나는 다른 이름을 댔다.
“나는 경수 오빠.”
그 말을 하고 얼마 후부터 지공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말을 걸고 지내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거침없이 다가갔고 점점 가까워지다 우린 사귀게 되었다. 지공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처음엔 부담스러웠다. 나는 흔히 ‘기브 앤 테이크’라고 하는 연애를 해왔다. 받는 게 있으면 무조건 해줘야 할 것 같고 얼마나 주느냐가 사랑의 크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지공은 달랐다. 내가 주든 말든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내가 무언갈 받을 때마다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워서 ‘안 해줘도 되는데..’라는 말을 계속했다. 그럴 때마다 지공이 말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주는 거야. 주는 게 나한텐 행복해.”
그제야 이기적인 게 이타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주신 스승님, 부순홍
내 유년기 시절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다. 아빠와 함께했던 순간들이다. 유치원이 끝나면 항상 아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는 읍내에 살았기 때문에 유치원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걸어갈 때마다 나는 “아빠, 나 다리 아파.”하며 아빠에게 업혀 다녔다. 그러고 문구점 들리는 걸 좋아했다. 뭘 샀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집으로 가는 길에 항상 문구점을 들렸다. 아빠는 내가 사달라는 것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줬다. 그리고 난 그렇게 아빠 무릎에 앉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도 아빠 무릎에 앉는 바람에 아빠 복숭아뼈 쪽 살은 굳은살로 가득했다. 나는 그런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그런 아빠는 술을 좋아한다. 뭐 어른이니까 문제는 없다. 하지만 좀 과했다. 술에 취해 우리에게 손찌검하거나 호통을 치지는 않았다. 그저 거실 소파에 누워 잘 뿐이었다. 과해지기 시작한 건 아마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부터인 것 같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조금 어릴 때 돌아가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뒤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그 뒤로 아빠는 주말만 되면 술을 마시더니 잠자기만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주말에서 월요일까지, 화요일까지 마시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의 학교에서 오는 전화를 대신 받아 쉰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엄마는 차마 내 앞에서는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아빠에게 “정신 차려.” 한마디 하셨다. 이것들이 1년 2년 지나고 익숙해지고 일상이 되었다. 그러자 엄마도 무너졌다. 엄마는 울었고 그만하라며 소리 질렀다. 나는 아빠가 술 마시고 소파에서 잘 때면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무서웠다. 술에 취해 찌든 얼굴과 냄새, 볼꼴 못 볼 꼴 다 봤다. 세상에서 제일 멋졌던 아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빠가 항상 집 안에서 마시지 않고 뒷문을 나가서 마신다. 담배도 뒤에서 피우시기 때문에 뒤에 가는 빈도가 많았다. 술을 마시고 집 안에 들어와 거실 소파에서 자고 깨면 다시 뒷문으로 나가는 게 반복이다. 어느날은 뒤에 나가더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울음이었는지 화남의 소리였는지 고함를 질렀다. 이 일은 나에게 충격이였고 아직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술이 깨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냈다. 아빠도, 엄마도, 나도. 평소의 아빠였다. 한없이 다정하고 장난기 많은 우리 아빠. 그런 모습들이 나에겐 이해되지 않았고 사춘기 때와 맞물려 조금은 거리가 생겼다.
그러다 나는 삼무곡에 왔고 아빠와는 멀어졌다. 방학하고 집에 가도 자고 있는 모습이 많았다. 아무렇지 않았다. 무관심해졌다고 하는 게 맞다. 그러다 작년 휴가 때 집에 가게 되었다. 집에 갈 때면 학교도 시골, 본가도 시골이라 교통편이 좋지 않다. 그래서 항상 아빠가 차로 데리러 온다. 하지만 집에 가게 된 당일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가 자고 있어서 엄마가 가게 되었어.”
나는 그런가보다 했다. 집에 가는 길 엄마가 얘기를 꺼냈다.
“아빠가 자는 모습 보면 괜찮아?”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이젠 아무 생각 없어.”
“혹시 네가 우울했던 게 아빠 영향이 있었어?”
“음… 많은 이유 중에 하나이긴 하지만 꼭 아빠 때문은 아니야.”
“엄마가 불법을 배운 지 좀 됐잖아? 배우다 보니 그 때 엄마라도 마음 단단히 먹고 아빠한테 휘둘리지 않았으면 네가 괜찮았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 엄마가 미안해.”
눈물이 났다. 나는 더 이상 아빠에 대해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 학교에 오고 내가 마음이 넓어져서 아빠가 그러는 거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마음 한켠에 치워두고 무시하고 회피하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다시 학교에 돌아와 아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나는 아빠에 대해서 잘 몰랐다. 아빠의 행동과 보이는 모습만 알지 그 속에 대해선 잘 몰랐다. 그리고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빠도 술을 조절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내 마음을 얘기하고 아빠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집에 다시 갔다. 처음으로 아빠와 진지한 이야기를 했고 아빠이기 전에 ‘부순홍’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아빠는 아빠 시대에 가장이라는 이유로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감정을 쌓아두다가 그게 술로 풀렸다는 것이었다. 사춘기 아이로 보였다. 감정표현에 미숙하고 서툰 아빠였을 뿐이었다. 나는 아빠의 슬픔마저 미워할 수가 없었다.
아빠와 이야기하던 중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봐. 대한민국이 있어.
‘서울이 어디 쪽에 있어요?’
아빠는 서쪽이라고 하겠지? 그럼 인천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
‘서울이 어디 쪽에 있어요?’
동쪽이라고 하겠지? 그럼 전라도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
‘서울이 어디 쪽에 있어요?’
북쪽이라고 해. 어? 아빠가 있는 쪽에서는 분명히 서쪽인데? 그럼 인천에 있는 사람이 틀렸나? 아니지? 틀렸다고 할 수 없어. 인천에 보는 사람도 맞고 전라도에서 보는 사람도 맞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거야.”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게 한 면만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닌 걸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누군가를 이해할 순 없더라도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에 그 사람을 인정할 순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알려 주신 스승님, 여공
여공을 처음 경험 한 건 20년도에 살림팀에 들어가서부터였다. 그때 학교 일과로는 밴드 프로젝트를 했다. 나는 욕심이 많아서 다 하고 싶었다. 살림팀도 하고 악기 다루는 것도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에 모두 집중할 수 없었고 한 가지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음악이 너무 좋았고 결국 살림팀을 포기했다. 나 혼자 결정을 하고 여공께 말씀드렸다. 사실 그땐 여공이 무서워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말씀드렸다. 여공은 황당해하시며 이건 통보라며 나무라셨다. 나는 그 호통에 결국 눈물을 흘렸다. 여공은 당황하시며 머뭇거리시더니 이건 예의가 아니었다며 조곤조곤 얘기하셨다. 그리고 일단 알겠다고 하시며 어영부영 끝났다.
살림팀을 하지 않을 때면 여공과 관계를 맺는데 어려웠다. 식사 준비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마음을 다하다 보면 여공은 우리들과 만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다시 21년도에 살림팀을 선택하게 되고 여공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여전히 여공은 무서웠고 혼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나를 숨기고 눈치를 봤다. 여공의 기분이 좋으신지 안 좋으신지 보게 되었고 좋아 보이면 안심하게 되었다. 반면 안 좋아 보이면 실수하지 않으려 애썼다. 한번은 손님이 오셨을 때 그릇을 써내다 떨어뜨렸다. 떨어뜨리는 순간 나는 여공 표정부터 살피는 나를 보게 되었다. 나를 혼내실지 조마조마했다. 사실 배울 때 혼나는 배움도 있다. 하지만 어린 나는 혼나는 걸 두려워하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살림팀이 끝나면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나가서 그 이상의 배움을 얻지 못했다. 여공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두려움에 싸여 다가가지 못했다.
여공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하지만 나는 여공이 말씀하시는 그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여공 주변에는 여공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서 내 사랑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여공의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여공은 우리에게 자신이 말씀하신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다. 살림팀 초반에는 약속 시간이 되면 우리랑 살림을 같이 시작하셨다. 하지만 더 직접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시기 시작하고 나서는 약속 시간 되기 전부터 나오셔서 미리 다 해 놓으셨다. 그래서 시간이 남는 날에는 앉아서 쉬자고 하시거나 짧게 예능이나 영화를 틀어 놓으셨다.
이런 사랑을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여공이라는 스승이 하고자 하는 말씀을 듣고 나서는 여공뿐만 아니라 다른 메시지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여공을 통해 새로운 사랑의 방법을 배웠다. 그 뿐만 아니라 무언가 배우거나 마음에 남았던 것을 억지로 표현하거나 꾸며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옮기는 첫 걸음이 되었다.
-판단하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게 해주신 스승님, 이재혁
때는 내가 학생회장을 할 때였다. 우리는 일요일 저녁 청소를 하기 위해 본관에 모였다. 모임을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쿵’ 소리가 나며 앉는 데크가 내려앉았다. 데크의 상태에 모두가 집중됐고 부산스러워졌다. 이 일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일단 청소를 진행했고 내가 현곡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모임은 마무리가 되었다. 청소 당번들은 청소하러 갔고 때마침 현곡이 오셨다. 현곡이 데크를 보시더니 이건 데크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데크를 들었다 내려놓는 과정에서 제대로 내려놓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시 들기 위해 힘이 센 남자 친구들을 모으게 되었다. 방에 있는 친구들은 동혁이에게 데려오라고 전화했고 나는 살림 교실을 청소하고 있는 친구들을 데리러 갔다.
살림 교실에 들어가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본관 뒷문 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이었다. 계속해서 나를 불렀지만 무시한 채 살림 교실에 있는 친구들을 데리고 나갔다. 밖에 나온 뒤에야 나는 대답을 했다.
“왜?”
“어디로 가라고?”
나는 이전에 동혁이에게 말했지만, 전달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순간 짜증이 나서 소리쳤다.
“본관으로 가라고 했잖아!”
현이가 벙 찌더니 멀뚱멀뚱 나를 쳐다봤다.
“뭐?”
하지만 대답은 뒤에서 들렸다.
“뭐.”
재혁이였다. 감기에 걸려 코 막힌 나의 목소리를 놀리듯 따라 했다. 나는 뒤를 확인하곤 내가 화났다는 걸 표현했다.
“아이씨.”
재혁이는 또다시 목소리를 따라 하며 말했다.
“아이씨.”
뒤를 돌아 재혁이에게 말했다.
“깝죽거리지 마.”
그러곤 다시 본관을 향해 갔다. 그렇게 모두가 본관에 모였다. 현곡을 찾으러 나가려는데 동혁이와 기주가 청소하기 위해 데크 위에 올려놓은 책상과 의자를 내리려 하였다.
“일단 현곡 올 때까지 기다려.”
말을 하고 문으로 향했다.
“일단 현곡 올 때까지 기다려.”
또 재혁이였다.
“완전 예민 보스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리쳤다.
“야!”
재혁이는 멈추지 않았고 몇 마디 더 했다. 나는 너무 어이없어서 말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누난 학생회 때도 그랬어. 자기 화나면 정색이나 하고.”
재혁이가 정색한 나의 표정을 따라 하며 말했다.
“‘네, 선배님’ 하면서 꼽이나 주고 뭐하냐?”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턱 막혔다. 자기 마음대로 나를 판단하곤 담아두었다고 생각에 더욱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라고, 오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말해봤자 변명밖에 더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리만 쳤다. 사실 나도 똑같이 상처 주는 말을 하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 이건 아니야.’ 하며 그만두었다. 그러니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소리만 지르는 짐승이 되어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실랑이하다가 나는 나의 화를 못 이겨 내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을 내던졌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핸드폰은 산산조각 나있었고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너무 놀랐다. 화를 못 참아 정신줄을 놓고 소리 지르는 나의 모습이 무서웠다. 평소에 화가 나도 조곤조곤 말하려 하는 나에겐 너무 충격적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듯이 현곡을 찾으러 나갔다. 눈물이 나려 했지만, 꾹 참고 현곡께 갔다.
“본관에 다 모였어요.”
현곡은 알겠다고 하셨고 나는 다시 본관에 들어가 깨진 휴대폰을 챙겨 뒷문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면서 온갖 생각을 했다.
‘왜 저러는 거야?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지도 날 모르면서 왜 제멋대로 생각하고 내가 이렇다, 저렇다, 단정 지어 놓고서는 나 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또 내 뒷담이나 까면서 낄낄대겠지? 진짜 토 나올 것 같아. 그냥 다 그만하고 싶어.’
모든 게 무서워졌고 모든 게 버거워졌다. 집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엄마에게 전화하기 위해 핸드폰을 켰지만 켜지지 않았다. 더 서러웠다. 부서진 핸드폰이 내 모습에 겹쳤다. 산산이 조각난 유리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핸드폰이 있는 니은이가 생각났다. 니은이를 찾기 위해 통천재로 내려가다가 때마침 올라오던 니은이와 만났다. 니은이가 우는 날 보고 당황하더니 안아주면서 무슨 일이냐 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안겨서 펑펑 울었다.
더 이상 재혁이를, 아니 모든 친구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내 감정에 솔직하면 솔직하다고 미워하고, 솔직하지 않으면 왜 솔직하지 않았냐며 나를 나무라는 상황들에 나는 비눗방울처럼 조금만 만지면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사실 친구들을 만나는 게 불안하고 힘들었던 건 전 학생회가 없어졌을 때부터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뒤에서 얘기하더니, 나와 얘기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않은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곤 나에게 하는 행동이 달라졌고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아무도 내 앞에서 나를 욕하거나 폭력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 작은 눈빛,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상처가 되었다. 그렇게 생긴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었다. 그 일에 대해서 몇몇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의 관점은 달랐기에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도 나를 이해해 주진 못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입을 잠갔다.
‘그래, 내 업보지. 내가 무언갈 잘못했으니까 나를 미워하는 거겠지. 조용히 내 할 일 하면 나를 미워하지는 않지 않을까?’
조용히 내 안에 되새기며 살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어느 순간 나는 학생회장 자리에 올라가 있었다. 임시 학생회장이긴 했지만, 학생회에서 하는 대부분의 일을 하였고 나는 다시 한번 학생회라는 이름으로 애들과 만나게 되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하는 건 원치도 않았다. 아니, 나를 이해하는 것조차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작은 습관들을 보고 또다시 뒤에선 나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있었고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모두 앞에서 이야기할 때가 되면 버벅거리고 단두대 앞에 서 있듯 두려웠다. 그렇게 학생회장이라는 이름은 나에게 족쇄가 되었다.
이번 일도 어떻게든 받아내려 했지만, 도저히 괜찮아지지 않았다. 더이상 모든 걸 버틸 자신이 없었다. 애들을 받아들이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았다. 순간 학생회를 그만두면 내 마음이 좀 나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생회장 자리를 내려놓기 위해 다음날 학생회를 열겠다고 공지방에 올렸다. 올린 후에도 감정은 요동을 쳤고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울었다. 공지방에 올라온 내용을 보곤 연우가 나를 불렀다. 그래서 살림교실로 갔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연우가 조용히 듣고는 말했다.
“네가 학생회를 하면서 원했고, 원하는 게 뭐야?”
“나는 존중을 원해.”
“그럼 네가 생각하는 존중이 뭐야? 정답은 없어. 그냥 네가 생각하는 걸 말해봐.”
“내가 생각하는 존중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아, 너는 그래? 그래, 알았어.’ 하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거야.”
“그럼 너는 애들을 존중했다고 생각하니?”
“어. 당연하지.”
“그럼 애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너를 존중하지 않았다고 생각할까?”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들도 똑같이 생각할 거야. 애들도 너를 존중했다고 생각할 거고 너희에게 존중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거야. 참 모순적이지? 네가 상처받은 것처럼 분명 애들도 상처받은 게 있을 거야. 서로 존중하기 위해서 학생회가 없어졌던 거고. 또 이렇게 끝내고 싶어?
네가 집으로 가지 않았던 게 표면적으로는 도망가지 않은 거지만 자세히 보면 너는 또 도망가고 있는 거야. 한 번 제대로 마주하고 배워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내 감정에 휩싸여 나만 상처받은 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서 방어적으로, 또 공격적으로 생각하기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 또한 아이들을 판단하고 있던 것이다. 미안했다. 결국 학생회를 그만두는 건 지금 당장 기분은 괜찮아질 수 있겠지만 나에게 도움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것보다 큰 건 또다시 상처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제는 배우고 싶었다.
다음 날 내가 공지한 대로 학생회를 하였다. 모든 걸 그만두기 위해 연 학생회였지만 알아차린 이상 모두에게 사과하기 위한 학생회가 되었다. 본관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이야기하였다.
"내가 학생회를 하면서 한 가지 바란 게 있었어. 바로 존중이었어. 나는 너희를 존중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 같아. 또다시 너희를 판단과 편견을 가지곤 너희를 만나고 있었어. 미안해. 나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너희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나는 재혁이를 통해 판단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를 통해 나는 내가 얼마나 무서운 짓을 저질렀는지 또다시 자각하고 다시 학생의 길로 돌아갔다. 그토록 미워하던 학생회도 결국 내 큰 스승이었다.
-앎을 삶으로 이끌어주신 스승님, 관옥 이현주
나는 글쓰기를 정말 싫어했다. 일반 학교 다닐 때 싫어하는 과목 중 하나가 국어인 만큼 글과는 척을 쳤다. 재미도 없었고 살면서 내가 글을 쓸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삼무곡에서는 글 쓸 일이 많았다. 나는 내 이야기를 쓰기 싫기도 했고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계속 써 봤지만 내 안의 갈등은 정리되지 않았다. 말하고 싶은 건 많은데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만 더 했다. 그래서 되도록 글을 안 쓰게 되었다.
그러다 성인식 준비를 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다. 당연히 쓴다고 써지지 않았다. 막막했다. 현곡한테 가서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말했다.
“글이 안 써져요. 글이 저를 싫어하나 봐요.”
그러더니 현곡이 대답하셨다.
“그럼 글과 친해지면 되겠네.”
하지만 나는 글과 친해질 수 없었다. 아무리 써 봐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표현이 나오지 않았다. 제일 힘들었던 점은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추억 속에 잠겨 그 속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올해 2학기에 관옥 이현주 선생님이 특강을 하신 적이 있다. 물음에 관해 이야기하셨다.
“꼬맹이 때 한 3살 4살 5살 이 무렵에는 전부 몸 전체가 질문 덩어리야. 왜요? 왜요?
그렇게 물어보든 인간들이 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점점 질문하는 게 사라져. 다 아는 것처럼. 쥐뿔도 모르면서.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데? 안 물어. 그러니까 답이 안 오지. 참.
그래. 질문하는 법을 지금부터라도 다시 개발해. 다시 찾아. 끊임없이 질문해.”
나에게 물음도 참 어려웠다. 내 속내를 들킬까 봐, 어떤 걸 질문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런 점이 글과 빗대어 보였다. 문득 생각났다.
‘글도 물음도 나의 표현이지 않을까?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정리하는 게 어려운 거구나. 그렇다면 이현주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끊임없이 해보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에게 이현주 선생님 말씀은 ‘끊임없이 연습하라.’라는 말로 들렸다. 그냥 되는 건 없었다. 머릿속에 있다고 해서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앎을 삶으로 옮기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내가 어떤 존재로 살고자 하는지를 일깨워주신 스승님들
어릴 적 나는 고집이 아주 셌다. 경쟁심도 강해서 누군가 나보다 잘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나는 엄마와 같은 학교에 다녔다. 엄마 직장 동료 중 나와 동갑인 아들이 있었다. 그걸 계기로 서로 집에 놀러 가기도 했고 학원도 같은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그 친구는 공부를 엄청 잘했다. 나는 그런 친구가 엄청 부럽고 질투 났다. 평소에는 친하게 지냈지만, 학원에 가서 공부할 때만 되면 그렇게 괴롭혔다. 학원에서 영어 단어 시험을 칠 때 틀리면 틀린 만큼 곱하기 10 해서 써야 했다. 그걸 꼬투리 잡아서 이거 덜 썼다, 철자 틀렸다, 등 이런 식으로 힘들게 했다. 그 친구는 화내지도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괜찮은줄 알았다. 그러다 빼빼로 데이 때 그 친구에게 빼빼로를 주기 위해 그 친구 어머니 교실에 갔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그 친구는 엄마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고 빼빼로를 교탁에 놓고는 허겁지겁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 친구는 다른 학원으로 옮겼고 멀어졌다. 그때는 친구에게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구나 하며 끝났다.
나는 새 친구를 만드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캠프를 많이 다녀서 그런지 어디를 가더라도 친구를 사귀었다. 어느 날은 목욕탕에 갔다. 냉탕에서 많이 놀았는데 그날은 내 또래가 있었다. 말을 걸어 재밌게 놀고 엄마한테 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친구 생겼어! 이름은 누구래. 어디에 살고 ……”
하지만 한 시점부터 어려워졌다.
초등학교 5학년 중반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학교에 등교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인사를 시작으로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외면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면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자리를 비켜버리거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학교는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은 한곳에 모여서 휴대폰 게임을 했고 핸드폰이 없었던 나는 그 곁에서 구경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나를 무시한 이후로는 내가 다가가지도 못하게 했다. 같은 학원에 다니던 친했던 친구도 나를 무시했다. 학교가 끝나면 같이 학원에 가고 간식을 사먹었는데 그날부터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먼저 가버렸다. 나는 열심히 친구들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끝내 왜 그러는지조차 모른 채 그 학기 내내 나는 없는 사람이 되었다. 6학년으로 올라가고 친구들과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모두와 잘 지내지만, 잘 지내는 게 아니었다. 속으로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관계의 선을 그었다. 나는 혼자가 되기 싫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잘 지냈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나를 외롭게 했다.
그 때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외로움이 나를 무력하고 우울함에 빠지게 했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환경이 바뀌면 괜찮지 않을까?’ 했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끝 무렵, 나는 안동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처음엔 모든 게 새롭고 설렜다. 하지만 한두 달이 지났을까 다시 무기력해졌다. 처음엔 자책을 많이 했다. 나에게는 10대 때 흔히들 하는 걱정들이 나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성적도 괜찮았고 집에서도 잘 지냈다. 관계도 좋았다. 친구들은 모두 나에게 잘해주었고 문제가 없었다. 그 무엇도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우울함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했고 계속해서 깊은 바다에 빠졌다. 벗어나보려 노력하기도 했다. 약을 먹어보기도 하고 상담을 다녀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프다는 핑계로 학교를 하루 이틀 빠지다 나는 결국 학교를 관두게 되었다. 그리고 방에 틀여박혀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보다못해 더 이상 안 되겠는지 대안학교를 알아봤다. 그렇게 삼무곡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내 세계에 갇혀 소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두에게 벽을 세우기도 하고 미움을 받아보기도 했다. 이때까지 겪은 경험들은 아무 배움도 낳지 못하고 나에게 상처로 남았다.
그렇게 상처로 남은 채 시간이 지나고 ‘두려움과 만나라.’ 글을 쓰게 되면서 그 경험들과 나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어릴 때 나는 모든 것이 내 것이고 혼자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그것들을 알려주기 위해 수많은 스승이 찾아왔지만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그 스승들을 상처로 받아드렸지만, 사실 상처를 준 사람은 없었다. 그걸 몰랐던 나는 혼자를 결심했지만,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나는 그 사이에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 외로운 혼자가 되고 싶진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떤 존재로 살고자 하는가?
만일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이제는 [혼자]가 아닌, [하나]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